왕양명 40살에 아버지께 올린 편지 (寓都下上大人書)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 이 편지는 왕양명이 39살 겨울에 북경에 올라와서 40살 근무할 때 5월에 쓴 것입니다.
왕양명의 가정생활의 일부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등뼈도 아프고, 관직도 그만 두고 싶고, 겨울옷 여름옷을 보내달라 등등이 있습니다.
왕양명이 사실상 집안 살림에 자주 관여하고 걱정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누각을 짓든지 고향 여요의 재산을 나눠주든지 관여합니다.
아버지 왕화(王華)와 아들 왕양명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1510년(왕양명 39살) 4월에 아버지와 몇몇 사람들이 환관 유근(劉瑾, 1451—1510, 8월 사형)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정장(廷杖)을 때려서 속죄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 소문이 북경 관계에 자자하였습니다. 왕양명을 아는 사람들도 왕양명에게 아버지의 억울함을 얼른 풀어드려야 하며, 풀지 못하면 아들인 왕양명에게도 죄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왕양명이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상소문을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소식을 듣더니, 아들 왕양명에게 서신을 보내 “네가 나의 죄를 가중시키려고 하느냐?(汝將重吾過耶?)”고 말하며 나서지 말라고 말립니다. 심지어 아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서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안 믿는다.(人謂女智於吾,吾不信也。)”고 말하고 아버지 뜻을 따르라고 이릅니다. 아들 왕양명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해원하려고 나서는 것을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이 상소문을 올려 아버지의 억울함을 푸는 것을 그만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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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아들 왕수인이 백배 절 올린 뒤에 서신을 아버지 어른 앞에 올립니다.
지난달 노복 왕수(王壽)와 내륭(來隆)이 기주(祁州, 현재 하북성 保定市와 安國市)에서 배를 타고 돌아갔으니 날짜를 계산하면 지금은 집에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요즘 할머니와 어머니(계모 趙氏)께서 건강하신 것이 큰 위로가 되며, 저희 자식들도 평안합니다. 집안 여자들이 북경에 오지 않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만, 막지 못한다면 노복을 데리고 여자 1명이 옷상자 한두 짝 갖고 가볍게 오는 것이 낫습니다. 오더라도 요즘은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작년에 강서성에 찾아왔을 때 헛걸음한 것과 같습니다. 노복 내융이 고향으로 간 뒤에 북경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들이 오지 않겠다면 노복 1명에게 겨울옷과 여름옷을 갖고 빠른 배를 태워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최근에 정신과 기혈을 소모하여 약하며 등뼈가 아픈지 4-5년 되었는데 요즘 더욱 심하게 아픕니다. 제가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하고 싶은 생각은 단지 요즘 세상 형세만 고려한 것뿐만 아니고 몸도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집안 뒤꼍에 누각을 지으시겠다는 것을 들었는데 아주 힘드실 텐데 기둥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으니 그냥 단층을 지으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요(餘姚)에 있는 재산을 나누어주시는 일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결국 나눠주시는 것이 집안 모두를 위하여 좋습니다.(分析, 재산 나눔?) 서애(徐愛, 1487-1518) 매부는 아주 잘 있습니다.
마침 회계현(會稽縣) 지현 이씨가 돌아가는 편에 평안하다는 소식을 올립니다. 아버지를 곁에서 모실 날은 기약할 수 없어서 서신을 마치면서 그리움을 누를 수 없습니다.
5월 3일 아들 왕수인 백배 절을 올립니다.
王陽明,40살(1511) 5월,「寓都下上大人書」(中國歷史博物館 所藏):
寓都下男王守仁百拜書上父親大人膝下︰
前月王壽與來隆去,從祁州下船歸,計此時想將到家矣。邇惟祖母大人﹑母大人起居萬福為慰,男輩亦平安。媳婦輩能遂不來極好,倘必不可沮,只可帶家人,媳婦一人,衣箱一二隻,輕身而行。此間決不能久住,只如去歲江西,徒費跋涉而已。來隆去後,此間卻無人,如媳婦輩肯不來,須遣一人帶冬夏衣服,作急隨便般來。
男邇來精神氣血耗弱,背脊骨作疼已四五年,近日益甚。欲歸之計,非獨時事足慮,兼亦身體可憂也。聞欲起後樓,未免太勞心力,如木植不便,只蓋平屋亦可。餘姚分析事,不審如何?畢竟分析為保全之謀耳。徐妹夫處甚平安。
因會稽李大尹行,便奉報平安。省侍未期,書畢,不勝瞻戀之至。五月三日,男王守仁百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