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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육짓것 외 2편
최금진
제주에 이주한다는 건 마지막 버스를 놓치는 기분이지요
스스로를 용서하는 느낌
여기선 그 이주민들을 ‘육짓것’이라 불러요
떠돌이 버릇은 끝내 못 고친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자꾸 본전이 생각나서 노름판을 서성이는 느낌
견딜 수 없다면 다시 육지로 돌아가요
여기서도 직업은 있어야 하고
살림은 살아야 하고, 인맥도 만들어야 하고
불 꺼진 방에서 혼자 늙어갈 노후도 걱정해야죠
바다만 쳐다보고 있어도 될 줄 알았죠
오름의 억새꽃처럼 바람을 이기는 지혜라도 생길 줄 알았죠
육지에선 제주가 좋았고, 제주에선 육지가 그리웠지만
그런 말은 패배 같아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고요
나침반 같은 거, 이정표 같은 거 필요 없지만
쫄딱 망해서 흘러온 자신을 믿어야 하는 일은 늘 두려웠어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집도 절도 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은 마음 아시는지
날이 맑으면 여기서도 육지가 보인다 하니
어쩌면 내가 떠나온 곳에서도 내가 보일지도 몰라요
이젠 거기서 잘 살라고, 손 흔들며 인사해 줄지도 몰라요
한라산에서 발견되었다는 미기록종 나비처럼
헤어지고 떠나온 그대 꿈속에 가끔 날아가 볼 수 있다면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는 그만 포기하고
이제 한번 걸어가 보기로 할까요
한 바퀴만 돌면 목적지니까 다시 길 잃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해안선이 길게 이어진 길에서
충청도 어디가 고향이라는 뜨내기 육짓것 하나
저무는 길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남자들의 가죽 가방
아침 7시에 문 여는 카페에 가면
전부 중년 남자들이다
메고 온 백팩을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내려놓고
핸드폰으로 주식 창을 열어놓고 있거나
부동산중개사 문제지를 풀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뭘 열심히 읽거나 적거나 하는 척을 한다
한 잔의 커피로 위로할 수 없는
텁텁하고 쓰디쓰고 시큼한 아침을 홀짝이며
용감하고 뻘쭘하게 카페에 앉아 있다
남자에게 있어 가방이란
아직 할 일이 잔뜩 쌓여있다는 그럴듯한 변명
종일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자리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중년 남자들이 이마에 박힌 주름에 힘을 주고
카페 창문에 훤히 밝아오는 해를 손으로 가린다
볼 것도 없는 뉴스 기사를 읽고 또 읽는다
입을 꽉 다문 조개처럼
꺼내놓을 패조차 없다는 듯
저마다 영정사진처럼 앉아 있다
한 잔의 커피와 한 조각의 샌드위치마저 없는 삶이
곧 다가오겠지만
남자들은 저마다 지고 온 쪽방과 반지하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온갖 사연은 끝내 풀어놓지 않는다
어딘가를 향해 갈 곳이 있다는 듯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낡은 가죽 가방을 쉴 새 없이 확인한다
푹 꺼진 가죽 부대 같은 몸을
간신히 곁에 세워 놓고서
이빨들의 나라
어제는 이빨을 하나 뽑았다
임플란트를 할까 말까
어릴 때 치과쟁이네 뜰에는
이빨이 한 서너 말쯤 쌓여 있었다
뿌리가 돋은 이빨들은 새싹을 틔우기도 했다
손금이 다르듯 이빨의 무늬가 다르다는데
이빨도 어쩌면 새의 종류처럼 많을 것이다
사람의 이빨을 새가 물고 간다는 말을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새들은 둥지에 가득 누군가의 이빨을 쌓아놓고
부자로 환생할 아이들을 찾고 있었을까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내 유치는 모두 잃어버려서
새들은 내 이빨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임플란트를 할까 말까
이빨을 돈 주고 사다니
착한 사람들은 착한 이빨을 달고 다시 세상에 태어나
좋은 사과를 와삭 깨물어 먹을 텐데
그 푸른 정원의 햇빛 속에서
세상에 가장 위대한 신이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웃고 있으니
생각만 해도 좋다
이빨을 새로 해 넣는 것이 부담되지만
늙어서 귀퉁이가 뭉개져 가는 얼굴은
망부석이나 마애불이 된다
이빨들의 나라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빨에 대해 누구보다 관대한 왕이 있고
치아를 기준으로 선악을 가르는 관리들이 있고
사랑니를 뽑는 이들에게 꽃다발을 주는 나라
얼굴에서 이빨이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칭찬해 주는 나라
치아를 무덤처럼 쌓는 코끼리들처럼
동네 노인들은 새로 틀니를 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한 움큼 치아가 빠진 가을 국화가 피어 있고
거울로 비춰보면
얼굴 한쪽이 텅 비어 있다
<신작시>
골룸 외 2편
최금진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은 불행한 사나이
그에겐 언제나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의 주인은 털 빠진 까마귀
까마귀는 빛나는 것들을 제 둥지에 모아놓고 황홀해 한다
아깝다, 빛나는 허상이여, 내 아끼는 보물이여
골룸은 태어나면서 이미 늙어버린 사나이
이빨이 생선 가시처럼 가늘어진 사나이
혹시나 숨겨 놓은 재산이라도 있지 않을까
물려받은 금반지라도 하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넌지시 캐묻는다
손가락마다 반지처럼 삐져나온 관절염
색깔이 다 빠져나간 두 눈동자
숙제를 하지 않아 자주 매를 맞던 어린 날
회초리 앞에서 파삭파삭 부서지는 종아리는 매콤하고 시원했다
빼앗기고 포기하는 것이 생활에 용이하단 걸 알았을 때
이미 더럽고 징그러운 골룸
언제부터 혼자 살았는지 모르나 그는 혼자 산다
이렇게 고울 수가, 이렇게 예쁠 수가, 손에 움켜쥔 걸 놓치며
뒷방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굽은 등, 빠진 머리카락,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망할, 이렇게 좋은 걸 혼자 다 차지하려고 감춰 두었군
독종 같으니, 자면서도 움켜쥐고 놓질 않아
자식놈들에겐 아비를 두들겨 패서라도 빼앗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여자들의 반지가 딸년에게 돌아가듯
징그럽게 굽은 손가락 끝에서 빛나던 것들은 모두 주인이 따로 있다
빛나는 허상이여, 내 아끼는 보물이여
머리가 다 빠진 중년의 친구들이 까마귀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잔에 엎드려 운다,
다 줘버리고 나왔어, 어쩌겠어, 힘들어 죽겠다고 달라는 걸
땅끝 펜션
정전이었다, 노부부의 몸에도 불이 나갔다
노부부는 촛불을 켜지 않았다
어쩌면 어둠 속에서 은백의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의연하게 섹스를 할지도 모른다, 겁먹은 두 눈 대신
헐거운 육체에 찾아온 어둠을 이해하면서
서로의 몸을 애무할 것이다
번갯불이 공중에서 민들레처럼 노랗게 피었다가
머리카락처럼 떨어져 날렸다
고통스러운 날도 이젠 선명하지 않아서
노인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는다
아내의 윤곽도 보이지 않는다
알몸으로 잠들기는 다소 민망해진 바다는
머리맡에 섬 하나를 옷처럼 개켜 두었다
노인은 물을 받으러 복도에 나가
몇 번 정수기 버튼을 누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바람은 불 꺼진 복도 끝에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모든 건 잠시 지나가고 말 것이다
노인은 늙은 아내를 위해 농담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아내 또한 노인에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정전이었다
모든 것이 태초로 돌아간 것처럼 고요했고
노부부는 추운 알몸을 열어 짧은 포옹을 나누고
손을 잡았다가 슬며시 풀어놓으며
각자의 잠 속에 들어가 눕는다
번갯불 치는 방에 한 쌍의 백골이 환해지는 밤이었다
부탁한다는 말
남겨진 젖먹이를 부탁한다는 서른 살 청년의 말
사후처리를 부탁한다는 말
그 부탁의 말이 최저시급쯤은 되려나
전기 끊긴 콘센트에서 작은 불씨라도 두근거렸으면 좋겠는데
추워도 너무 추울 땐 고향의 봄이라도 불러야 하나
입에서 사타구니 아래까지 해동되어 흘러내리는 고름
박박 긁어먹고 싱크대에 처박아둔 밥통에서
곰팡이가 지저귀고
이부자리에 흘린 똥오줌에서
따스한 김이 잠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세 살짜리 그의 아들은
어린이날 선물과 생일상을 받지 못하리라
제사상도 받지 못하리라
서른 살의 남자가
얼굴에 온통 눈물샘뿐인 남자가
자신의 젖먹이를 부탁하는 말
남은 몇십만 원으로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부탁하는 말
그 말을 누런 종이 위에 적어 갈 때
자장자장, 아이 손바닥에 쥐어주던 아비의 불씨 한 움큼
조용히 꺼지기를 견디며 헐떡이던
서른 살의 붉은 얼굴
<시인의 에스프리>
사과나무 생각
최금진
내 고향 4월엔 사과꽃이 피어난다. 과수원의 사과꽃은 흰색과 연분홍이 구름처럼 피어났다. 꽃의 숭고함 앞에 탄성 외에은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집과 이웃해 있는 그 과수원은 돈 많은 한약방네 소유였지만 철조망 안에 다 가둘 수 없는 그 꽃들과 향기는 해마다 내 차지였다.
사과꽃 향기는 너무 약해서 꽃에다 코를 대지 않으면 거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사과꽃 향기는 그처럼 약하고 은은해서 나는 늘 그 향기를 까먹고 있다가 4월 무렵에야 그 향기를 다시 기억해 내곤 했다. 나는 향기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깊게 호흡을 가다듬곤 했다. 은은한 봄바람 속에서 둥둥 떠 있는 꽃송이들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어서 가슴이 벅차고 조바심이 들 정도였다.
그 한약방네 집은 우리 집과는 반대편 쪽에 있었고, 그 집 과수원의 한가운데엔 사슴 농장이 있었다. 나는 그 사슴 농장까지 가보진 못했다. 그러나 사과가 붉게 익어가는 늦은 가을이 되면 사슴 농장에서 울려 나오는 사슴의 울음소리는 무섭고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사슴을 보지 않았지만, 사슴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동화 속에 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한약방네 과수원 철조망에 개구멍을 내고 자주 그 과수원을 들락거렸다.
사과꽃이 만개할 무렵 한약방네 노인은 나의 할아버지를 불러 녹용을 채취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소주에 탄 사슴 피를 마시고 오곤 했다. 머리가 허연 한약방네 노인은 내게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노인은 언제나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노인은 동네 사람들과는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으며,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과수원을 한참을 걸어야 노인의 집에 갈 수 있었다. 과수원의 진입로는 커다란 쇠사슬과 자물쇠로 굳게 잠긴 철문이 세워져 있었다. 사과꽃과 사슴, 노인의 웃음... 나는 노인이 마치 먼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선처럼 느껴졌다.
세상엔 아름다운 꽃들이 많고 향기가 좋은 꽃들도 많다. 라일락과 아카시아만큼 좋은 향기 나는 꽃도 드물고, 수선화나 장미나 백합보다 예쁜 꽃도 흔하진 않다. 그러나 내게 사과꽃은 향기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되어주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뜻도 모를 편지를 쓰던 고등학생에게 사과꽃은 처음으로 현실 너머의 세상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향기와 모양과 이성과 감각을 자극하는 어떤 구체적인 것이었다.
첫사랑에 눈을 뜨던 때였고, 연습장의 낙서가 시가 되고 기도가 되던 날들이었다. 가슴이 푹 꺼지는 슬픔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도 함께 샘솟아서 주체할 수 없는 탄식이 되곤 했다. 이대로 잠들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생기와 열정이 우리 집과 과수원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둑어둑해지는 경계엔 환하게 불이 켜진 채 내게 손짓하는 사과꽃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종종 철조망에 낸 개구멍을 통해 과수원을 혼자 쏘다니곤 했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꽃이 진 자리마다 작은 손톱만 한 사과 열매가 맺혔다. 작은 솜털에 싸인 사과 열매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어린 아기 같다. 사과 알이 굵어져 가는 여름밤엔 실개천 주변으로 개똥벌레가 날아다녔다. 저수지까지 길게 이어진 실개천 위로 형광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고, 뒷마당 평상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엔 은하수가 얼굴 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가을 코스모스가 피고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10월 무렵이면 사과가 빨갛게 익어간다. 과수원 옆으로는 저수지로 흘러가는 작은 실개천이 있었다. 그 실개천 주변에 핀 코스모스며 실개천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서 있으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가 커서 무엇이 될지,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하는 남자아이는 그 무렵 평생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나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곤 했다.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거기에 없었지만, 나는 늘 창문을 바라보았고 거기엔 사과나무가 서 있었다. 나는 고향을 떠나게 될 운명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커서 시인이 되고, 오래 떠돌게 되고, 머나먼 타향에서 살게 되리란 걸 알지 못했다. 마음엔 벌써 깊고 커다란 공허가 자리해 있었고, 감당할 수 없는 흥분과 그리움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삶의 어떤 동력이 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자주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또 다른 길이 과수원 그 너머 어딘가로 끝없이 뻗어 있는 것처럼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 뒷마당을 서성였다.
한약방네 과수원의 사과를 따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몸이 불편한 조부모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다. 한약방 노인은 우리 집 뒷마당에 내가 길을 내어놓은 개구멍을 보수하며, 한약방 노인은 잘 익은 사과 한 광주리를 우리 집에 놓고 가곤 했다. 뒷마당에는 오래된 나무 평상이 있었고, 노인은 내 조부와 함께 거기 앉아서 방금 길어 올린 시원한 우물 물을 마시곤 했다. 내가 몰래 따먹은 사과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인자하고 선한 눈매의 얼굴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웃어주곤 했다.
11월의 하늘은 늘 어둑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저녁, 그 회색의 공기가 나는 좋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첫눈은 과수원 쪽에서 몰려왔다. 첫눈은 텅 빈 사과나무 가지에 새로운 불빛을 달아주었다. 실개천을 흐르는 물은 현저히 줄어들어서 거의 말라 있었고, 그 주변에 핀 억새조차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과수원 옆 그 실개천을 따라 저수지까지 느리게 걸어가곤 했다.
주머니엔 작은 노트와 볼펜이 들어 있었다. 싸늘해진 손등에 눈송이가 내려앉고 노트 가득 채운 글자 위에도 내려앉았다. 하늘 가득 점점이 떠가는 눈송이가 사과꽃처럼 아름다웠다. 가슴에서 올라와 입을 통해 빠져나가는 내 숨결이 눈송이에 섞여 사라져갔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시간을 거슬러 어딘가로 끝없이 날아가는 내가 있었다. 저수지 건너편엔 작은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내가 좋아하던 어떤 여자애의 집도 보였다. 나는 소나무 아래서 그 집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는 어떤 그리움이 서글픔과 함께 호수를 건너오는 불빛처럼 가슴에 번지곤 했다.
사과나무가 가득 서 있는 과수원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기분이 좋다. 고향을 떠나 남쪽 지방으로 이사를 다니면서부터 더는 사과나무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시장에서 사 먹는 사과는 내 고향에서 먹던 그 사과처럼 달고 향긋하지 않았다. 나는 이사를 하면서 늘 사과나무를 키우고 싶었다. 화원에 가서 구석진 곳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과나무를 한 그루 가져오는 날이면 종일 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모든 걸 다 가진 듯 행복해졌다. 물론, 그것은 개량된 꽃사과 종이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그 한 잎의 솜털 /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오규원, 「한 잎의 여자」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 시는 물푸레나무에 관한 시이지만, 나는 이 시를 읽을 때 늘 사과나무를 생각한다. 황량한 겨울 과수원,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사과꽃이 피고 잎이 돋고 열매가 맺히는 걸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은 사과나무 아래에 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청춘의 한 시절을 온통 환상과 낭만으로 사로잡던 사과나무를 나는 그리워한다.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잊고 산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나는 철조망에 틈을 내고 과수원에 서 있던 나를 생각한다. 사과꽃에서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그 한 잎의 맑음, 가슴의 공터와 공허를 가득 채워주던 그 사과나무를 생각한다.
최금진
1970년 충청북도 제천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문학과(박사) 졸업.
2001년 창작과비평제1회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이 있음.
2008년 제1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등. 동국대, 한양대 등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