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懺悔品
今與汝等으로
授無相懺悔하야 滅三世罪하고 令得三業淸淨케하리니
善知識아
各隨語하야 一時道하되
弟子等이 從前念今念及後念으로
念念不被愚迷染하고
從前所有惡業愚迷等罪를 悉皆懺悔하오니
願一時消滅하야 永不復起케하시며
弟子等이 從前念今念及後念으로
念念不被驕誑染하고 從前所有惡業驕誑等罪를
悉皆懺悔하오니
願一時消滅하야 永不復起케하시며
弟子等이 從前念今念及後念으로 念念不被嫉妬染하고
所有惡業嫉妬等罪를 悉皆懺悔하오니
願一時消滅하야 永不復起케하여지이다하라
善知識아
己上이 是爲無相懺悔니
云何名懺이며 云何名悔오
懺者는 懺其前愆이니 從前所有惡業愚迷,
驕誑,嫉妬等罪를 悉皆盡懺하야 永不復起케함이
是名爲懺이오
悔者는 悔其後過니 從今已後에 所有일
惡業愚迷驕誑嫉妬等罪를 今己覺吾하야
悉皆永斷하야 更不復作함이
是名爲悔라 故稱懺悔니라
凡夫는 愚迷하야 只知懺其前愆하고
不知悔其後過하나니
以不悔故로 前愆이 不滅하고 後過又生이라
前愆이 旣不滅일새 後過又生하나니
何名懺悔리오
00000
육조스님의 말씀이 참 아주 간단명료하고,
그 본래의 의미를 정곡을 찌르는 데는
아주 더 이상 덮은 가르침이 없습니다.
더 이상 가는 가르침이 없어요. 아주 정곡을...
왜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조사스님의 어록을 [경] 이라고 이렇게 높이
받드는 이유가 바로 그런데에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참회에 대한
이야기인데, 참회를 조금 더 보겠습니다.
今與汝等으로→ 지금의 그대들로 더불어,
授無相懺悔하야→
無相懺悔.
모양 없는 참회. 상이 없는 참회를 주어서,
滅三世罪하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죄를 소멸하고,
令得三業淸淨케하리니→
삼업. 身(신). 口(구). 意(의) 삼업이 청정하도록 그렇게 하겠다.
善知識아
各隨語하야→ 각각 내가 말한 것을 따라서,
一時道하되→
일시에 말을 하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같이 소리
내서 읽는 식으로 지금 하라는 말입니다.
弟子等이→
이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하는 것이지요.
[從前念今念及後念으로 念念不被愚迷染하고
從前所有惡業愚迷等罪를 悉皆懺悔 하오니
願一時消滅하야 永不復起케하소서] ←
이렇게 한번하고, 그 다음에 다음.
弟子等이→ 저희들이 從前念今念及後으로→
앞의 생각. 지금생각. 뒤에 따라올 생각으로부터,
念念不被愚迷染하고→
생각생각에 우미. 어리석고 미혹한 그런 물.그런 더러운
물에 물 들리지 않고, 물 들림을 입지 않고,
從前所有惡業愚迷等罪를→
종전. 과거에 우리가 지었던 악업우미등,
악한 일. 그리고 어리석고 미혹한 그런 죄를
悉皆懺悔한다→ 모두 다 참회합니다.
願一時消滅하야→ 원컨대 일시에 소멸해서.
永不復起케하시며→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말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또
弟子等이→ 제자들이, 저희들이
從前念今念及後念으로→
과거생각. 지금생각. 또 뒤에 따라올 생각으로부터,
念念不被驕誑染(염념불피교광염)하고→ 생각생각에
不被驕誑染.
교만과 거짓의 물 들림.
교만 옆에다 왜 거짓 誑(광)자를 했느냐?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 하니까요. 그래서
驕誑이라고 그렇게 옛말에는 驕와 誑이 붙어 다녀요.
그것이 속임이거든요. 거짓이고요. 그래서 驕誑
교만과 거짓의 더러움으로부터 입지 아니하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從前所有惡業驕誑等罪(종전소유악업교광등죄)를→
종전. 과거에 있었던 교광과 악업들을
悉皆懺悔하오니→ 모두 다 참회하오니
願一時消滅해서→ 일시에 소멸해서.
永不復起케하소서→ 영원히 다시는
그러한 교광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참회이고 그 다음에 또 세 번째
弟子等이
從前念今念及後念으로부터
念念不被嫉妬染(염념불피질투염)하고→
질투. 이것도 아주 여러 가지 번뇌 중에서
독한 번뇌인가 봐요. 이것이 아주 지독한 번뇌.
※
첫번째는 어리석고 미혹한 번뇌이고,
두 번째는 교만과 거짓의 번뇌이고,
세 번째는 질투입니다.
질투의 그 더러운 물들림을 입지 아니하고,
所有惡業嫉妬等罪(소유악업질투등죄)를→
있었던바 악업의 질투등죄를 악업의 질투의 죄를
悉皆懺悔한다→
그 동안 질투한 것 다 참회 하겠습니다 참회하오니
願一時消滅하야→
원컨대 일시에 (질투한)그 죄를 일시에 소멸해서.
永不復起케하여지이다→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법문형식이 참 일방적이지 않고,
당신이 그동안 오분법신향을 설명을 하고,
그 다음에 대중들이 다 동참해서 같이
소리 높여서 이렇게 발원하도록 하고,
그리고 나서 육조스님께서 혼자 설명을 합니다.
그런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善知識아
己上(이상)이 是爲無相懺悔다→ 이것이 형상 없는 참회다.
云何名懺이며→
참회 할 때 무엇을 참이라고 하느냐? 그리고
云何名悔오→
무엇을 회라고 하느냐?
懺者(참자)는→ 참 이라고 하는 것은
懺其前愆(참기전건)이예요.→ (愆허물 건)
앞에 그 동안 했던 모든 허물을 뉘우치는 것. 그것이
懺자의 뜻인데,
愆 = 허물 건자입니다.
從前所有惡業愚迷, 驕誑, 嫉妬等罪를 悉皆盡懺하야→
모두다 다 뉘우쳐서
永不復起케함이→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是名爲懺(시명위참)이다→ 이것의 이름이 懺의 뜻이다.
悔者는→
회라고 하는 것은, 참회할 때 회라고 하는 것은
悔其後過다→
뒤에 저지를 허물을 미리 뉘우치는 거다 미리 앞으로는 절대
今已後(금이후)에→
이후로, 지금부터 뒤로는 절대 내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일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
지금까지는 懺 이라는 뜻으로 했고요.
“않겠습니다.” 하는 것이 悔 예요.
從今已後(종금이후)로→ 지금부터 이후로
所有(소유)인→ 있는 바,
惡業愚迷驕誑嫉妬等罪를 今己覺吾(금이각오)하야→
지금 이미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깨달아서
悉皆永斷(실개영단)하고→
모두 다 끊어버렸어요. 잘못인줄 알았으면
그 다음 더 이상 안 지을 거니까요. 그러니까
永斷이라. 영원히 끊어서
更不復作(갱불부작)함이→ 다시는 짓지 아니해요.
또 짓지는 않는다 이겁니다. 또 짓지는 않는 것이
是名爲悔(시명위회)라→ 이것이 이름이 悔다. 이것이
뉘우칠 懺(참).
뉘우칠 悔(회).
그렇게 하지만 懺과 悔가 이렇게 분명히 다릅니다.
故稱懺悔(고칭참회)니라→ 그러므로 “참회”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전통적인해석하고 똑 같아요.
본래 글자 뜻도 그렇습니다. 한자의 뜻도요.
凡夫는 愚迷하야→ 범부는 어리석고 미혹해서,
육조스님은 이 말을 참 잘 쓰셔요.
어리석음이 제일 문제거든요. 그리고 뭘 모르는 것이 문제고요.
迷자 는 미혹할 미 자 인데, “미혹해서 모른다.”는 뜻입니다.
보복을 하면 보복이 또 돌아오는 걸 모르는 거예요.
모르니까 자꾸 하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도 보복을 했는데...
그러면 “반테러 운동.”
“반테러 운동.”
해석하면 “미국이 보복하지 마라.” 이 뜻이거든요.
우리나라 누가 그랬더군요. “반테러 운동에 적극 동참한다.”
그럼 미국도 지금 테러할 판인데, 속뜻은 “테러하지 마라.”
진짜 뜻은 그것인데 그걸 막 쓴다고요. 그래 이 쪽에서 하면
정당한 것이고 저 쪽에서 하면 테러고 그런 것이지요.
ㅎㅎㅎㅎㅎㅎㅎㅎ그러니까 어리석으니까 더 크게...
凡夫는
愚迷해가지고, 어리석고 미혹해가지고
只知懺其前愆(지지참기전건)하고→
다만 그 앞에 지금까지 잘못한 것만 뉘우칠 줄 알고,
不知悔其後過(부지회기후과)하나니→
그 뒷 허물을 뉘우칠 줄은 알지 못한다.
다시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나간 참회도 아니 하는데
뭐 앞으로 아니 일어날 것을...
아니 일어날 것을 미연에 방지할 줄 알면 괜찮지요
사실은... 아이고 참 답답하지요.
以不悔故(이불회고)로→ 뉘우치지 못하는 고로
前愆(전건)이 不滅(불멸)하고→
그러면 앞의 허물도 안 없어지잖아요? 소멸하지 않는
것이지요. 반복한다는 거예요. 계속 반복하잖아요.
前愆이 不滅하고
後過又生(후과우생)이라→
뒤에 또 계속 이어지지요. 후과가 우생이라.
뒷 허물이 또 생긴다 뒷 허물이 또 생긴다
前愆(전건)이 旣不滅(기불멸)일새→
앞의 허물이 이미 멸하지 아니 했음일새.
後過又生(후과우생)하나니→ 뒷 허물이 또 생기나니
何名懺悔(하명참회)리오→ 어찌 참회라고 이름 하겠는가?
그래 중생들은 한쪽은 알고 한쪽은 모른다.
두 쪽 다 모르는 것이 뭐 허다하지요.
보통 잘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쪽은 알되 한쪽은 모른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 정도 해도 상당하지요.
그러나
육조스님 보기에는 뒤에 올 허물.
“아직 짓지 아니한 허물까지도 뉘우칠 줄 알아야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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懺悔品
善知識아
旣懺悔己하니 與善知識으로
發四弘誓願하리라 各須用心正聽하라
自心衆生無邊誓願度하며
自心煩惱無盡誓願斷하며
自性法門無量誓願學하며
自性無上佛道誓願成이니라
善知識아
大家 旣不道衆生無邊誓願度아
恁麽道는 此不是慧能의 度라
善知識의 心中衆生인 所謂邪迷心,
狂妄心,
不善心,
嫉妬心,
惡德心,
如是等心이 盡是衆生이니
各須自性自度함이 是名眞度라
00000
육조단경
참회품에는 오분법신향에 관한이야기.
참회에 관한이야기.
사홍서원에 관한이야기.
삼귀의 제목 같은 것은 보면 아주 지극히
불교의 상식에 불과한 내용입니다.
삼신도 나오고요.
法身(법신) ·
寶身(보신) ·
化身(화신) ·
이렇게 삼신이지요?
삼귀의는 아시다시피
佛(불) · 法(법) · 僧(승)에 귀의 하는 것을
삼귀의라고 하고,
사홍서원은 모든 법회의식에 마지막에 하는 것이
사홍서원인데요. 그것을 우리가 흔히 하듯이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이해를 하면,
굳이 육조스님께서 당신의 투철하신 깨달음을
가지고 여기서 중언부언 그렇게 하실 까닭도 없고,
또한 우리도 그것을 참으며 들을 필요도 물론 없습니다.
늘 보아왔듯이
육조스님께서는 당신의 아주 투철한 깨달음.
그 얻은 확신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당신의
소신대로 해석을 합니다.
삼귀의가 그렇고 사홍서원이 그렇고 삼신이 그렇고,
참회라고 하는 것이 그렇고, 오분법신향 이라는 것.
오분법신향 · 참회 · 사홍서원 · 삼귀의 · 삼신.
이런 것은 정말 불교인으로서
기본상식에 불과한 것이지만,
여기서 해석한
육조스님의 해석을 보면 아주 차원 높은 해석.
또 더 이상 어떤 지견을 거기서 언급할 수 없는
그런 최상의 지견. 소견을 여기서 기본적인
불교의 용어를 통해서 설명을 하는데,
결론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우리마음에 바탕을 두고, 중생을 제도 한다든지,
불도를 이룬다든지, 또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든지
하는 것. 이런 것이 체계가 잡히고,
거기에 대한 어떤 소신이 있어야
부처님을 뭐라고 설명하든지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제대로 그 뜻을 이해하게 되지,
마음을 떠나서 우리가 달리 사홍서원이나 삼귀의나
오분법신향을 설명한다든지 이해하기로 하면,
늘 겉돌게 되는 것이고, 겉돈다는 것은,
“불교와는 관계없는 이야기가 된다.”
육조스님은 그런 생각이에요.
육조스님께서
깨닫기에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근원이 돼서,
이 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걸림이 되고,
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한 마음으로부터 소멸하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
성불이니 중생제도니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우리 한 마음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이다.
한 마음 떠나서 달리 무엇이 또 존재하는가?
아무리 성스러운 불교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시종일관된 사상이고,
그 宗旨(종지)가 너무나도 뚜렷하지요.
혼란스럽게 불교를 경전을 통해서 보거나
아니면 교리서적을 통해서 보면 상당히
혼란스럽고, 어떤 때는 바깥을 쫓아가기가 일쑤에요.
우리마음밖에 따로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데요. 그런 뜻에서 보면,
육조스님은
늘 그 근본!
근본을 잃지 아니하고 불교를 이해하도록,
항상 모든 것의 그 근본을 잃지 아니한 상태에서,
온갖 것을 이해를 해야
그것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취지지요.
善知識아
旣懺悔己어니→ 이미 참회해 마쳤으니,
與善知識으로 發四弘誓願하리라→
선지식으로 더불어 4가지 큰 서원을 발하겠다. .
“내겠다.” 이런 말이지요. 큰 서원.
이 4가지 서원은 천수경에도 나오고,
불교인으로서 또는 좀 더 바람직한
인생을 살고자하는 그런 사람으로서는
이런 서원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세속적인 모든 꿈과 뜻이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정상적으로 불교에 제대로 귀의를 하게 된다면,
이제 세상사 모두 졸업하고, 그리고도 또 최후의 큰 소원. 정말
진정한 제대로 된 어떤 소원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성스러운 소원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성스러운 소원!”
그것을 불교 안에 여러 가지, 여래10대 발원이 있고,
또 아미타불의 48대원이 있고, 경전마다 원을 이야기하고,
또 우리가
儀式(의식)을 집행할 때도 보면,
끝에는 꼭 무슨 축원. 또는 발원이라고 하는
이런 것이 있어서 우리들의 어떤 작은,
개인의 소박한 소원에서부터
큰 원대한 보살이나 부처가 꿈꿀 수 있는
원대한 원을 우리는 쉽게 이야기를 하지요.
궁극적으로 큰 사람이 되려면, 다시 말해서
불보살 정도의 경지를 생각한다면
세상의 소원은 이제 다 졸업하고,
최후의 아주 가장 성스러운 소원이 진정한
소원으로 남아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四弘誓願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弘誓예요.
“큰 소원이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各須用心正聽하라→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써서 바로 들으라.
自心衆生無邊誓願度하며→
본래 중생무변서원도지요. 그런데 여긴
自心 이라는 말을 앞에다 덧붙였어요.
“중생” “중생” 해봐야 자기마음 중생 밖에
달리 또 뭐가 있겠는가? 밖에 있는
중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自心煩惱無盡誓願斷이라→
“번뇌” “번뇌” 해도 밖에서 나온 것이 아니지요.
번뇌야말로 정말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自心煩惱”예요. 다 함이 없지요. 어릴 때는
이런 번뇌가 참 골치 아팠는데
그것이 어지간히 쉬어졌는가 하면 또 그 사정에는
그 사정에 적당한 번뇌가 일어나고,
이러한 연령에 알맞은 번뇌가 일어나고,
끝이 없어요. 끝없는 번뇌가 일어나는데,
“자심의 번뇌가 다 함이 없다.” 하더라도,
맹세코 끊기를 원하라.
無盡誓願
自性法門無量誓願學이라→
중생이 그렇고 번뇌가 그렇듯이, 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육조스님이 큰 법문을 하신다.
부처님이 이런 저런 법문을 하신다.
自性속에 있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런 법문.
그 법문의 한량없음. 그 한량없음하고는 다른 것하고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은 결국은
자성을 설명하는 것이고요.
또 그 많은 8만4천 법문이 자성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는 것이고, 자성에서 나온 법문이면서 결국 자성을
설명하는 법문이에요. 그것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8만4천 법문이라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제일 단순하지요.
왜냐? 어째서 단순하냐?
다른 무슨 나무를 설명하고 어떤 과학물질을 설명하고
무슨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하나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성에서. 마음에서
출발해서 마음을 설명하다가 마치는 것이 불교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그것도 ‘自性法門이 無量’이예요.
간단하지가 않다고요. 곧 이 세계하고 그대로 똑 같아요.
사실은 이 세계가 더 넓지만 이 마음의 세계에다가 견주어
본다면, 큰 바다에 물거품 하나와 같은 것이 이 세계이고,
마음의 넓이는 넓은 바다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自性法門 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한량이 없는 것이지요.
自性法門無量이라.
그렇게 무량하지만 맹세코 내가 배우기를 원하나이다.
이것 뭐 하나하나 배우는 것이 아니겠지요?
하나하나 배워서 언제 다 배우겠어요?
이것 다 一擧(일거)에 되는 수가 있어요.
自心衆生誓願度도 일거에 되는 수가 있고,
自心煩惱無盡 하더라도 맹세코 끊는다고 하는 이것이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무진하고 무변하고 무량하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된다 이것이지요. 왜냐? 마음의 도리니까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어떤 그 나름의 우리 이론.
또 거기에 대한 우리들의 확신. 이것이 있을 때요?
또 어느 기간 동안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도리.
여기에 대한 우리들의 어떤 확신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自性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게 뭡니까?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지요. 팔만대장경을 일거에,
그렇게 우리가 자신 있게 정리할 수가 있다면,
그것 대단한 것이지요.
육조스님 법문 듣지 못한 사람은 이거 감히
사실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분명히 육조스님은
‘自性法門이 無量하다.’고 했으니까요.
부처님도 말이 많은 것을 스스로 좀 미안 했던지
나뭇잎을 훑어가지고 제자들에게
“이 손에 있는 나뭇잎이 얼마나 되느냐?” “얼마 됩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럼 이 손에 있는 나뭇잎과
저 숲에 아직도 달려있는 나뭇잎과 비교를 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손에 있는 나뭇잎이야
그거 세어본들 몇 개나 되겠습니까? 기껏해야 10~20쪽에
불과한데, 어찌 저 숲에 달려있는 그 많고 많은 나뭇잎을
손에 있는 나뭇잎과 비교한단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지금까지 한 법문이
하지 못한 법문과 비교를 할 때 이와 같다.
손에 있는 나뭇잎은
내가 그동안 설한 법문의 量(양)이라면,
내가 아직 하지 못한 법문의 양은
저 숲에 달려있는 저 무수한 나뭇잎과 같다.”
이런 표현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自性法門無量 이지요.
이것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설명하면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自性法門을 두고 부처님이 생각하니
아무리 설명하고 설명해도
눈 어두운 사람에게는 이것이 도대체가
성에 차지 않거든요.
제대로 설명된 것이 아닙니다. 한량이 없어요.
그렇게 설명하기로 하면...
그래 뭐 깨달아야지 깨닫지 않고
이것을 설명하기로 하니까 이것이 끝이 있나요?
그래서
‘自性法門은 無量하다.’
그러나 “맹세코 배우기를 원한다.” 했지만,
이 배우는 일도 하루아침에 되는
도리가 있는 것이 또한 불교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도리가...
無量하다고 하니까,
無邊하다고 하니까,
無盡하다고 하니까,
오랜 세월을 경과해야 되는 것으로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지요?
自性無上佛道誓願成이라→
무상불도. 최상의 불도. 깨달음의 도이지요.
최상의 깨달음의 도!
이것도 자성으로부터 가능한 것이지
자성 빼고 달리. 누가 뭐 부처님이 無上佛道를 이루었다.
그거는 나 하고 관계없는 겁니다. 또 설사 부처님이
無上佛道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내 자성 안에 있는
것이고요. 내 자성이 이해할 만치 이해하는 것이지,
내 자성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그것 이외에는
그것은 무효입니다. 아무상관이 없는 거라고요.
그리고 이건 궁극적으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리 자성 속에 있는 최상의 깨달음의 길이 無上佛道입니다.
自性無上佛道! 보통
無上佛道誓願成. 이렇게 하는데,
육조스님이 생각하기에는 영 마음에 안 들지요.그래서
앞에 두 글자를 붙인 겁니다.
自心이다.
自性이다.
거기에 특별한 차이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자심이다. 자성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요.
영 시원치 않다 이겁니다.
이렇게 자기 확신이 있다고 하는 것.
이것 참 부러운 것이지요.
그 오랜 세월동안 모두가 衆生無邊誓願度 했는데,
육조스님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自心衆生誓願度,
自性無上佛道誓願成.
그렇게 글자 두 자를 딱 붙였는데 기가 막히거든요.
설명 다 해버렸어요. 그냥 無上佛道誓願成.
이렇게 하면, 이 설명이 도대체 어디 가서 떨어질까요?
佛道無上. 無上佛道誓願成 하더라도,
아~~!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 도는 끝없이 높고 높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요. 그러면 잘못 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잘못 가리라는 그런 예상을 하지는 않지만,
육조스님께서는
이렇게 글자 두자씩 붙여 버리니까 그냥 잘못 가기가 없는
거예요. 그냥 똑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無上이다.
無邊이다.
無量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善知識아
大家 旣不道衆生無邊誓願度
(대가 기부도중생무변서원도)아→
大家 = 대중들이 이미 중생무변서원도 라고
不道. 말 하지 않던가?
대개 그렇게 말하잖아요?
衆生無邊誓願度. 煩惱無盡誓願斷
이라고 말 하지 않던가?
恁麽道(임마도)는 此不是慧能(차불시혜능)의 度(도)라→
이것은 혜능이 제도하는 衆生無邊誓願度.
하는 그 도가 아니다 이겁니다.
일반적으로
衆生無邊誓願度라고 흔히 말 하지 않더냐?
그런 식 제도는
혜능이 = 내가 = 육조가 말 하는 제도는 아니다.
말하자면
그럼 나는 뭐냐?
선지식의 心中衆生(심중중생)인→ 마음속에 있는 중생인
所謂邪迷心(소위사미심)→ 삿되고 미혹한 마음. 또
狂妄心(광망심)→ 거짓되고 뒤바뀐 마음.
광자는 미칠 광자니까 뒤바뀐 것이지요.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 머리 없다.’고. ‘잃어버렸다.’
고 생각하는 사람. 불교경전에서 미친 사람의 대표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친것도 경우가 여러 가지겠지요만, 경전에 나오는
미친 사람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 머리 좀 찾아 달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미친 사람이라고, 그리고
망령된 그런 마음., 그리고
不善心(불선심)→ 착하지 못한 마음.
嫉妬心(질투심).
惡德心(악덕심)
如是等心이→ 이러한 마음이 盡是衆生이다→
이것이 모두가 중생들이 하는, “중생들의 놀음이다.
“중생들의 짓거리다.”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것이지요.
삿되고 미혹한 마음이 있을 수가 없고, 뒤바뀌고 망령된 마음.
불선심. 질투심. 악덕심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이 모두가 중생이니,
各須自性自度함이→
각각 모름지기 자기 자성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
자기의 성품자리를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
이것이 참으로 제도하는 것이고,
是名眞度다→ ‘참다운 제도다.’.
그러니까
뭘 설법하고 뭘 어디 가서 봉사하고, 뭐해서 누구를
“제도한다.”
고 하는 것이 참 부끄러운 짓이고 웃기는 일이지요.
‘自性自度가 진짜 제도다.’
自性自度!
자기 자성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
이 보다 더 우선하는 일이 어디 있으며,
이 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제일 우선하는 일이고 제일 급한 일입니다.
※
임제록에서
임제스님도 가끔 법문하시다가 급한 일. 切急(절급)한 일.
아주 절실하고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절실하고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경고를 합니다.
참으로 급하고 급한 일이 무엇인가?
또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급한 일. 중요한 일. 그런 것을 거론하시면서,
결국은 거기도 내용은
自性自度!
자기 마음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
이것은
남이 제도 못해요. 부처님도 못하고
어떤 조사스님도 못하고,
부모도 뭐 자식마음 제도 못하고
자식도 부모마음 제도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마음 자기가 제도할 수밖에 없어요.
自性自度!
이것은 육조스님이 잘 쓰시는 말인데 참 유명한 말이지요.
自性은 自度해야 돼요.
자기마음 자기가 제도해야 돼요.
아무도 이것은 제도해줄 사람이 없어요. 이것이 참다운
제도입니다.
봉사활동. 좋지요. 다 좋고 또 내가 차라리 성불을 한 생 늦추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중생을 어떻게 하겠다. 그런 보살의 원력도
경전에 보면 종종 보여요. 종종 보이는데, 이 말 앞에는 사실은
꼼짝을 못하지요.
서양에서도 불교가 상당히 빛을 보는 것이
禪佛敎(선불교). 선불교가 빛을 보고,
그 나름대로의 자기체험. 그것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우리나라도 이 선이 아니면 불교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선에 젖어들게 하는 아주 좋은
경고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
自性自度하는 것이 是名眞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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