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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폴리오와 역발상 투자, 유대인의 자산 3분법
출처 : 오지훈 한.. | https://blog.naver.com/ojhclinic/221121184006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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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국의 시기에 유태인을 생각한다. -유태인과 유럽 세 나라(스페인•네덜란드•영국)의 흥망성쇠, 그리고 미국의 발전- 순 서 ▶서론:왜 유태인인가? ▶제1막:1492년 신대륙개척 시대, 유태인 추방 ▲유태인의 재산 삼분법 ▶제2막:1588년 영국 등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제3막:1642,1689년 청교도, 명예혁명 시대 ▶제4막:1760년대 산업혁명과 유대인의 역할 ▶제5막:1815년 워터루 전쟁과 유태인 재벌 ▶제6막:1917-1945년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 ▲유태인의 특이한 교육과 노벨상 수상 ▶서론: 금년(2016년)은 국내외로 격동의 시기! 왜 유태인인가? 금년 6월에는 영국이 유럽연합(EU)의 탈퇴를 결정(국민투표 51.9% 찬성)해서 Brexit(Britain과 Exit의 합성어)라는 표현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지난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예상 밖으로 Trump라는 인물이 당선되어 Trexit(Trump와 Exit의 합성어로 충격을 주었다는 의미)라는 말이 생겼다. 우리나라도 의외의 사태로 박근혜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결의까지 되었으니 이제 'Korea 또는 Park Exit'라는 말이 생길지 모르겠다. 이런 영국과 미국을 당시 세계 1등 국가를 만들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며, 금년과 같은 어떤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놀라거나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며 오히려 전화위복의 인내와 지혜를 발휘하는 민족이 유태인이다. 유태민족은 5천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 독특한 선민(選民)의식을 가지고 부침을 거듭하였으며, 기원전 63년 그 유명한 마사다 동산에서 로마에 멸망한 뒤 2000년이 넘는 세월을 나라 없이 유랑생활을 해 왔다. 그러나 자신들의 민족의 긍지, 역사 등 주체의식(Identity)을 굳건히 지켜오는 것으로 유명하며 1948년 드디어 이스라엘 국가를 건국하고 해외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각 분야에서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스라엘 주위에 아랍(이슬람 국가) 7-8억을 상대로 한줌의 이스라엘 인구(건국 당시 500만,현재 800만)가 몇 차례의 중동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 남은 것이 100대 1이다. 이스라엘,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유태인이(1500만 추산) 전 세계 인구(75억 전후)의 0.2%인데 노벨상을 받는 인원은 20%가 넘는다니 이 또한 1당 100인 것이다. 그 동안 인류가 긴 중세의 터널을 벗어나 르네상스, 신대륙 발견 등 새로운 신천지를 개척하던 1500년 경 부터 유태인들이 탁월한 경제활동 능력으로 유럽의 나라들 특히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요약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유럽의 국력과 경제발전이 미국으로 옮겨지는 2000년대 까지의 근•현세에 이르는 500여년의 기간이기에 큰 역사적 사실(연극의 1, 2막으로 표기)을 총론(總論)적으로 살펴보고 각론(各論)은 지면 관계상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하고 또 저자의 능력에 넘치기도 한다. 혹시 다른 기회가 있으면 특정부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1막: 1492년 콜럼버스-신대륙 발견,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 유태인 추방. 1492년은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이사벨라여왕의 지원을 받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역사적인 해이다. 이해, 신대륙을 향해 출발 준비를 마친 콜럼버스의 3척의 배가 스페인 세비야 항을 떠날 때, 그 옆에는 스페인에서 추방되는 유태인들의 마지막 배들도 떠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사벨라 여왕이 700여 년 동안 그라나다지방(아람브라 궁전이 그 본산)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왕국을 몰아내고 리베리아 반도를 통일한 시기로서, 수 백 년 동안 종교•경제 활동에서 이들과 평화공존하고 있던 유태인들에게도 추방령을 내렸던 것이다. 당시 스페인 인구(700만 명 추산)의 7%정도를 점하고 있던 유태인들 중에서 개종(改宗)하고 현지화한 사람을 제외한 30만 내외의 유태인들에게 재산 몰수와 함께 4개월 내에 스페인을 떠나도록 한 것이다. 유태인이 떠난 스페인은 아메리카 신대륙, 그리고 필리핀, 아프리카 지역 등 많은 식민지를 거느려 겉으로는 해가 질 날이 없는 세계 최강의 나라(1600년대 중반까지)였지만, 무역 및 자산관리 등 경제 활동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태인들이 떠난 자리를 메우지 못해 결국 국가부채가 누적되고 여기에 유럽의 정세 변화 등으로 150여년 후에는 2등 국가로 뒤처지고 말았다. ▲에필로그: 유태인의 재산 3분법 기원전, 까마득한 옛날부터 나라 없이 유랑생활을 했던 유태인들이 나름대로 오랜 세월 자리 잡았던 스페인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대대로 살던 좋은 집, 전답(부동산) 등을 금반지 몇 개, 또는 당나귀 몇 마리로 처분하고, 가사 도구와 귀금속 정도만 겨우 챙겨 정처 없이 떠날 때, 이들은 재산의 3분법(Portfolio)을 뼈저리게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개념으로 재산을 대략 3등분하여 3분의 1은 부동산, 3분의 1은 현금과 귀금속,나머지 3분의 1은 주식 등 유가증권으로 보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현금은 국제적으로 유통될 수 없었고 유가증권 등은 더 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국가가 없어서 부동산의 자산가치가 보장이 되지 못하는 유태인들에게는 가치가 유지되고 수중에 휴대하기 용이한 화폐, 유가증권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으며, 결국 이들이 다른 나라에 정착하면서 이런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제2막: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네덜란드에 대패,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경제 강국이 되고, 유태인들 주식회사, 은행 설립.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여러 지역의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한 스페인은 그야말로 로마제국 이후의 최초로 광대한 제국을 거느려 당시의 확실한 G1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을 추방한 후 무역•국고관리 등 총체적인 국가경영 능력의 불비로 그 기세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이때 세계 역사의 물고를 튼 사건은 스페인의 해상권, 식민지 개척 등에 맞서서 영국(당시 엘리자베스 1세)과 네덜란드가 연합하여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칼레해전에서 격파(1588년)한 것이다. 스페인 제국 붕괴의 시작이었던 이 해전에서 유태인 기술자들이 영국연합군에 새로운 대포의 제작에 참여하여 이 예상치 않은 승리에 일조하였다고 한다. 또한 유태인들이 옮겨가서 자리 잡은 종교 자유지역(1517년 종교 개혁 전후)인 안트워프, 나중에는 암스테르담 등의 네덜란드 도시들은 무역과 금융 분야에서 크게 발전하여 당시 파리, 베네치아 같은 국제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숨겨 가지고 나온 다이아몬드 등 보석류의 무역을 하였으며, 이에 못지않은 사치 품목인 커피, 차, 설탕, 그리고 소금 등의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출범(1608년)시켰으며, 유태인들은 1609년에 드디어 은행을 설립하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영국에 앞서 세계 1등 해상무역국가로 자부하는 네덜란드의 유태인들은 중국•일본•아프리카까지 무역을 하는 선박들을 수 백 척 건설하고 무역업을 운영하기 위해 자본을 모집하고 위험을 분산하는 현재의 주식회사와 유사한 제도를 창안하였다. 이에 따라 유태인들은 주식거래(증권거래소설립)를 선도하고,은행을 통하여 어음•예금•화폐를 활용함으로써 재산 3분법에서 현금과 유가증권이라는 재산의 두 축을 마련한 것이다. ▶제3막: 영국1642, 1689년 청교도, 명예혁명 이후 유태인 이주, 금융업의 번성 영국의 헨리 8세(재위 1509-1547)는 이혼을 합법화하는 등으로 천주교로부터 독립하여 영국 성공회를 창립하였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재위1556-1603년) 여왕이 무적함대를 격퇴하는 등 영국의 중흥을 이루었지만, 그 후계 왕들과 의회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결국 의회군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승리(1642, 청교도혁명)하였는데, 이 승리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유대인들에게 영국 거주(종교 자유)를 허용하여 유태인들은 영국의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후 윌리엄, 메리부부가 영국 왕정을 탈환(1689. 명예혁명)할 때도 역시 이들을 지원한 유태인들은 네덜란드에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이제 대내외 여건이 영국이 주도하는 유럽으로 재편되었으며, 초기에는 네덜란드와 협조 분위기를 이끌어 갔으나 네덜란드가 164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무역업도 크게 발전하여 새로운 G1국가를 넘보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하여 1720년대부터는 영국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외에도 유태인의 영국 이주 배경에는 유럽 대륙에는 이미 1516년 베네치아에 게토(Getto)라는 유태인을 격리•수용하는 거주지가 만들어져 나라마다 확산되는 움직임이 있었던 반면, 영국에는 유태인에게 배타적인 카톨릭교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성공회가 번성하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자리 잡은 유태인들이 중심이 되어 영란은행을 설립하고 금융업을 꽃 피웠으며 경제특구로서 ‘런던 씨티’를 설정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지하고 있다. ▶제4막: 1750년대, 영국의 산업혁명을 주도한 유태인들. 영국은 세계 제1의 무역대국이 되다. 1660년대 이후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유태인들은 면직물 산업을 발전시켰다. 네덜란드에서 북해산 청어가공에서 유래된 유대인의 분업경영능력이 빛을 발하여 자본가는 공장을 세우고 각자의 능력에 맞게 일을 맡기는 분업으로 이전에 혼자서 하던 작업량보다 훨씬 많은 생산량을 아주 빠른 시간에 만들게 되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어떤 유대인 목수가 면화에서 실을 뽑는 방적기(제니 방적기)를 발명했고, 이발사인 가발 제조자가 이를 개량하여 수력방적기를 발명하였다. 이로써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는 물(동력)이 있는 계곡에 수많은 공장들이 지어졌다. 경제학자들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되고 성공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 째는 유태인들이 기존 수공업자조합을 붕괴시켜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개혁한 것이고, 두 번 째는 네덜란드에서 형성된 유태인 자본이 영국으로 건너와서 기술과 자본이 적기에 활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 번 째는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여 인도•호주 등 광대한 식민지에서 원료 공급, 생산량의 판매가 원활하게 이루어 진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해가 지지 않는 대영국 연방을 이루면서 빅토리아여왕(1819. 재위 1837-1901)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영국의 시대는 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이 세계 1등 국가로 등장하기까지 최소 22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제5막 : 1815년 워털루 전쟁, 유럽최대의 금융재벌 로스차일드(유태인) 그룹 탄생과 국제금융거래의 중심이 된 영국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국제무역이 활성화되면서 국내적으로 대자본의 수요가 커졌으며, 국제적인 자금결제 필요성이 대두 될 때에 유태인의 국제금융그룹이 등장하였다. 유태인 로스차일드 그룹은 마이어 로스차일드(1744-1812)로부터 시작되어, 그 다섯 아들들을 유럽의 주요 도시 프랑크푸르트(독일 본부), 빈(오스트리아), 나폴리(이탈리아), 파리(프랑스), 런던(영국)에 파견하여 여러 나라와 연계된 최대의 금융•산업재벌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금융업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던 메디치가(家) 이상으로 영국, 아니 19세기 유럽경제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현재 미국의 월가까지 그 뿌리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가족 중심으로 신용이 확고하고 정보가 정확한 것을 장점으로 하여 기동력을 빠르게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폴레옹이 귀환하여 온 유럽을 상대로 한 세계사의 중요한 전쟁, 워털루 전쟁(1815년)의 승패가 어음•주식 거래에 중요한 전제가 되었을 때, 영국을 맡고 있던 아들 네이션이 사전 정보와 기동력을 활용하여 20배 이상의 이익을 얻어 영국 증권시장의 60% 이상을 지배하게 된 일이다. 또 하나 대서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스웨즈 운하가 1869년 개통되었는데, 이를 완공하고 지배하던 프랑스의 카이로 총독과 영국이 1875년 운하의 권리를 넘겨주는 비밀스런 거래로 400만 파운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영국도 이런 거금의 현금 동원 력은 없었는데 당시 수상인 디스렐리가 친구였던 로스차일드의 책임자에게 차입을 부탁하였다고 한다.‘그 담보가 뭐냐’는 로스차일드의 측의 질문에 수상은 ‘대영제국이다’하자 군말 없이 돈을 빌려줬다는 통 큰 거래의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스웨즈 운하가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또한 영국이 1956년(에집트, 낫셀의 국유화)까지 독점적 지위를 누린 것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로스차일드의 자금은 1850년대 당시 60억불에 이르렀다는데, 이는 160년 후 현재의 가치로는 60조 달러로 추산하는데 빌 게이츠의 재산의 120배에 달했다고 한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당시 세계 G1 국가, 영국을 국제금융의 중심국으로 만들고 유럽 경제, 나중에는 미국의 금융시장의 큰 자금줄이 되었다고 한다.
▶제6막: 1917년, 1945년 세계1•2차 대전 이후 유태인들의 미국(이주) 러쉬, 세계 1등 국가를 만들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미국이 안전한 세계 1등 국가로 부상하면서 유럽의 유태인들은 차츰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히틀러에 의한 유태인 대량학살은 유태인의 민족사에 가장 처참하고 대량의 인명손실을 겪으며 미국으로의 급속한 이주 러쉬를 이루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대륙의 로스차일드 그룹도 자산 동결, 압수의 수난을 받았으나 특유의 생명력으로 살아남았고, 이를 계기로 로스차일드 유대인들의 비밀유지의 전통이 굳어져 지금도 로스차일드의 자산이 어떻게 투자•운영되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금유재벌의 창시자인 J. P 모건(1837-1913)도 유태인 혈통으로 그의 막강한 자금도 로스차일드 자본과 연계되어 있으며 현재까지도 모건그룹이 금융계의 가장 큰 손이다. 한편, 유태인 그룹은 금융전문가의 사관학교 역할을 해왔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시절 11년 동안 재무장관을 역임한 모건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루빈 재무장관 등 많은 각료들이 골드만삭스 출신의 유태인들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까지 4천여 년 전 부터 국가(영토)없이 전 세계에 떠 돌던 유태인(1500만 추산)은 현재에도 본국에 약 800만, 미국에 600여만(뉴욕 및 인근 220만) 기타 영국 등에 150여만이 있다고 한다. 금융산업계 뿐만 아니라 언론•예술•문화계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유태인들이 활약하고 있는데, 유태인(미국 인구의 3%)이 미국의 부호 중 30%이상, 하버드, 스탠포드 등 명문(아이비 리그) 대학교수의 20%를 점하고 있다. 최근 노벨상 수상자들을 분석한 자료가 특이하여 소개한다. ▲에필로그: 유태인의 교육과 노벨상 수상자들 -미국 국적의 수상자가 전체의 40% 이상, 유태인 수상자가 20% 이상 흔히 알려져 있는 일화로 학교를 다녀온 자녀에게 세나라의 엄마들이 이렇게 질문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나라마다의 교육의 특징이 들어난다. 우리 엄마들은 ‘오늘 학교에서 몇점 받았니, 또는 누구는 몇점인데’ 이고, 일본 엄마들은 ‘오늘 누구에게 폐를 끼친 것 없니,또는 언동 중에 실수 없었니’ 이며,유대인 엄마들은 ‘오늘 무슨 질문했니, 또는 무슨 토론을 했으며 무슨 발언을 했지’라고 한다. 우리가 학원에서 점수 위주, 일류학교 입학경쟁으로 암기식의 교육을 할때 유태인들은 가정(최소 일주일에 한번, 안식일)에서 인성, 역사교육을,학교에서는 창조 마인드 개발 ,개인별 특성개발을 한다고 한다. 그들은 자녀들이 13-15세 성년식에 그들 민족의 역사라 할 모세 5경(창세기 출애급기 등)을 관계 어른들이 참석, 테스트 하는 등,역사 교과서 신정화( 神政化) 까지 하는데 우리 나라는 숙원사업인 국정화(國定化)도 못하고 있다. 그 외에도 그들이 세 살부터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토론한다는 탈무드는 모든 학습, 정신교육 그리고 사회윤리에 토대가 되어, 우리나라의 현재의 같은 상황 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국민 모두의 공감대가 도출 되어, 우리 국민들 일부처럼 감성적으로 부화뇌동 않는다니,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금년으로 115회를 맞이한 노벨상 수상자들을 국적별(2015년 까지)로 보면, 미국(357명), 영국(118명), 독일(102명), 프랑스(67명) 등 경제력 G7 국가들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유럽 이외에 일본(24명), 중국(12명) 등 아시아 국가들의 수상자들은 현재까지는 프랑스에도 못 미치고 있다. 국적과 대학, 현재 직책 등으로 발표하는 노벨상 수상자들 중 특이하게 단일 민족 유태인으로 파악하면, 현재까지 전체 수상자 890여 명 중 180명 이상으로 20%이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유태인들의 특이한 교육이 이렇게 노벨상 수상에서 꽃 피운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신문이 노벨상의 최고봉이라 할 과학 3개 분야의 수상자 588명을 출신대학 및 현재 근무 대학(연구소 병원 등)을 조사했는데, 노벨상 초창기(1901-1925)까지는 유럽이 93%를 차지하다가 1950년을 지나며 역전 당하여 최근(2001년 이후)에는 28%로 떨어졌고, 북미(캐나다 포함)는 52%로 격증,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이 12%로 부상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다. 전통적인 명문 영국의 캠브리지 등에서 노벨상을 수상하던 교수•과학자 중에 유태인들(전체 노벨 과학상은 30%이상을 점하는 것으로 추정)이 대거 미국의 하버드 등 명문대학에서 옮겨서 노벨상을 수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태인은 여러 가지로 정말 대단한 민족이다. [출처] 이 난국의 시기에 유태인을 생각한다.|작성자 나그네 |
***[권의종 칼럼] 1492년은 세계사적 의미가 각별하다. 그해 스페인에서 3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다. 먼저 이사벨 여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축출, 스페인 통일을 완성했다.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 전쟁 시절에도 버텨냈던 최후의 거점 그라나다까지 내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났다.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 12세가 저항을 포기하며 지브롤터 해협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 위업도 그 해 일어난 일이다. 오늘날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의 탄생이 그 해 신대륙 발견에서 비롯된 점에서 시대적 의미가 작지 않다. 현대적 세계 질서의 씨앗이 그 때 파종된 셈이다. 이를 기점으로 서구(西歐)는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했고, 역사의 페이지는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의 서막을 열 수 있었다.
그 해 중요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유대인 추방령이다.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 알람브라 성에서 교서를 발표했다. 일명 ‘알람브라 칙령’이다. 유대인은 ‘가톨릭 개종’과 ‘국외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유대인 17만 명이 스페인을 떠났다.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수습하고 신앙심 깊은 왕실로 권위를 회복하려는 종교적 단일화 의도가 표면적 이유였다.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었다.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해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메우려는 속셈이었다. 콜럼버스 신항로 탐사에 소요될 왕실자금을 마련하려는 의도도 한몫했다. 유대인은 4개월 안에 재산처분을 허용 받았으나, 화폐나 금, 은은 갖고 나갈 수 없었다. 적발되면 처형이었다. 유대인은 재산을 서둘러 헐값에 팔아치웠다. 살던 집을 내주고 당나귀를 구했고, 포도원을 몇 필의 포목과 맞바꿔야 했다.
늘 꿈꾸는 한국인과 절대 꿈꾸지 않는 유대인 남의 수익 뒤쫓기, 어느 쪽이 성공적일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유대인의 재산관리 방식이 재산처분에 큰 도움이 되었던 점이다. 유대인들은 탈무드 격언에 따라 재산을 나누어 관리하는 습관을 대대로 지켜왔다. 3분의 1은 현금으로, 3분의 1은 보석이나 골동품 같은 값나가는 재화로, 3분의 1은 부동산으로 부를 분산시켜 관리해 왔다. 안정적 재산관리방식인 ‘포트폴리오(Portfolio)’는 여기서 유래했다.
이런 포트폴리오를 한국인이 모를 리 없다. 문제는 실천력이다. 한국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탐색하는 데 누구보다 열성적이다. 주변에서 큰 수익을 낸 정보를 접하면 그게 바로 모범답안이 된다. 이거다 싶으면 가진 돈을 한 곳에 몽땅 쏫아 붓기 일쑤다. 이른바 ‘몰빵’ 투자다. 빚까지 끌어다 쓰는 과욕도 서슴지 않는다. 순간의 판단에 따라 변동성 높은 부분에 모험 투자를 감행한다. 겁도 없다.
대상도 물문이다. 부동산 붐이 일면 건물과 토지를, 자본시장이 활황이면 주식과 채권을, 요즘처럼 환율이 오를 것 같으면 달러화를 앞 다퉈 마구 사들인다. 한번 분 광풍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시장은 과열로 치닫는다. 피해는 막바지 참여자의 몫이 된다. 남의 말만 듣고 뒤늦게 뛰어들었다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즐비한 이유다. 주식시장에서 개미들만 늘 마이너스인 것도 이 때문이다.
유대인이 분산투자를 고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향후 어떤 자산이 유망할지 모르기 때문에 부동산, 주식, 현금 등에 각각 30% 내외로 분산 투자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과도 좋다. 1993년부터 2015년 8월 말까지 미국의 부동산, 채권, 주식에 투자한 경우 주식의 수익률이 연평균 7.76%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위험을 반영한 위험조정 수익률은 개별 자산에 투자한 것보다는 3분법 원칙의 포트폴리오의 성과가 더 높게 나타났다.
한국인은 늘 꿈을 꾸며 산다. 이에 비해 유대인은 절대 꿈을 꾸지 않는다. 유대인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과도한 기대를 거는 법이 없다.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한국인과 유대인의 차이점 중의 하나다. 남의 수익을 뒤쫓기보다 안정적인 분산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유대인의 지혜는 배울만하다. 안정 없는 성장은 없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은 지어지지 않는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경제컬럼니스트
- 자유기고가
출처 : 금융소비자뉴스(http://www.newsf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