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뢰(李山賚)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진위 현령(振威縣令), 순창 군수(淳昌郡守), 금천 군수(金川郡守) 등을 역임했으며, 신중엄 신도비(申仲淹神道碑)와 월봉서원 편액을 썼다. 고봉전서(高峯全書)
고봉별집 부록 제2권 / 월봉서원 사실(月峯書院事實) / 서원문헌록(書院文獻錄)
○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가에 옮겨 세웠는데 낙암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 ) 갑오년(1654) -효묘(孝廟) 5년- 8월 19일에 유림이 대궐에 호소한 것으로 인하여 사액(賜額)하였다. 을미년(1655) 4월 2일에 사액을 맞이하였는데, 예조 좌랑 원격(元格)이 임금의 제문을 받들고 와서 치제(致祭)하였다.
○ 사우 3칸을 숭정 을사년(1665) -현묘(顯廟) 6년- 에 중창(重創)하였다.
○ 월봉서원(月峯書院)이란 4글자의 대자(大字)는 이산뢰(李山賚)의 글씨이다.
이경석(李景奭) 1595년(선조 28)~1671년(현종 12)
白軒先生集卷之三十一○文稿 / 記 / 觀德亭記
湖之南數饒郡。玉川居先。而古無射所。今李侯山賚爲郡。始亭之而扁曰觀德。手自大書以揭之。遂錄其槩。請記於余。衰且病矣。久未之副。三閱月而始乃復之曰。邑宰之爲政。不專在於櫛垢爬癢。審其緩急而先後之。乃政之善者也。以饒郡而鄕射無其所。可謂之知緩急乎。故知郡林君聖翊修舊蓮池。卽池上而建閣。曰
凝香亭。其東曰翠紅。功未訖而去。其意非不美也。先後則失之矣。李侯以乙未(1655,효종6)春莅郡。顧瞻廨宇。擧皆頹弊。於是因舊而新之。客舍及觀政樓,
凝香閣長第。繕完而丹雘之。惟翠紅未及修。父老咸一口言曰。官池則一閣足矣。去池數百步而有大川。峯巒之所環匝。喬木之所森列。如撤翠紅而搆于此。則射有其所而勝景可兼收矣。卽撤而移之。彩閣翬飛。不數月而工斷手。階其庭而花竹之。大治迥場永埒。侯于東。騎于北。南則砲。蓋天作而地設之。以待時矣。古所未有者今忽有之。可謂後緩而先急矣。又能臨水而作。其得澤宮之遺意者乎。夫自揮夷牟之後。弧矢卽爲男子之所有事。三代之所尙。六藝之所取。經傳之所紀述。無事則進退周旋。揖讓雍容。月滿星流。終日不失。于以習禮節而觀德行矣。有事則左攬右接。風生電掣。發必洞胸。中輒穿甲。于以禦暴亂而却勍敵矣。然觀德有大小。直其外體。固其弓矢之持。中不失鵠。則斯可知其內志之正。此其本也而觀德之小者也。卿大夫以循法爲節。士以不失職爲節。功成而德行立。無暴亂之禍而國以之安。此其效也而觀德之大者也。孔子射於矍相圃。子路執弓矢出延射曰。賁軍之將。亡國之大夫不入。將而無勇。臣而不忠。不敢與於射。射之義有大焉如此。公罔之裘揚觶而語曰。幼孝悌。耆耋好禮。不從流俗。修身以俟死。得與於賓位序。點又揚觶曰。好學不倦。好禮不變。旄期稱道不亂者。可以在位。至此而其責之者益重矣。揖讓而射於斯亭者。必以正其志。成其功。立其德。賈勇衛國自期。方可以稱觀德矣。登斯亭而在賓位者。亦必以孝弟好禮。修身俟死。不倦不變。不亂爲務。然後方可以稱其位矣。是亦不可以他求。惟在主一同者。爲政以德。明其禮以興之。能如是。則斯亭也豈但觀射者之德。抑可以觀太守之德矣。爲太守者敢不勉乎。是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