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임씨(晉州任氏) 헌납공(獻納公) 임형(任衡)
헌납(獻納)은 고려 후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정5품 관직이며 현재의 군수와 같은 서기관 직급과 같다.
헌납(獻納)은 사간원의 간관(諫官)으로서 왕에게 간쟁,
봉박(封駁)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실제 임무는
이에 제한되지 않았고 사간원의 다른 관료,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의 관료와 함께 간쟁, 탄핵, 시정(時政),
인사 등에 대한 언론과 경연(經筵), 서연(書筵)에도
참여하였다. 이 외에 인사 문제와 법률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가졌고, 국문(鞫問), 결송(決訟)
등에도 참여하였다. 왕과 자주 접촉하는 직무 성격 때문에
직급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관급(官級)이다.
임형(任衡)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부지런하고 몸을 닦으며
충효입지하여 정포은(鄭圃隱-정몽주)文忠公과 사천백(沙川伯) 남병재(南丙齋),
翼成公(방촌 황희)과 더불어 친교를 지내고
홍무을사 (洪武乙巳)에 翼成公(황희)과 같이 급재하여
문하성이조정랑(門下省吏曹正郞) 헌납(獻納)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고 얼마 후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이라며
벼슬을 그만 두고 몸을 全州로 숨겼다.
원래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라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
太祖 登極후에 上(임금)이 여러차례 불으시고
폐백을 보내와 진주 수양산에 은거하였다.
翼成公(尨村 黃喜)이 말하기를 어디를 섬기면 임금이 아니며
어디를 부리면 백성이 아니리요 하자 헌납공(獻納公)이 대답하기를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하시자
翼成公이 말하길 주나라 무왕은 열 번 다스리되
의가정란에 해됨이 없다 하였다.
헌납공(獻納公)이 백이숙재(伯夷淑齋)는 어찌하였는가 반문하니
익성공이 어쩔 수 없이 물러 가시며 글을 지어
임금이 부르지 못한 신하가 있으니 백이숙재(伯夷淑齋)
후에 또 한 사람이라 하였다.
晉州任氏28世孫和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