還國과 三天完備 귀국길을 안동까지는 마차편으로 와서 압록강철교는 도보(徒步)로 건너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기로 하셨다. 국경인 철교 위에는 양쪽에서 검문하는 군인들의 경계가 삼엄했는데 이상하게 정산일행은 그들이 보지 못하므로 그저 통과하였다. 철교를 건너면서 정산께서 혼자말을 하시는데 그것이 한국어도 중국어도 아닌 것이어서 매씨가 이상히 여기며 여쭈었다. “오라버님, 지금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응, 서양 신명들이 내게 무엇을 물어오는데 이야기하자니 그리 되었느리라”하셨다. 압록강을 건너신 후에 강변의 어선에서 5색이 영롱(玲瓏)한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사셔서 강물에 놓아보내셨다. 이때 그 고기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올라 네 번 절을 하듯 몸을 번득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매씨가,“오라버님은 어찌하여 비싼 값으로 고기를 사서 물에 놓아보내시나이까?”하니,“고기나 사람이나 살려고 함은 본능(本能)이 아니냐. 더구나 이제 그 고기는 용왕(龍王)의 명으로 나의 귀국(歸國)을 영접하러 왔다가 나와 상봉(相逢)함이니라”하셨다. 신의주에서 철도편으로 서울에 오셔서 며칠을 유하시며 관광하는 동안 그곳 백성들의 신고하는 정황을 살피시고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셨다. 다시 철도로 밀양 외가를 찾으시니 외척들이 모두 환대하였고 이튿날 칠원 회문리 고향에 가니 일가 친척 역시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러나 정산께서는 이러한 사정에만 시간을 보낼 수 없고 구천상제께서 명하신 본소(本所)를 찾기 위하여 다시 매씨를 거느리고 호서·호남방향으로 출발하셨다. 5·6월 염천의 혹서를 무릅쓰고 걸음을 재촉하여 몇달 몇날에 걸쳐 지친 몸을 이끌고 정읍의 손바래기, 모악산의 금산사, 대원사와 동곡(銅谷)등 증산상제의 성지와 유적지를 답사하고 김형렬, 박공우, 이치복, 김광찬 등 성도(聖徒)들을 찾아 본소를 탐색하기에 노심하셨다. 그해 9월 어느 날 함열(咸悅)지방을 지나시다가 피로한 몸으로 정자나무 아래 쉬실 때 구천상제의 계시가, “본소는 다음에 찾고 우선 이곳 서해의 제일도에 공부처를 정하고 때를 기다리라”하시므로 태안의 안면도(安眠島)를 찾아드셨다. 이곳에서 첫 포덕으로 입도한 이정률(李正律)의 주선으로 정당리 어락골의 공부처를 매입하여 우일재(宇一齋)로 명명하신 다음 이해 겨울에 만주의 도장이하 모든 가족이 합솔하여 함께 입도치성을 올렸다. 그 다음해 봄까지 입도자가 30여명이 되었는데 정산께서는 그들을 우일재에서 기도주·태을주를 연송(連誦)하며 공부하게 하셨다. 그 공부 7일째 되던 날 진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도인 박봉운(朴奉云)이 공부중에 갑자기 큰소리로, “나는 뵈었다. 옥황상제님을 뵈었다”하고 일어나서 춤을 추며 크게 웃기도 하였다.
다른 도인들이 당황하여 말려도 안되는데 옆방에 공부하시던 정산께서 “봉운아”하고 부르시니 갑자기 멈추며 그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옥황상제님께 절을 올립니다”하며 4배(四拜)를 올렸다. 봉운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모두에게, “내가 천상의 옥황상제를 뵈었는데 바로 이 어른이 그 어른이시니 함께 다시 4배를 올립시다”하므로 일동이 신기하게 여기며 4배를 올렸다. 봉운이 그 후에도 몇번 그러하므로,
“오직 천기라......이는 허령이니 이를 거두노라”하셔서 중지 시키셨다. 무오(戊午=1918)년 8월에 정산께서는 증산상제의 본소(本所)를 찾기 위해 다시 전라도로 가셔서 상제의 옛 성도들을 찾아 수소문하기로 결심하시고 먼저 원평(阮坪)의 김자현(金自賢)을 방문하셨다. 그러나 그는 손을 나발 모양으로 오므려 자기 입에서 정산의 귀에 연결하고, “증산선생께서 이렇게 하시며 ‘도통(道通)은 자네에게만 주겠네’하셨다”고 하면서 자랑했지만 본소를 찾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산께서는 다시 안면도로 돌아와서 공부를 끝마치시고 10월에 전라도 정읍군 감곡면 황새마을로 오셔서 새로운 공부처를 마련하시고 가족들도 합솔하여 포덕에 힘쓰신 결과 수십명이 입도하게 되었다. 이처럼 도인이 늘어나고 공부를 계속하시면서도 항상 증산상제의 본소를 찾지 못한 일만이 마음의 숙제가 되어 있으셨다. 기미(己未=1919)년 정월 보름날 명절 치성으로 철야하고 공부하시던 중 드디어 구천상제의 본소에 대한 계시가 내렸다. “때가 이르렀으니 이제 본소가 그대 목전(目前)에 다가왔도다......”고 하신 것이다. 정산은 이날 눈이 많이 내리는 가운데 자신을 찾아오는 박씨라는 여인을 천안(天眼)으로 미리 볼 수 있으셨다.
그는 정산께, “증산상제의 매씨 선돌부인께서 ‘후천진인(後天眞人) 을미생(乙未生)에게 도통(道統)을 전하라’하신 상제의 명령에 따라 10년간 본소를 지키다가.....오늘 아침 천계(天啓)를 받들고 ‘만주봉천서 오신 대인을 모셔 오라’고 하셨나이다”하므로 따라가서 증산상제의 유족(遺族)을 비로소 만나시게 된다.
선돌부인께서는 이때 39세셨는데 일찍이 20세 전에 고부 입석리 박창국에게 출가하셨으나 10년이 넘도록 소생이 없자 남편이 소실을 두고 소박(疏薄)하므로 증산상제께서 이곳 마동에 집을 사 주셔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화천(化天)하시던 해 정월 보름에는 이 집을 몸소 수리하셔서 도배까지 해 주시고, “이곳이 나의 본소(本所)니라”하시며 위와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때 천서를 비장(秘藏)하신 것으로 추측됨).
부인께서 이 본소에 사시는 동안 5년 전에는 황해철이란 수도인이 찾아와서 공부하다 돌아가고 4년 전에는 박모란 수도인이 그 제자 송규를 데려와서 부탁하므로 3년간 공부시켰으나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증산상제의 지엄한 계시에 따라 강제로 내 보낸 일이 있으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제께서 직접 계시로써 정산의 얼굴까지 보여 주셨으므로 의심의 여지는 없었지만 상제의 유품은 황·송에게 내주고 회수할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산을 맞은 권씨 대모(大母 : 강증산상제의 모친)께서는, “내 아들과 같은 진인을 대하니 여한이 없다”하며 감읍하셨으나 선돌부인께서는, “이제야 진인을 만나 소임(所任)을 다하게 되었다”하고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히 여기셨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람의 의표(意表)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역사적 사실이 전개된다. 정산께서는 이때 문득 ‘진시황의 분시서(焚詩書) 갱유생(坑儒生)에도 칠서(漆書)가 공자의 집 벽속에 비전(傳)된 칠서벽경(漆書壁經 : 공자가 그 당시 대쪽으로 된 경서를 옻칠해서 자기집 벽속에 감추었는데 200여년 후에 그 집을 새로 지을 때 벽속에서 썩지 않고 나옴으로써 유교가 후세에 전해진 것에서 유래된 말)의 고사(故事)’가 상기되시어 마음 속으로 ‘증산상제께서 이 본소를 내게 점지하여 주셨으니 도통(道統)의 증표도 내려 주실 것이다’ 생각하시고 선돌부인에게, “구천상제의 진품증표는 절로 진주인 나에게 전수될 것을 확신하오니 심려하지 마시오”하시자 앉은 자리의 바로 뒷벽 천정 아래의 한 곳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셨다. 그곳의 도배를 뜯고 벽을 파시니 그 안에 나무상자가 있었으며 그 상자를 여시는 순간 전광(電光)이 뻗치며 집과 벽이 진동하는데 상자속에 천장비서(天臧秘書) 곧 천서인 현무경(玄武經)과 주문서(呪文書)가 들어 있었다. 정산께서는 천서를 향하여 4배를 올리고 심고(心告)하신 다음 정중히 내려서 유족들에게 확인시키셨다.
대모께서는, “이 방안에 살면서도 이 천서가 있는 줄 몰랐는데 그대가 이렇게 찾아내어 물려받게 되니 참으로 그 상제에 그 진주(眞主)로다”하시고 선돌부인께서는, “이로써 나의 소임 또한 다함이라”하시며 모두 감격해 마지 않았다. 현무경은 4방 9촌의 한지에 증산상제께서 손수 쓰신 것으로서 13장 26면에 문자와 부도(符圖), 주문서는 7장 13면에 11종의 주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정산께서는 이 천서를 받들고 본소에서 백일공부로 그 진리를 체득하셨으며 이때부터 증산상제의 유족을 봉양하셨다. 이해 3월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정산께서는 이에 관하여, “이 운동은 구천상제께서 미리 짜놓으신 도수에 의한 일이다”하시며 부친 형제분과 전 도인에게 적극 참여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로써 주저하고 있던 도인들까지 전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본소와 천서에 관한 소문이 두루 퍼지니 입도인이 날로 늘고 황새마을 공부처는 문전성시(門前盛市)를 이루어 협소하므로 이해 5월 초순부터 그 이웃 청도리 구성산 학선암에서 백일공부를 하시고 윤 7월에는 공부처를 다시 같은 면 통사동(通士洞) 이씨 재실 영모재(永慕齋)로 옮기셨다. 9월 18일 정산께서는 통사동 공부처에서 구천상제 강세치성(降世致誠)에 앞서 증산상제의 유족과 상의하신 다음 가족과 도인들에게, “3천(三天) 가운데 2천은 이미 받들었으나 남은 천보(天寶)도 받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천보는 둔궤(遁櫃)였다. 둔궤는 원래 증산상제께서 화천 전년(1908) 여름에 동곡 약방을 차릴 때 약장과 함께 만드시고, “이 궤속에 번개가 들어야 한다”, 또 “이는 나의 도지(道旨)와 도통(道統)을 숨겼으므로 숨길 둔자 둔궤니라”하시며 약방에 비치하시고 많은 도수공사를 보신 신성한 유물로서 화천하신 후에 김수부(金首婦 : 김형렬의 따님)가 간직하더니 고수부(차경석의 이종 누님)가 교단을 차릴 때 가져갔는데 고수부가 교단을 떠난 후 이때까지 보천교에서 간수하고 있었다.
정산께서는 이날밤 천하장사 김계철, 최승오와 도인 권태로 등 8인을 거느리시고 보천교 도장에 가셔서 마침 이때 치성에 모였던 수백명 교도에게, “천명을 받들어 천보를 모셔가니 순순히 응하라”고 외치셔서 알리게 하신 다음 그 본당에 안치된 둔궤를 모셔오셨다. 그리고 통사동 공부처에서 둔궤를 모시고 공부하시다가 다시 경남 함안 대산면 용화산의 반구정(伴鷗亭 : 그 13대조의 재실)에 옮겨 모시고 백일공부를 하셨다. 그런데 이 둔궤의 자물통은 증산상제께서 채워놓으신 그대로였으나 공부를 마치시던 날 열쇠 장인(匠人)을 시켜 새로 열쇠를 만들어 여셔도 안되다가 정산께서 직접 주(籌)대(공부하실 때 쓰시는 산(算)가지)를 자물쇠에 끼우시는 순간 뇌성벽력이 나며 방안이 갑자기 어두었다 밝아지며 스스로 열리는 이적(異蹟)이 일어나니 이날이 경신년 2월 17일(양력 4월 초5일) 청명절이었다. 정산께서 둔궤 내부를 살피신 다음,
“과시(果是) 천보로다. 수운(水雲)의 거년(去年) 경신(庚申) 4월 초 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 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이며 태극도수가 분명하도다”하셨다. 둔궤 안에는 양피(羊皮)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들어있고 내부의 정면과 좌우면에 ‘오강록(烏江錄), 설문(舌門), 반구제수(半口齊水), 천문지리(天文地理), 풍운조화(風雲造化), 팔문둔갑(八門遁甲), 지혜용력(智慧勇力)’ 등의 비서(秘書)가 불지짐으로 새겨져 <火刻> 있었으며 주사(朱砂)로 24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정산께서는 이로부터 반구정 아래 강가 백사장에 단(壇)을 모으고 그 위에서 밤마다 장·중·단검 세자루(밀양 운문산 천황봉 아래에 철공소를 차리고 성기춘 등 기술자를 시켜서 풀무불에 만국지도를 매일 1장씩 50장을 소화하시며 만드신 칼)로 100일간 검무(劍舞) 도수로 공부하셨다. 이때 정산께서 낮에는 반구정 공부실에서 수도하시고 밤에는 단 위에 등불을 밝히고 검무도수로 공부하시는데 그때마다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이 구름 같은 안개가 일어 시종들은 공부하시는 내용을 볼 수 없었고 다만 안개 속에서 간간이 칼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공부 후에 통사동으로 돌아오실 때 칼은 가져오시고 둔궤는 반구정에 두고 오셨는데 수종(隋從)하던 조주일(曺周一)이 몰래 가지고 진주지방으로 도망가서 사술(詐術)을 부리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상우가 정산께 찾고자 함을 아뢰니, “둔궤는 이미 도수에 쓰였으니 이제는 한낱 궤짝에 불과하고 둔자는 도망 둔(遁)자이므로 도망자의 물건이 됨은 필연이라. 후일에도 이런 배신 난법자가 있으리라”하시며 찾지 말도록 하셨다. 정산께서는 검무도수 공부를 이해 11월 초부터 100일간 안면도 쇠섬에서 단도수와 아울러 공부하시니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바람막이 하나 없는 섬에서 동상으로 수족이 붓고 손마디가 터져 피가 나는데도 계속하셨다. 이 단도수와 검무도수 공부는 다음해 2월 다시 부안 변산반도 우금바위 아래로 옮겨서 100일간 계속하셨는데 일본 순사가 취체하러 나왔다가 눈 앞에 있는 단과 단상의 기를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 일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