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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사옥개포구 항공사진,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으로 제방이 있음 포구는 산 북측 집들 앞쪽이 포구였다함. 간척사업 후 포구를 금강쪽으로 이전하였음. |
1800년대 중반 이후 전라도지방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한 천주교신자들이 산골짜기에서 생활을 영위하며 옹기가마운영과 담배농사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교구촌 발생 초기에는 생산된 옹기를 지게에 지고 장터에 나가 직접 판매했거나 중간상인들에게 판매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년) 이후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라도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옹기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군산지역도 임피현과 함열현의 경계인 가는정이(현 서수면 마룡리 6번지 일대), 서수면 축산리 흥법(덜뫼, 현 서수면 축산리 흥법마을), 칠거리(현 회현면 고사리) 그리고 산골(현 성산면 산곡리)등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교우촌에서는 옹기가마운영이 주요생계수단이었다.
이중 칠거리 교우촌은 충청도 남포지역 교우들의 이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는정이 교우촌은 1900년대에 들어 공소를 약 800미터 북동쪽 함열현의 행정구역으로 이전하면서 군산지역 천주교 역사에서 빠졌다. 산골교우촌도 인구가 늘어나면서 현 성산면 고봉리와 창감 등으로 옹기가마가 확대되었다. 또한 서수면 축산리 마룡리 일대로도 확대되었다. 그런 결과로 산곡리 및 고봉리, 만동리 등이 점촌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산골교우촌 형성 시초는 충청도 내포지역에서 배를 이용하여 조운선의 역방향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일부가 교우촌 옹기가마에서 생산된 옹기를 배를 이용해 유통을 하였고, 옹기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금강 수계를 비롯하여 만경강 동진강 수계의 여타 교우촌 옹기들이 사옥개포구로 모여 전국유통을 하였다. 특히 ‘섬지역을 돌며 판매하고 마포나루까지도 옹기배를 운영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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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배(1970년대 재현) |
| 등짐으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들 |
이러다 보니 사옥개에서 옹기배를 운영하던 객주는 당시 천주교신자중에서도 신망이 있는 인사였으며, 박해시대 신자들이 모이기가 인근의 다른 곳에 비해 용이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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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다음 항공사진, 현재 역세권 공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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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얼음골(천호산, 현 완주군 비봉면)에 부임하여 전라도 선교를 담당한 리우빌신부가 군산지역을 사목 방문하여 사옥개와 막지미에서 미사를 드리고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가 군산지역에서 최초미사집전에 대한 문헌이다. 물론 그 이전에 군산지역 교우촌에서 선교사 신부들에 의해 미사집전이 이뤄졌을 수 있으나 이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1880년대 후반 성산면 산곡리 산골공소에 선교사들이 서울을 오가는 선교사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소형태의 공소를 만들었다. 제물포항과 군산항을 오가는 여객선을 이용할 때 선교사 신부들이 숙소형태의 산골공소와 군산항을 연결하는 관문이 또한 사옥개포구였다.
교우촌 중심지인 산곡리 산골교우촌이 아닌 사옥개에서 성사(미사)가 최초로 거행된 이유는 아마도 1882년이 박해가 진행중이므로 안전을 위하여 교우촌이 아닌 떨어져 있으면서도 교우(신자) 대부분이 알고 있는 장소를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소를 열었다는 사옥개는 사옥개포구의 객주 사가로 판단되며, 객주의 이름은 아직 모른다. 좀더 자료를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