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인法人 존재는 정당한가? * 저자著者: 신동기

[이상숙]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 법인法人 존재는 정당한가? *

- 법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소고小考 -

(*출처: 신동기 著 『회사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깨는 인문학적 생각들』

(2016, 티핑포인트 刊) p235-254)

법인과 자연인

3조 원대 사기 대출 혐의를 받고 있는 가전 제조업체 모뉴엘이 2014년 12월 9일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았다. 자산 2,390억여 원, 부채 7,302억여 원으로 부채가 자산을 초과(자본 –4,912억여 원)한 상태였다. 법원은 2015년 10월 16일 사기 등의 혐의로 모뉴엘 대표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2014년 4월 16일 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의 선박 소유주인 세모그룹의 유병언 전 회장 일가는 1997년 2,245억 원의 빚을 지고 있던 (주)세모가 부도가 나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제도를 이용해 빚 대부분을 사실상 탕감받고 유 전 회장의 자녀와 측근을 내세워 2007년 337억 원에 (주)세모를 다시 인수했다.

정부가 지방자치단체 파산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태백시 산하의 태백관광개발공사와 같이 공사의 부채(2012년 현재 3,392억)가 해당 지자체의 연간 예산(2014년 현재 2,300억)을 훨씬 넘어서거나, 인천시와 같이 시 공무원들에 대한 급여가 지연 지급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지자체의 재정 안정성에 빨간 불이 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격, 즉 ‘인격’을 가진 사람은 법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생명을 지니고 감정과 이성을 통해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보통의 사람인 ‘자연인’과, 법률 규정에 의하여 자연인과 동일하게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법으로 인정한 사람, 즉 ‘법인(法人, Juridical Person)’이다.

법인을 두는 이유는 ‘자연인에 의하여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사업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결합이나 특정한 재산에 대하여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법률관계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기 위한 것이다. 주식회사나 국가·지방자치단체 등 자연인 이외의 모든 법적 권리·의무의 주체는 바로 이 법인에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과거와 달리 법인화가 고도화되어 다양한 목적과 기능의 법인이 등장하고, 기업법인의 경우 활동 영역에 있어서나 역할에 있어서나 자신의 근거 토대인 국가를 능가하고, 인간 생활환경의 최고 규정 단위로 정의실현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국가 법인이 국내외적으로 기업화(경쟁적 존재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법인이라는 형식의 존재에 문제의 여지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자연인 이외 ‘사람 단체’나 ‘재산’에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당한지, 부득이하게 현실적인 이유로 인격을 부여하더라도 그 권리와 의무 또는 법인과 법인을 실제 운용하는 자연인과의 관계가 법인 외부에 대해 문제가 없는가를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감각의 문제

첫째, 근본적으로 ‘자연인’이 아닌 ‘법인’이 법적 권리·의무의 주체로서 행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제러미 벤덤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을 ‘자연은 인류를 고통(Pain)과 쾌락(Pleasure)이라는 두 주인에게서 지배받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일은 물론이요 무엇을 행해야 할까 짚어내는 일은 오로지 이 두 주인을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옳음(Right)과 그름(Wrong)의 기준이, 또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두 주인의 왕좌에 고정되어 있다. 이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에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고에서 우리를 지배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하는 모든 것, 즉 생각과 말과 행위가 고통과 쾌락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 행동의 모든 원인과 결과를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다. 나아가 특정 사람 단위, 예를 들어 인류 전체의 쾌락을 증가시키는 것은 곧 인류에 대한 ‘옳음’이자 ‘인류 정의’이고 반대로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은 인류에 대한 ‘그름’이자 ‘인류 불의’이며, 한 국가나 사회에 대한 쾌락을 증가시키는 것은 곧 그 국가·사회에 대한 ‘옳음’이자 ‘국가 정의’이고 반대로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은 국가·사회에 대한 ‘그름’이자 ‘국가 불의’이며, 특정 개인만 존재할 경우 그 개인에 대한 쾌락을 증가시키는 것은 곧 그 개인에 대한 ‘옳음’이자 ‘정의’이고 반대로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은 ‘그름’이자 ‘불의’가 된다는 이야기다.

삶 자체를 고통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동양의 불교 역시 인간의 행위는 생각(의업意業)과 말(구업口業)과 행위(신업身業)로 이루어지고, 그 생각과 말과 행위는 다름 아닌 ‘고통(苦)’과 ‘쾌락(樂)’에 의한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동양철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홍범구주에서는 인간을 다스리는 고통과 쾌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각각 6가지, 5가지로 말하고 있다. 바로 ①죽음(흉단절凶短折), ②고통(질疾), ③걱정(우憂), ④빈곤(빈貧), ⑤흉악해 재앙 받는 것(악惡), ⑥못나서 굴욕 받는 것(약弱)과 같은 6가지의 고통과, ①장수(수壽), ②부유(부富), ③건강과 편안함(강녕康寧), ④식견(유호덕攸好德), ⑤자연사(고종명考終命)와 같은 5가지의 쾌락이다. 인간의 행위는 다름 아닌 이 11가지의 고통과 쾌락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름 아닌 ‘고통’과 ‘쾌락’이고, 그 ‘고통’과 ‘쾌락’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눈, 귀, 코, 혀, 몸, 생각을 가진 ‘자연인’이 있다. 다시 말해 생명이 있는 ‘자연인’ 외에는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없다.

‘법인’은 자연인에 한해서만 권리·의무의 주체로 삼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불편과, 법인이라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증가되는 사회적 효용을 고려해 불가피하게 법적으로 인정된 권리·의무의 주체, 즉 ‘인격’이다.

상대가 있는 인간 행위의 집약인 권리·의무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핵심 속성인 쾌락·고통과 연결된다. 즉 ‘권리’는 ‘쾌락’을 욕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적극적 행위로, ‘의무’는 ‘고통’을 감수하고 ‘쾌락’을 포기하는 수동적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 말은 상호관계에 있어서의 권리 행사와 의무 수행은 본인은 물론이고 상대방도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권리·의무가 의미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A.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어떤 사물이 감사 또는 분개의 적절한 대상이 되려면, 그것은 기쁨 또는 고통의 원인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쁨과 고통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 사물에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특성이 없다면 감사와 분개의 감정은 그 사물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표출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상대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존재라면 근본적으로 ‘의무’를 지울 수 없고, 자신이 ‘쾌락’을 느낄 수 없는 존재라면 근본적으로 ‘권리’를 즐길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길을 가다 돌멩이에 발뿌리가 걸려 발가락이 부러졌다 해서 사람들은 다시 돌멩이를 걷어차지 않는다. 돌멩이는 고통과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무를 과할 수도, 권리를 향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법인 마찬가지다. 법인 자체는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고통도 기쁨도 느낄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법인은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속성을 결여한다.

법적 권리·의무 주체로서의 자격에는 정확히 말하면 이 고통과 쾌락에 대한 감각 기능만 요구되지 않는다. ‘상상력’과 ‘기억력’도 함께 요구된다. 사람들이 죄를 짖지 않고 사는 것은 당연히 착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벌이라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지금 현재 직접 고통을 받고 있지 않아도 상상력을 통해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리 올바른 행동을 한다.

기억력 마찬가지다.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발각될 염려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행위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선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행위 뒤에 남는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남는 부끄러움·양심의 가책에 의한 고통이 일순간의 쾌락보다 훨씬 크다면 선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그 쾌락을 선택하지 않는다. 불교의 12연기緣起에서도 한번의 잘못된 행위는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잠재되어 삶 전체(생生)를 통해 남아(유有) 사람을 괴롭게(노사老死) 만든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억력’의 효과 때문이다.

개가 사람을 물어 죽였을 경우 보통 그 개를 도살한다. 개를 도살하는 조치는 발가락을 부러트린 돌멩이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과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의 중간이다. 즉 개는 ‘쾌락’과 ‘고통’ 자체를 느끼는 존재이긴 하지만 상상력과 기억력은 없다. ‘쾌락’과 ‘고통’을 느끼지만 본능대로 움직일 뿐이다. 따라서 사람을 물어 죽인 개는 도살되는 잠깐의 순간 ‘고통’을 느낄 수는 있지만 ‘상상력’과 ‘기억력’은 없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죄책감도 없다. 따라서 사람을 물어 죽인 개를 도살 처리하는 것은 개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응징의 의미는 아주 약간일 뿐이고 대부분은 본능에 의한 향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다.

정리하면, 권리·의무 행사의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의 인격에는 쾌락·고통에 대한 감각뿐만이 아니라 기억력·상상력도 필수다. 쾌락과 고통은 그것이 발생하는 순간 이상으로 발생하기 전과 발생한 후에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하고 또 그런 효과가 권리·의무 행위를 더 충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연인이 아닌 법인은 쾌락과 고통에 대한 감각뿐만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법인은 행위 전, 행위 후의 상상력과 기억에 의한 확장된 쾌락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도 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기에 한계가 있다.

법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개인 일탈의 문제

둘째, 법인 내 대표이사 등의 행위를 법인의 행위 자체로 여기기에는 인간의 이기주의적 속성상 한계가 존재한다. 법인은 ‘사람의 단체’(사단)이거나 ‘재산’(재단)인 이상 당연히 법인의 실제적인 권리·의무 행위는 법인에 속해 있는 대표이사 등 업무집행자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법률과 정관에 의해 정해진 역할을 법률과 정관에 의해 정해진 대표이사 등이 하는 법률적 행위를 현실에서는 법인 자신이 하는 법률행위로 의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법인’과 ‘법인 내 업무집행자’의 입장이 정확히 일치될 수 있느냐, 아니 현실에서 정확히 일치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법인’이 ‘자연인’과 동일하게 권리·의무의 주체인 인격이 되기 위해서는 법인의 행위가 자연인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그런 입장과 다름이 없어야 되고, 대표이사 등 업무집행자의 태도와 입장은 당연히 이러한 법인의 입장에 100% 부합되어야 한다.

앞의 모뉴엘 사례의 경우 대표이사인 P씨는 3조원대의 사기대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런데 3조원대의 사기 대출의 궁극적 책임자는 개인 P씨가 아닌 P씨가 대표이사로 속해 있는 법인 모뉴엘이다. 따라서 개인이 3조원대의 사기 대출을 받았을 경우 100% 개인에게 부과될 징벌과 책임에 비해, 이 경우의 징벌과 책임은 법인 모뉴엘과 자연인 P씨로 나뉘게 된다. 법인과 법인 업무집행자의 입장 일치 여부 문제 관련해 모뉴엘 사례의 핵심은 사실 차입자인 모뉴엘이 아닌 그 상대방인 대출 법인(금융기관)에 있다.

대출 의사결정자가 ‘법인의 업무집행자’가 아닌 ‘자연인’, 즉 개인 입장이었을 경우에도 모뉴엘의 매출 등에 대한 철저한 확인 없이 그런 천문학적인 금액의 대출을 그렇게 허술하게 실행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기 개인 돈을 타인에게 수백억, 수천억원 빌려줄 때도 이자 소득과 원금의 안전한 상환이라는 ‘쾌락’에 대해 그렇게 과대평가하고, 상환 불능 시 발생할 천문학적 금액 손실의 ‘고통’에 대해서는 그렇게 과소 평가 했겠느냐 하는 이야기다.

법인의 업무집행자로서의 입장이 자신이 100% 쾌락과 고통을 안아야 하는 경우의 자연인으로서의 입장과 다르다면, 업무집행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법인의 법률행위는 법적 인격인 법인 자체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한마디로 자연인에 비해 ‘고통’은 훨씬 낮게 평가하고 ‘쾌락’은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결국 법인에 손실을 끼치고 만 경우다. 물론 이때도 다른 부조리한 거래 등은 일체 없다는 전제 하에서다.

사실 법인 내 업무 집행자 입장에서의 업무 관련 ‘쾌락’과 ‘고통’에 대한 상식을 벗어난 평가는 정부기관,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공법인으로 가면 더할 가능성이 높다. 거래를 통해 이익을 남겨야 하는 기업법인과 달리, 공공법인은 주로 주어진 예산을 집행만 하면 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국가·지자체 예산은 경쟁적 활동이 아닌 국민의 의무적 납세를 통해 마련되기 때문에 재원 마련의 ‘고통’을 느끼기가 힘들고, 예산 집행으로 창출되는 ‘쾌락’인 공익 역시 공공재화로서 경쟁적 환경에 놓여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인 지역민들 입장에서도 없던 편익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쾌락’의 품질 또한 그리 따지지 않는다. 당연히 자기 개인 돈으로 한다면 꿈에도 생각지 않을 무모한 사업도 손쉽게 벌일 가능성이 있고, 사업성과도 실질보다 납기 등 형식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연인인 개인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자체였다면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예산 누수가 수시로 발생한다.

앞의 지자체 산하 공기업의 부채가 지자체 예산을 초과할 정도가 되거나, 과도한 사업집행으로 공무원 급여를 제때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지자체 재정이 악화된 것은 상당 부분 단체장 등 업무집행자가 법인인 지자체가 아닌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서 법인을 이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법인이 아닌 자연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법인’이라는 이름으로 법인의 업무집행자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법인 내 업무집행자의 행위를 도저히 법인 행위로 의제할 수 없는 상황은 거의 상시적으로 발생한다. 비자금 조성 등을 위한 횡령, 내부거래를 통한 일감 몰아주기, 전문성 없는 인사의 낙하산 인사, 주인이 아닌 대리인 자신을 위하는 대리인 문제 등, 모두 법인 내 대표이사 등 업무집행자의 행위를 법인의 행위로 여기는 것이 도저히 무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현실적 한계들이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이사회나 대표이사 또는 단체장과 같은 ‘자연인’들이 ‘법인’의 입장에 매우 부합하지 않고 있다.

권리와 의무의 불균형 문제

세 번째는 법인의 권리와 의무의 불균형이다. 오늘날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대표적 법인인 주식회사는 의사결정기관인 주주총회, 업무집행과 대표기관인 이사회·대표이사, 내부감독기관인 감사 세 기관으로 되어 있다. 법인의 권리와 의무의 불균형은 법인 자체의 불균형과, 형식적 인격인 ‘법인’의 의무와 실질적 ‘법인’이라 할 수 있는 대표이사 등의 권리 간 불균형이다.

홍범구주의 내용에서처럼 인간은 고통과 쾌락의 원칙에 의해 행위 하는데 가장 큰 고통은 ‘죽음’이고 살아있는 동안의 가장 큰 쾌락은 ‘부富’이다. 그리고 죽음 다음의 고통은 질병, 걱정, 빈곤, 재앙, 굴욕과 같은 것들이고, 부 다음의 쾌락은 건강·평안, 식견, 자연사와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구성원들을 제재하거나 격려할 때 또는 기업 차원에서 직원들을 제재하거나 격려할 때는 당연히 이런 요소들이 동원된다. 물론 이때도 이런 요소들의 활용 효과는 요소의 사용 순간뿐만이 아니라 그 전 그리고 그 후의 이런 요소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과 기억에 의한 의식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동안 국가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사실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일정한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희망 역시 인간의 삶 전체를 어느 정도 이하로 게을러지지 않게 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자연인 외 또 하나의 인격인 법인에게는 죽음 자체는 있으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청산과 해산에 의한 죽음이 존재하긴 하나 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법인은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고 또 살아있는 내내 자연인으로 하여금 일정 행위 이상 저지르지 못하도록 억제작용을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법인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제 업무집행자인 대표이사 등은 법인을 대신해 법인의 죽음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또 법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 미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나친 행위를 자제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고통도 없고 지나친 행위에 대한 자제도 그리 있다고 볼 수 없다. 법인의 실질이라 할 수 있는 업무집행자인 자신이 죽는 것도 아니고, 법인은 다시 설립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이 있고 행위의 자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익을 많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영자로서의 고뇌 정도가 있을 뿐이고, 법 너머의 유혹을 견뎌내기 위한 자제일 뿐이다. 더구나 전문경영인이라면 성과급을 못 받게 되거나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명예 실추에 대한 염려 정도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자연인의 의무(고통)에 대한 가장 큰 강제 요소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법인에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법인에게 있어 의무감은 낮을 수밖에 없는 데 반해, 권리(쾌락) 중 가장 보편적이고 다수가 가장 우선시하는 부 추구에 있어서는 기업의 전문영역인 만큼 최대한으로 권리를 행사해, 결과적으로 의무와 권리가 크게 불균형을 이루기 쉽다. 한마디로 기업 법인에게는 실질적으로 죽음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돈에 대한 집착은 강하기 때문에 균형 원칙에 바탕한 의무·권리에서 의무 쪽은 소홀해지고 권리는 극대화되기 쉽다.

법인의 권리와 의무의 불균형에 있어 두 번째 살펴볼 것은 법인과 업무집행자 간의 주요 역할 차이에 따른 불균형이다. 법인이 외부와 거래할 때 형식적 법적 당사자는 당연히 법인이다. 대표이사 등 법인의 업무집행자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법인의 법적 행위는 법령 및 정관에 의해 모두 대표이사 등 법인의 업무집행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법인의 법적 행위는, ‘권리행위’에 있어서는 ‘업무집행자’의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고, ‘의무행위’에 있어서는 궁극적으로 ‘법인’의 명의가 되기 쉽다. 다른 말로, ‘권리행위’의 소재는 현실적·구체적인 ‘사람’에게 있지만 ‘의무행위’, 즉 책임질 일에 대해서는 법적 형식일 뿐인 ‘법인’에게 돌려진다.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사기 목적 신설법인의 어음 발행 후 고의 부도’와 같은 사건들은 법인의 ‘업무집행자의 권리 행사’와 ‘법인 명의의 의무행사’간 불균형의 극단적인 예이다. 과도한 부채로 자기자본 완전잠식 상태에서 법인이 부도나는 경우도 법인의 ‘실질적 권리주체’인 업무집행자와 ‘형식상 의무주체’인 법인으로 권리·의무의 주체가 나뉘어 불균형을 드러낸 경우이다.

법인의 이사가 회사를 대표해(상법 제562조 ①항) 법인의 사무를 집행하는(민법 제58조 ①항) 자로서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그 직무를 행했다면(민법 제61조) 업무집행자인 대표이사 등은 부도 전까지 행사한 차입 등의 ‘권리행사’에 반해, 부도에 따른 부채 상환 등에 대한 ‘개인적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 글 서두의 (주)세모의 사례는 이런 ‘권리’의 ‘의무’간의 불균형을 교묘하게 활용한 사례다.

기업법인의 태동기인 19c 전반을 살았던 A. 토크빌은 ‘회사라고 불리는 이 집합적인 존재는 지금까지의 어떤 개인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데도 이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거의 지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합적인 존재는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만큼의 독립성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기업법인 등장 이후 지금까지 법인 제도에 대한 보완이 진행되어 왔겠으나 법인이 갖는 기본적인 속성의 한계 상 A. 토크빌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업무집행자가 법인의 입장에 부합해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행위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직접적인 제재는 ‘배임죄’다. 그러나 상법상의 배임은 다름 아니다. 글자 그대로 ‘임무에 위배한 행위’(상법 제622조 ①항)로, 넓게 보면 거의 적용되지 않을 행위가 없고, 반대로 좁게 보면 특별히 적용할만한 행위가 많지 않다. ‘임무에 위배한 행위’라는 규정 자체가 너무 모호하고 동시에 업무집행자의 ‘대리인’으로서의 역할 속성상 ‘재량’을 상당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모호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호함 자체를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현실적 사정이 있다. 그러다 보니 법원의 판결에 있어서도 배임죄는 일정치 않다. 사법적 판결로서의 공정성이 의심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업무집행자의 권리와 법인의 책임이라는 ‘권리와 의무의 이원화’와 ‘둘 사이의 불균형’ 문제는 국가·지자체와 같은 공공법인 영역으로 가면 더한다. 일단 선출직은 임기가 있다. 임기 동안 국가의 이름으로, 지자체의 이름으로 권리는 모두 ‘개인’에 의해 적극적으로 행사된다. 그리고 임기 동안, 임기 후 발생하는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말로만 수행되거나 임기가 끝났으니 책임질 입장이 아니다이다. 물론 이때도 ‘배임’이나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 의무’를 따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천문학적 예산의 잘못된 사용은 이미 참담한 현실이 되어 있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오리무중이다.

장관들은 정책을 집행할 때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완전한 책임은 사실 원상복구다. 물론 원상복구가 된다 할지라도 시간 차이에 대한 책임까지 완벽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엄격한 의미에서의 책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책임질 일이 발생하면 그때 이미 상황은 어그러진 상태다. 아무리 책임에 완벽을 기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든지 이미 차질은 발생하고 만 상태이다. 그런데 장관들이 말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장관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잘못 쓰인 예산을 개인 자신이 배상하거나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장관 자리를 물러나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장관으로서의 권리 행사를 중단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이고, 천문학적 예산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고, 사람의 귀한 생명이 져버린 상태이다. 장관 자리 하나가 그 막중한 과오들과 같은 무게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천하에 비교할 수 없는 오만이고 오산이다. 장관이 책임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려면 잘못될 경우 원상복구를 반드시 하겠다는 각오로 또는 최소한 그 정도의 확신으로 정책을 집행해야 되고, 아울러 개인적으로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까지 서 있어야 된다.

장관이라는 자리는 국가와 국민의 후생을 위한 막중한 자리다. 개인이 아닌 국가라는 법인의 입장에 100% 부합하겠다는 성실성과 진실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장관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인한 정책의 실패가 미치는 악영향이 너무 크고 또 현실적으로 사실 회복 불능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지자체 선출직 업무집행자나 선출직의 대리인인 장관 등이 손쉽게 책임을 말하고, 또 일 터지고 난 뒤에는 책임이 실종되고 마는 현실은 다름 아닌 ‘책임’은 국가·지자체라는 형식상의 법인에게 돌리고 ‘권리’는 그 국가·지자체의 업무집행자가 현실에서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국가 차원의 재앙이고 국민 차원의 고통이다. 개인인 업무집행자와 법인 간의 ‘권리와 의무의 불균형’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권리의 소재와 의무의 소재가 현실에서 각각 따로 노는 권리·의무의 이원화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이상 지금의 부조리한 상황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주식회사와 같은 법인 제도를 없앤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 부재의 불편함 역시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주주의 제도 역시 그것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합의된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한 최선의 사회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수라고 해서, 최선의 제도라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다.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또는 어느 지자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교묘하게 자기의 이익을 꾀하고, 의무는 ‘주식회사’, ‘국가’ 또는 ‘지자체’의 이름으로 돌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물론 그 행위자의 위치가 개인 차원이 아닌 주식회사, 국가, 지자체 차원인 만큼 그 피해는 그 차원의 크기만큼 막대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러한 ‘법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 존재의 필요성과 정당성은 항상 의심되고 질문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선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필요’가 ‘필요충분’이 되고, ‘최선의 사회제도’가 형식 또는 수사가 아닌 실질적으로도 ‘최선의 사회제도’가 될 수 있다.

권리와 의무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무게는 항상 동등해야 한다.

* 출처: 신동기 著 『회사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깨는 인문학적 생각들』(2016, 티핑포인트 刊) p23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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