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40년 호두나무는 빗소리에 훌쩍 키가 커서 지붕을 넘었다. 비가 그치자 무성한 이파리 사이로 초록 그늘이 흘러내렸다. 둥글둥글 매달린 호두가 단단해지고 이파리의 향기도 짙어져 나무그늘 아래 그윽하고 은은한 향기가 맴돌았다. 라일락이나 아카시아처럼 요란하지 않고 고요한 호두나무 향기, 보이지 않는 것들은 마음으로 읽어야 했다. 직박구리가 향기를 물어 나르는 오후는 초록빛살로 눈이 부셨다.
1. 호두나무의 집
작년 늦가을에 이곳에 왔을 때 호두나무는 시든 이파리와 잘 여문 호두를 드문드문 매달고 있었다. 제법 밑동이 실팍한 나무는 호두를 방울처럼 흔들며 의젓하게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나무는 허공에 무수한 길을 터놓고 하늘과 교신 중이었다. 하늘과 지상과 땅속에 집을 지은 나무는 집을 더 늘려갈 모양인지 허공으로 손을 뻗고 발가락을 더듬어 땅속의 길을 걷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뿌리의 집과 무성한 허공의 집, 두 개의 집을 동시에 짓는 나무의 집은 어디일까?
2. 호두나무 농사
나무가 한해 지은 농사는 모두 나뭇가지에 전시되었다. 호두나무는 이쯤에서 농사를 마친 듯 싶었지만, 또 일이 남아있었다. 주인이 호두나무농사를 무심히 지나쳐서 이듬해 봄까지 익은 열매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까만 호두열매는 바람이 불때마다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 품꾼처럼 마지막 끝물농사를 거들었다. 고소한 맛은 딱딱한 껍데기에 한 알 한 알 고스란히 보관되어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호두나무는 한 푼도 값을 받지 않았다.
3. 나무의 소유권
이층에 혼자 사는 집주인은 물 한 번 거름한 번 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집이 세워질 무렵 시골 어디에선가 왔다는 이 녀석은 거지반 제 힘으로 터를 잡은 것이었다. 주인은 호두나무보다 해마다 감을 스무 상자나 낸다는 앞마당 감나무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나는 문득, 녀석이 가여워졌다. 밑동을 가만히 쓸어안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나는 새 주인이야.” 나무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나뭇가지를 출렁거렸다. 내 작은 방과 마주보며 서있는 나무는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는 호두나무와 그늘까지 모두 임대했다. 그 후 오가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호두나무를 소개했다. “이 나무 밑동 좀 보세요. 나이가 제법 많아요. 이파리 향기 좀 맛보세요.” 그럴 때마다 나무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나무에게도 제 편이 필요했다.
4. 교감交感
나무의 어깨에 걸린 파란 하늘이 조금씩 지워지고 나무의 그늘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공기도 서늘해져서 나무는 으스스 목을 움츠렸다. 태풍을 무사히 견디고 가을이 넘어갈 무렵 어디선가 몰려온 까마귀 떼가 한바탕 춤을 추곤 사라졌다. 나는 보일러를 틀고 방을 데웠다.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호두나무 표정을 받아 적을 때 나무의 숨소리가 손끝까지 스며들었다. 그늘로 쓸어 모은 서늘한 기운, 하늘을 깊이 들이켜는 소리, 물결처럼 번져가는 숨소리에 허공이 가늘게 떨리는 소리, 나무 밑에 웅크린 눅눅한 어둠, 가지와 가지를 날아오르는 날갯짓 소리, 나무와의 交感은 하늘과 바람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새들에게 한 그루 집이 되기까지 나무는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평생 서서 견뎌야 하는 나무의 무릎들, 밋밋한 나무의 관절은 통증과 함께 천천히 늘어났다. 나무를 향해 내 귀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5. 혹한의 계절
초설이 내리더니 이어 한파가 밀어닥쳤다. 호두나무는 맨몸으로 바람을 다 견딜 요량으로 남은 옷을 죄 벗었다. 발등에 눈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등이 시린지 가끔 바람에 뒤척이다가 눈뭉치를 떨어트리기도 했다. 나는 잠자코 裸木의 말문이 열리도록 기다렸다. 나무 아래 발자국을 찍어 놓고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나무가 발자국을 헤아리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흔들렸을까. 시든 호두나무 이파리가 발자국을 덮고 보일러는 나무의 심장을 돌리듯 윙윙거렸다. 연통에서 떨어진 낙수가 석순처럼 자랐다. 떨어진 물이 탑이 되어 바닥에서 올라오고 추위는 완강했다. 자정 무렵 나는 집필실을 떠나 장안동 집으로 돌아왔다. 추위에 마음마저 닫히고 나무는 날마다 사라지는 내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은 미끄러웠고 연일 혹한이었다.
6, 뒷마당의 고요
앞마당은 볕이 잘 들어 눈이 녹았다. 잠깐 볕이 다녀가는 뒷마당은 여전히 싸늘한 기운이 모여 있었다. 정적은 그런 곳에 쌓이는지, 그늘은 더 고요했다. 나는 고요를 담아와 찻물을 끓이고 차를 마셨다. 볕이 많이 들지 않고 외진 곳이라 마음을 눕히기도 좋고 생각을 늘리기도 좋았다. 그래서 나무도 더 단단해진 모양이었다. 외로움이 가지를 늘리고 목을 늘렸을 것이다. 매끈한 감나무보다 몸피가 거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가끔 앞집에서 강아지 소리가 날아와 고요의 속살을 찔렀지만 고요는 곧 아물었다. 고요의 몸을 열 수 있는 것은 오직 고요뿐. 뒷마당이 외지고 그늘이 사는 덕분에 나는 고요의 뿌리에 닿았다. 나무는 가끔 호두를 떨어뜨리고 그 호두를 줍는 사람의 기쁨을 바라보며 정적을 견디었을까. 나는 이곳에 와서 여러 번 호두를 주웠다. 호두 속에는 사람의 뇌를 닮은 속살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사람을 닮은 나무, 생각하는 나무는 호두나무 아닌가. 맛을 보니 고소했다. 나무가 온전히 익혀 건네준 나무의 생각은 잘 숙성되었다. 섣불리 생각을 내밀지 않는 나무의 배려는 단단한 껍질 속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7. 호두나무의 봄
더딘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봄이 왔다. 몇 차례 황사가 불어왔고 춘설이 내렸다. 목련은 파르르 떨더니 일찍 서둘러 돌아갔고 둑길에 장을 벌였던 벚꽃도 일찍 파장을 하고 말았다. 그 사이 예민한 호두나무는 겨우내 봄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두고 뒷마당까지 봄을 끌어당겼다. 치밀하게 계산을 마친 자리에 일시에 새봄을 내걸었다. 가지마다 파랗게 물이 오르고 호두나무 심장이 쿵쿵거렸다. 피댓줄을 걸고 스위치를 올린 방앗간처럼 쿵쾅쿵쾅 나무의 혈관으로 수액이 흐르는 소리, 세찬 급류처럼 봄이 밀려오는 소리… 봄이 다녀간 후 볼록볼록 젖꼭지 같은 풋열매가 열렸다. 호두나무의 봄은 특별했다. 일곱 개의 이파리를 한데 모아 하나로 잎을 만들고 줄기마다 매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늘이 누울 자리도 함께 계산되었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를 버무려 이파리속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두나무의 봄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제 품에 품을 만한 것들만 남겨두고 필요이상으로 많은 열매는 일찌감치 제 발밑으로 던져버렸다. 게으른 앞마당 감나무는 조금 늦게 작업을 시작했다. 감꽃을 먼저 치우고 호두나무가 작업을 다 마친 봄을 거쳐 여름까지 풋감을 솎아냈다. 오직 버려야 사는 게 나무들이었다. 잎을 버리듯 열매도 버려야 한다는 걸 나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8. 그늘
여름나무는 그늘을 짜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공중에서 이루어졌다. 그늘코를 놓친 나무는 가끔 떨어진 이파리를 보며 황당한 눈치였다. 나는 떨어진 이파리를 주워 바구니에 담아두었다. 향기가 방안을 날아다녔다. 나뭇잎 사이에 허공을 한 장 씩 덧붙여 그늘을 넓히더니 금세 마당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우기가 시작되었다. 장마가 시작되자 마당의 그늘은 모두 사라졌다. 나무는 그늘이 젖지 않도록 어딘가에 그늘을 감춘 모양이었다. 그늘은 빛으로 보는 것,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는 우산처럼 지붕을 덮고 있어서 빗물은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떨어졌다. 고개를 들면 사이사이 하늘이 펄럭이고 커다란 나무 우산 아래서 빗소리를 듣는 동안 눅눅한 기운이 발등을 타고 올라왔다. 세상에는 우산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나무가 그늘을 걷어간 까닭을 알 수 있었다.
9. 땅속의 집
장마가 계속되는 동안 시멘트 마당은 금이 가고 빗물은 갈라진 틈으로 스며들었다. 중국교포가 사는 지하에는 눅눅한 곰팡이가 피고 있을까? 하지만 주인은 물 한번 스미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가능한 일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릎을 쳤다. 앞마당 감나무와 뒷마당 호두나무 뿌리를 생각하는 순간, 의문은 풀렸다. 뿌리란 물을 찾아 길을 내는 것. 그 거대한 뿌리들이 땅속에 집을 짓고 물기를 빨아 올렸을 것이다. 지하에 집을 짓는 나무들의 집이 사람이 지은 집보다 안전하고 튼튼했다.
10. 호두나무의 앞집
호두나무의 앞집은, 이웃인 호두나무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빠져나온 레인지후드 주름관이 호두나무를 향하고 그 주름관 끝으로 저녁 메뉴가 빠져나왔다. 고등어 튀기는 냄새, 청국장 냄새, 비리고 고약한 냄새가 하수구관처럼 악취를 뿜어냈다. 냄새는 곧장 우리 방문으로 달려들었다. 호두나무는 이파리에 묻은 기름냄새를 털어내느라 바람에 몸을 뒤척이고 나는 방문을 걸었다. 그러나 냄새는 틈을 기웃거리며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냄새가 다 흩어지도록 기다려야 했다. 우리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들이 이렇게 고약한 냄새를 피우다니, 나는 새삼 악취에 치를 떨었다. 저 주름관의 입구는 아무도 살지 않는 허공으로 방향을 정했어야 했다. 제 집에서 냄새를 몰아내면 그만인 사람들이 둘러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었다. 잘못된 길을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남의 상처를 헤아리지 않는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상처가 많다고 했던가. 나무는 해마다 향기를 주었지만 앞집은 그것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11. 분석하다
나무는 누구를 위해 농사를 짓는가? 나는 호두나무의 농사를 분석한다. 그 많은 가지에 호두를 매다는 것은 나무의 습성이고 그 열매를 취하는 것은 심은 자의 권한이었다. 나는 그 집의 세입자이지만 내가 사는 마당을 차지한 나무이니 나에게도 얼마간의 권한을 부여한다. 단 낙과만을 허락한다. 막대기를 들고 후려치는 것은 주인의 허락 하에 가능한 일. 그러나 예외는 있다. 어디선가 숨어든 청설모와 다람쥐가 대부분 수확을 거둬간다고 한다. 녀석들에게 그것이 밥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접근을 막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문제는 나무에게 대문이 없고 짐승이 사람보다 더 빠르다는 것, 그래서 호두나무 농사는 적자라고 한다. 주인이 호두나무를 본 척도 안 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감나무는 가지가 찢어지는데 녀석들은 감은 쳐다보지도 않고 단단한 호두만 노린다. 내가 호두나무를 사랑하는 만큼 녀석들에게 호두는 절실한 것이었다. 배가 부른 나는 호두나무가 부려놓은 그늘과 한 움큼의 향기와 뒷마당의 고요만 챙기면 되는 것이었다. 오가는 바람에 높이 매달린 호두만 떨어지기를 바랐으니 참 어리석은 일, 나는 다시 순위를 정한다.
1순위 - 청설모 2순위 - 다람쥐 3순위 - 집주인 4순위 - 나
나는 맨 끝에 매달려 있었다. 호두나무가 맨 끝인 나에게 베풀어준 선심은 저를 향한 내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