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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논개 이야기 1
이애미 붉은 꽃타래
박일만(시인)
무제 / 논개
꽃이 높이 피었으니
사람이 함부로 꺾지 못하고
풀섶이 무성하니
개가 다니기 어렵도다
無題(무제)
花高人不折(화고인부절)
草盛狗難行(초성구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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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논개(朱論介 : 1574~1593), 전북 장수 生,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희(朱熹)의 후손으로서 시서(詩書)와 육예(六藝)에 능하였다고 함.
이 시는 논개가 어린 시절 쓴 시라고 전해져온다. 아버지의 글방에서 함께 글을 읽던 학동들의 게으름을 깨우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작품이다. 비록 제목이 없는 짧은 시이기는 하지만 논개의 근면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논개의 조상 세대는 멀리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희(朱熹)에 닿아있다. 할아버지 주용일(朱溶一)* 대(代)에 이르러 장수 주촌 마을에 정착하였다. 할아버지는 서당을 열고 훈장이 되어 지역의 후진 양성에 힘썼다. 논개의 아버지 주달문(朱達文) 역시 부친으로부터 서당을 이어받아 후세대를 육성하면서 생활을 영위하였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문재(文才)는 물론 여러 방면에 있어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터득하였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논개에게서 이와 같은 비범성을 발견하고 틈나는 대로 공부를 시켰다. 천자문(千字文)과 한시들을 모아 엮은 추구(推句), 그리고 사자소학(四子小學) 등을 가르쳤다.
따라서 논개는 자라면서 시(詩)와 글(書) 짓기 등 육예(六藝)에 재능을 보였으며,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고상한 기품을 지니게 되었다. 그녀는 이 무렵부터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학동들은 대부분 논개의 됨됨이에 마음이 끌렸으며, 흠모한 나머지 훈장(논개의 아버지)이 글방을 비우는 사이 짓궂은 장난으로 논개를 놀려주기도 했다.
논개의 사주는 4갑술이다. 갑술년(甲戌年) 갑술월(甲戌月) 갑술일(甲戌日) 갑술시(甲戌時)에 태어났다. 십이간지(十二干支) 상 4갑술의 술(戌)은 개를 의미하는데 이를 기려 곧 <개>를 <놓다>(놓다는 낳다의 방언)라고 하였으며 거꾸로 해석하여 <놓은 개> 즉, <논개>라는 이두문식(吏讀文式)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 이름을 놓고 학동들이 논개를 ‘개야 개야 복슬개야’라는 식의 놀림이 있었던 것이다.
논개는 글을 읽지 않고 놀기만 하는 학동들의 게으름과 지나친 장난을 보다 못해 이를 타이르는 ‘풍자시’를 종이에다 적어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 시를 본 학동들은 논개를 놀리던 일을 반성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다는 일화가 담겨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 논개는 자신을 높은 곳에 핀 한 떨기 꽃으로 비유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이미지화하였으며, 학동들은 무성한 잡초 덤불에 비유하여 논개 자신(狗)이 다니기 어렵다고 꾸짖는다. 학동들의 흐트러져 있는 정신자세에 질책을 가하고 있다. 풍자를 통한 깨우침의 교훈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논개의 할아버지가 주혁(朱爀) 또는 주용일의 형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논개가 기생 출신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문중의 수치로 여겨 후손들에 의해 족보가 다시 제작되는 과정에서 논개의 직근 조상들이 삭제되어 발생한 결과라 추정된다.
*위 시를 여러 문헌상에서는 논개의 작품으로 언급돼 있으나 이는 조선시대에 귀감이 될 만한 한시 중 오언(五言)으로 된 글귀를 추려 모아 아동들에게 가르치던 소학 교재 추구집(推句集)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장사 / 최경회
촉석루 위 우리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노라
긴 강물은 출렁이며 도도히 흘러가노니
그 물결 마르지 않는 한 우리 혼도 사라지지 않으리
三壯士(삼장사)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一盃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류도도)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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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崔慶會 : 1532~1593), 전남 화순 生,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 영암군수, 장수현감, 무장현감, 담양부사,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저서 일휴당실기 등.
이 시는 논개의 남편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경회 장군이 나라와 임금을 향한 충절의 마음을 표하며 읊은 시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제1차 진주성 침공 때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지방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자 군사 10만 명을 투입하여 두 번째로 진주성을 침공하였다.
당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합쳐야 6천명 안팎, 비전투인인 백성을 포함해도 겨우 6~7만 명에 불과했다. 이 군사와 민간인으로 아흐레 동안 대적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누가보아도 이는 중과부적이었다.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마지막 날(1593년 6월 29일),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장군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복수장(復讎將)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모여 국토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협의한 후,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리고(北向四拜) 술을 한 잔씩 따라 들고 이 시 ‘삼장사(三壯士)’를 읊었다. 그리고 나서 차례로 남강 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통한을 품은 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전투에서 패배는 하였으나 나라를 위한 충절의 정신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도도히 흐를 것이며, 따라서 삼장사의 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또한,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과감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적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하는 또 다른 치욕을 겪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린 시이기도 하다.
나라와 임금을 향한 강한 충성심이 담긴 서사시(誓死詩) 또는 절명시(絶命詩)라고 말할 수 있다.
삼장사가 누구냐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장사는 대개 <촉석 삼장사>와 <진주 삼장사>로 나뉘는데, <촉석 삼장사>는 김성일(金誠一), 조종도(趙宗道), 이로(李魯)라는 주장과 그리고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또는 최경회, 김천일, 황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진주 삼장사>는 최경회, 김천일, 황진 또는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라는 주장들이 있다.
그러나 충청 병사 황진은 적의 총탄을 이마에 맞고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날인 1593년 6월 28일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총탄을 겨드랑이에 맞아 중상은 아니었으나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왜적에게 피살되었다는 기록도 있음)
그러므로 최경회와 함께 이 시를 읊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 사람 중에 황진은 없었다. 때문에 최경회가 이 시를 읊을 당시 삼장사(三壯士)란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를 이른다.
이 시의 작자도 촉석루중 삼장사(矗石樓中 三壯士)라는 제목으로 경상도 초유사로 있던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 1538~1593)이 1592년에 지었다는 견해가 기록을 바탕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암에서 / 정 식
형세의 빼어남이 남쪽 고을에서 으뜸인데
의로운 여인의 자취가 이 강가에 남았구나
천년의 슬픈 원한 강물결로 흐느끼고
오랜 세월 아름다운 이름 바위 겉에 남았구나
적막한 외로운 성 구름은 산골에 흩어져 있고
쓸쓸히 지는 낙엽, 달은 가을을 머금었네
바람을 맞고 이렇게 우뚝 서있자니 마음 저려와
어렴풋이 푸른 먼 데 바라보며 나루에서 눈물짓네
義巖(의암)
形勝南州第一區(형승남주제일구) 義娥遺躅此汀洲(의아유촉차정주)
千年哀怨江波咽(천년애원강파인) 萬古芳名石面留(만고방명석면류)
寂寂孤城雲銷峽(적적고성운소협) 蕭蕭墜葉月籠秋(소소추엽월롱추)
臨風最是傷心處(임풍최시상심처) 翠黛依俙泣渡頭(취대의희읍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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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鄭栻 : 1683~1746), 본관은 진주, 조선 숙종(肅宗)~영조(英祖) 시대의 학자, 저서 명암집 등.
이 시의 작자 정식(鄭栻)은 당시의 세태와 타협하지 않고, 언제나 낡은 갓을 쓰고 허름한 복장으로 세상을 떠돌며 일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정식은 논개의 순국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방치하는 조정의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논개의 의거에 대한 포상을 진정하고자 여러 가지 증거자료(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등)를 찾아 모아서 당시 중앙의 집권 세력과 친분이 있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진한(崔鎭漢)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최진한도 수차례 조정에 논개의 포상을 건의하였다.
이와 같은 정식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정문부(鄭文孚)의 차남인 정대륭의 손주뻘 되는 인물로서 명나라와는 친하고 청나라와는 거리를 둔 사람이었다(親明排淸派).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기색이 명나라를 배척하고 청나라로 기울어짐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던 중 남강변의 의암을 찾아 임진왜란 당시에 있었던 논개의 절행에 감개가 무량하여 이 시를 쓰게 된 것이라 한다.
이 시는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애국정신은 천년만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수없이 생멸하는 대자연의 현상도 결코 사람의 정신은 변하게 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면서 논개의 충절 정신이야말로 대대손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읊고 있다.
각 연에 나타난 강물결, 바위, 외로운 성, 나루 등은 하나하나가 논개의 의로운 뜻을 상징하는 정경들로서, 남강변에 남아있는 이와 같은 상징물들을 포착하여 애국의 참뜻을 나타내고자 했다.
남강에 와서 임진왜란 당시를 떠올리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눈물이 나는 것은 아마도 이 시를 쓸 당시 행운유수(行雲流水)하던 작자 자신의 처지를 녹여낸 것이리라 짐작된다.
세파에 휩쓸려 살지라도 흐트러지지 않고 의연한 시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촉석루에서 회고하다 / 정약용
바다 동쪽 오랑캐를 바라본지 그 오랜 세월
붉은 누각은 높고 멀리 산과 언덕을 베었네
옛날의 그 물결 위엔 꽃 같은 가인의 춤이 어리고
단청 동자기둥엔 장사의 노래 길이 남았네
전쟁터의 그 봄바람은 초목을 휘감아 돌고
황량한 성에는 밤비오고 물안개 차오르네
지금도 사당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남아있는 듯
삼경에 촛불 켜고 강신술을 올리네
矗石懷古(촉석회고)
蠻海東膽日月多(만해동담일월다) 朱樓迢滯枕山阿(주루초체침산아)
花潭舊照佳人舞(화담구조가인무) 畵棟長留壯士歌(화동장류장사가)
戰地春風回艸木(전지춘풍회초목) 荒城夜雨漲煙波(황성야우창연파)
只今遺廟英靈在(지금유묘영령재) 銀燭三更酹酒過(은촉삼경뇌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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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 1762~1836), 경기 남양주 生, 조선후기 실학자, 저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여유당전서 등.
이 시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장인(丈人)인 홍화보(洪和輔)의 부탁을 받고 논개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보수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인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쓸 때 지은 작품이다.
다산의 장인인 홍화보는 당시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의 직책을 맡아 진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장인을 만나러 진주에 갔을 때 마침 촉석루와 논개 사당을 새로 보수공사 하였고,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재가 있는 정약용으로 하여금 <의기사기>를 짓게 했던 것이다. 그 때 촉석루에 올라 임진왜란 당시를 떠올리며 이 시도 함께 지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의기사기> 말미에 “自爲詩二十八言 題之矗石樓上”이라는 기록을 남겨 “스스로도 직접 28자의 칠언절구 시(詩)를 지어서 촉석루(矗石樓)에 걸었다”라고 하며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말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회고적 성격을 담은 시 이다.
옛날의 그 남강물은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고 꽃 같은 가인(논개)의 춤도 물결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는 감회를 노래했다.
아울러 단청 동자엔 최경회를 비롯한 삼장사가 최후의 순간에 읊은 시가 남아 있음을 강조하면서 임진왜란의 한맺힌 역사를 되돌아보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의인들의 절의를 위로하며, 전쟁으로 숨진 사람들을 추모하고, 전투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올곧은 마음으로 의연하게 순국을 단행한 논개의 충절을 칭송하고 있다.
오랑캐의 나라(일본)를 바라본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옛날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던 정신은 남강변에 오롯이 남아 있다고 하며, 절명시를 남기고 투신한 장수들의 기상이 물안개로 피어올라 온몸에 와 닿는다고 상상을 한 다산 정약용의 시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촉석루는 진주성과 남강변 일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누각이다. 여기에 올라서면 의암이 발아래 보이고 누구라도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촉석루 현판의 운을 따라 / 허 회
지난 세상 묻고자 하나 강물만 동으로 흐르고
저물어가는 모래톱에 갈매기만 외롭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은 목숨을 던지지만
시절이 평화로울 때 시인은 누각에 의지했네
붉게 떨어지는 바위 꽃은 장한 혈기 머금었고
푸르른 강풀에는 의로운 기생의 수심이 서렸네
태평한 성대에는 책이 묵고 칼이 녹스나니
노래 한 곡 크게 부르며 마음껏 놀아보세
矗石樓次板上韻(촉석루차판상운)
往鹿欲問水東流(왕록욕문수동류) 只見沙鷗立暮洲(지견사구립모주)
世亂忠臣踏死地(세란충신답사지) 時平騷客倚高樓(시평소객의고루)
巖花紅落鍾雷血(암화홍락종뢰혈) 江草靑留義妓愁(강초청류의기수)
聖代居然書劍老(성대거연서검노) 浩歌一曲恣遨遊(호가일곡자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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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회(許 澮 : 1758~1829), 시인, 저서 염호문집등.
조선 후기 시인들 대부분 촉석루를 찾았다. 촉석루는 그만큼 명승지로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는 촉석루는 단순히 누각으로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촉석루를 찾은 시인들은 자연스레 <의암>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고, 거기에 서려있는 논개의 절의와 함께 민족의식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촉석루에 오른 문인들은 대부분 의암을 노래했으리라. 그만큼 의암에서 논개가 행한 순국의 의미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당시의 안정된 사회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하겠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지나 ‘시절이 평화’롭거나 ‘태평한 성대’에 이곳을 찾은 시인이 그 감회를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따라서 노래를 부르고 마음껏 놀아보자는 마음가짐은 시절의 평온함을 의미하고 있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고 평안한 시대에 촉석루를 찾아서 읊은 것이리라.
백척간두, 나라의 위기 앞에서도 의연하게 절의를 단행한 여인(논개)의 충절 정신을 유심히 생각하고 전쟁 당시를 떠올리며, 지금의 태평성대는 논개가 죽음으로 치른 희생한 대가임을 칭송하고 있다.
아울러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을 빗대어 우리 민족역사의 무궁한 미래를 말하기도 한다.
한 떨기 바위 꽃은 국운의 존폐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초개와 같이 몸을 던진 논개를 상징한다. 푸른색은 지조요 붉은 색은 열정이라고 여긴다면 촉석루와 남강을 밝힌 것은 논개의 붉은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시인 자신이 비록 “세상이 어지러울 때 목숨을 던진 충신은 아니지만” 태평성대에는 전쟁이 없고, 따라서 무기가 녹슬고 책에 먼지가 쌓이고 하니 누각에 의지하여 노래 부르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놀아보자는 의지를 나타낸 시이다.
<다음호에 계속>
박일만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2005년 현대시 신인상 등단.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등.
송수권 시문학상, 나혜석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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