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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생생톡톡] 몰입의 모든 것_240107(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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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살짝 모이고 있으면요 은근히 이제 참나 쪽으로 정신이 계속 밝아지고 초연해지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모드만 바꿔 놓는 거예요. 이쪽으로 안 가게만 살짝. 그러니까 이리 가면 틀어놓는 거예요. 탐진치로만 너무 빠져들면 살짝 참나 쪽으로 향하게 해 놓지 막 꼭 4단계까지 가라고 하지 마시고 살짝 틀어만 놓는 거죠. 항상 참나 쪽을 지향하게만 해놓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게임 잘하려면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참나 알아차리면 게임이 안 돼요.” 그럼 그 말도 맞아요. 그러면 욕망의 몰입에 빠져서 하세요. 다만 제가 얘기한 거는 게임하면서도 깨어 있는 걸 말하는 겁니다. 게임하면서도 그 몰입의 기쁨을 느끼고 싶으면 이렇게 하시라는 거지 “나는 그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합니다. 게임 레벨을 올려야 되는데 지금 게임에 다른 거 뭐 나를 찾고 뭐 이런 거 관심 없습니다.” 하면 하시면 되고. 제가 얘기한 거는 욕망의 몰입이 아니라 참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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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을 하고 싶으시면 계속 지금 나 자신을 알아차리시라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기존 몰입에다가 그것만 추가하시라. 대상에 몰입할 때조차도 나 자신을 자꾸 알아차려 보시라, 동시에. 그래야만 사실은 그게 참나의 몰입이 되지 안 그러면 욕망이 끌고 가는 몰입이에요. 욕망을 이루려는 데 몰입이 동원된 거죠. 참나가 욕망을 이루려는 데 동원된 거예요. 목표는 그걸 이루어야 된다는 그 조급한 갈급함이 나를 끌고 가는 거거든요. 이거 없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그 긴장감 속에서 몰입이 돼 가지고 막 몰입하다 보니까 막 막 신바람도 나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게 뭘 위해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가? 마음을 보면 욕망의 성취 때문에 움직이고 있다면 욕망의 몰입이죠. 그럼 그 기간만큼은 참나를 좀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때는 참나를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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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조차도 그 일을 이루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죠. 탐진치를 성취하는 데는 욕망의 선정이 더 도움이 되겠죠. 아니 그 욕망의 몰입이 더 도움이 되겠죠. 내가 깨어나려고 하는 데는 참나의 몰입이 좋겠지만.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내 뜻을 이루려 데는 욕망의 몰입이 도움이 되겠죠. 아버지 뜻을 이루는 데는 참나의 몰입이 좋겠죠. 그런데 “제가 왜 몰입을, 제가 몰입했는데 왜 슈퍼의식이 됐다는데 저는 양심이 안 나올까요?” 욕망의 몰입을 하고 있어서죠.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죠. 그런데 양심 각성에 많이 관심이 있으시다면 참나의 몰입을 해보세요. 대상에 몰입했을 때조차도 내 정신을 계속 알아차리는 거를 51% 이상 하면서 몰입해 보세요. 그러면 어떤 대상에 대한 몰입이든지 오히려 다 내 참나를 배양해 주고 끝나요. 그래서 예전에 정명도 같은 그 선생은 붓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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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요. 붓글씨를 잘 쓰려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붓글씨를 쓸 때 자기 마음을 가다듬는 거예요. 이 붓글씨를 대하고 쓰고 대하고 할 때 흔들리는 내 마음을 계속 가라앉히고 탐진치 진정시키는 걸 목표로 붓글씨를 쓰는 거예요. 그럼 뭐 글씨 자체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죠. 그런데 오히려 신필 이런 사람들은 “무아지경에서 써야 된다” 이럴 수 있죠. 그런데 이제 그 지경이 에고를 초월한 무아지경이면 이것도 뭐 둘은 아닌데 뭔가 이 참나마저도 잊고 했다면 욕망의 몰입이 됐죠. 욕망의 몰입도 탐진치의 어떤 나름의 극치이기 때문에 그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신통 부리고 싶다면 욕망하라.” 막 이러면 그건 욕망의 몰입이에요. 욕망하고 원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라. 그러면 어떤 신통을 끌어내려면 욕망에 몰입을 해야 된다는 얘기예요. 그렇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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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용도는 있다는 거예요. 그 몰입의 대상에 푹 빠져서 끌고 가는 거는 용도는 있다는 거예요. 다만 그렇게 대상에 대한 욕망의 몰입에 빠져 있을 때는 양심이 덜 올라온다. 단 그 몰입의 어떤 맛은 취한다. 몰입이 주는 장점은 취하되 참나의 뜻은 따르지 않겠다. 봉인해서 참나의 뜻을 일부 봉인해 가지고 쓰는 거예요. 내가 필요한 것만, 신통을 얻는 데 도움 되는 면만 취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욕망의 몰입은. 그런데 욕망의 몰입은 뭐가 문제냐면 이렇게 가다 보면 매몰돼 가지고 몰입 상태가 끊기기가 쉽다. 어차피 그런 몰입을 하더라도 수시로 주의환기 해 주지 않으면, 정신을 다시 모으지 않으면 사실은 그 욕망에 대한 몰입은 탐진치가 치성해지는 쪽으로 달려가기 쉽거든요. 이렇게 정리가 되시죠. 욕망에 대한 몰입도 용도는 있다. 다만 여기는 매몰되기가 쉽다. 욕망에 끌려가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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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 대한 몰입, 욕망에 대한 몰입을 하더라도 만약에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 지금 현존하는 이 느낌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거기서 또 그대로 참나에 대한 몰입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이거는 순수하게 나에 대한 몰입하고 달라요. 대상에 몰입을 하는데 대상보다 나 자신을 더 신경 쓰는. 지금 이 이론이 그대로 어디 적용되면 재밌냐 하면요 화두에 이걸 적용해야 재밌어요. 뭐가 재밌냐면? 지금 많은 분들이 화두선 할 때 화두에 몰입하라고 자꾸 해요. 이거는 탐진치로 가는 욕망의 몰입이 돼요. 그래서 문제가 있어요. 왜냐하면 원래 올바른 화두선 요령은요 예전 거기 고전에 보면 “화두를 잡아서 나를 보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화두에 몰입하는 나 자신의 정신을 체크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화두에만 빠져들으라고 하고 내 정신 체크를 안 가르쳐 주면 스트레스만 받다 끝나거나 아니면 매몰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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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수 있어요, 화두에. 그러니까 화두를 잡아서 나를 봐야 돼요, 제가 늘 얘기하듯이. 그럼 염불을 하면 염불하는 나를 알아차리고. 염불하다 보면 염불하는 내가 알아차려져야 돼요. 화두에 몰입이 잘 이루어지면 화두에 몰입하는 나 자신, 나의 현존이 알아차려져야 돼요. 왜냐? 그게 드러난 만큼 살아 있는 기분이 들고 시공이 초월되고 신나거든요. 그런데 요게 안 드러나고 몰입해 있다는 거는 그거는 이제 매몰로 가기 쉬운 상태죠. 뭔가 몰입의 효과가 있다 치더라도 이건 욕망에 대한 몰입이 되고, 탐진치에 대한 몰입이다. 그 몰입 책 식으로 말하면 몰입이 계속 이루어지는지를 체크하라는 거죠. 신바람이 계속 나고 있는지 체크하라. 몰입의 대상에 빠져서 신바람 체크가 안 되면 금방 매몰로 빠져든다. 일시적으로 신바람 났더라도, 몰입이 이루어졌더라도, 몰입 4단계까지 갔더라도 대상에 빠져든다는 건 탐진치에 빠져든다는 거기 때문에 이게 금방 탐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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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들어 가지고 매몰되거나 스트레스 상태로 가기 쉽죠. 그러니까 그때 몰라 한 방 괜찮아 한 방 해가지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신선한 마음으로 다시 몰입. 이러면 몰입을 통해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붓글씨를 잘 쓰려는 몰입과 붓글씨를 통해 내 마음을 다스리려는 몰입이 다 가능하다. 둘 다 대상에 대한 몰입인데 다르다. 목적이 다르다. 이쪽은 인의예지를 끌어내려는 몰입이라면, 저쪽은 신통한 붓글씨를 써보려는 몰입, 남들이 못 쓰는 신필을 얻어 보려는 욕심이죠. 욕심에 몰입한 거는 이렇게 다르죠. 아니 은행을 훔치려면 얼마나 몰입해야겠어요? 정신을 차리고 몰입. 그 극도의 긴장감을 이겨내면서 승화시켜야 돼요. 아마 그 은행 털어도 그럴걸요? “진짜 하늘이 도왔다. 그 순간순간 느낌이 딱 이상해서 막 피했더니 CCTV가 마침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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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러 기적이 안 일어나면 뭐 하나 일이 안 일어나요. 진짜 하늘이 도와야 일어나요. 그러니까 보면 범죄자들도요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할 거예요. 자기가 성공시킬 때까지 정말 힘들었기 때문에 이걸 하늘이 도왔다. 때마침 뭐 시절 인연이 막 타이밍 좋게. 그러면요 몰입해 가지고 모든 나한테 주어진 자원을 다 끌어다 써서 물 흐르듯이 해가지고 이 결과물을 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그것도 몰입이잖아요. 그럼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다. 몰입이 잘돼서 슈퍼의식이 각성됐다면 찜찜해서 멈췄어야 되는데 안 멈추고 달렸잖아요. 그러면 이건 욕망이 51% 이상이었다는 거죠, 분명히. 하지만 몰입 기운은 갖고 갔다는 거죠. 하지만 양심은 안 따랐다는 거죠. 요렇게 분석이 되죠. 이 대상의 몰입을 통해 내 양심을 드러내려는 몰입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들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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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숨 호흡도 호흡해주면 정신이 깨어나면서 더 자명해고 더 양심적이 되니까 하는 거죠. 그런데 욕심꾼들도 몰입해서 호흡을 잘해요. 그건 욕망의 몰입을 하는 거죠. 호흡은 막 잘 늘리고 하는데 전혀 양심적인 계발은 안 일어날 수도 있어요. 이것도 가능하겠죠, 이 이론으로는. 몰입, 몰입을 잘하는 사람. 다들 난가? 막 이러던데. 그것도 나름 방편이다. 부처님도 권하신 방편이다.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 하는. 신통을 이루려면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 필요하거든요. 원해야 그게 일어나죠. 그런데 저 같으면 그때 그 51%는 아니더라도 그러면 최소한 참나를 계속 은근히 알아차리시라. 그러면 그 힘으로 또 참나에 맞게 그것마저도 활용할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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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욕망에 대한 몰입마저도 보살도의 재료로 쓸 수 있을 거 아니냐 이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냥 그 일할 때는 딴 거 신경 못 써. 나는 그 욕망에만 올인할 거야!” 해서 일을 이뤄낸 다음에 그걸 보살도 재료로 쓸 수도 있다는 거죠. 자기가 자기 정신의 주인이에요. [질문] “태식하고 엉뚱한 길로 간 사람들은 그게 안 돼서..?” 그렇죠. 태식할 정도면 몰입 잘하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자기 욕망에 대한 몰입, 자기 세계에만 빠진 몰입을 하고 있었던 거죠. 남하고 소통하고 하늘하고 소통하는 몰입은 못했던 거죠. 그러니까 내 뜻을 구현하는 몰입만 했지 하늘의 뜻을 구현하는 몰입은 안 해본 거죠. 이런 경우도 가능하다는 걸 우리가 알아야 돼요. 우리 업력이 다양하니까 이렇게도 가능하다. 그걸 불교에서 욕계정(欲界定)이라 그래요. 욕망의 선정. 그러면 저 다크포스로 가겠죠. 거긴 탐진치를 이용하잖아요. 그러니까 스타워즈가 재밌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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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포스 제자를 키우려면 극도의 상황에 몰아넣어서 탐진치를 극대화 시켜요. 탐욕, 분노, 막 그 한을 이용해서 그 에너지를 가지고 몰입을 키워가지고 키워내는 거죠. 다크사이드. 그걸로 또 만약에 많이 이뤄내신 분은 더 못 놓지 않을까요? “난 이렇게만 하면 다 이룰 수 있어.” 그러니까 이런 분들이 이 공부를 더 안 하기가 쉬워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그렇죠. 자기는 신통까지 끌어다 쓴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한편으로 뭐라고 생각하냐면 신이 나만 사랑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런 분들이 지금 다 이렇게 유튜브를 장악하고 있을 거예요. 성공자들. 원하는 거 다 있어요, 유튜브에. 여자 원해? 여자 사귀는 법 유튜브에 있어요. 돈 원해? 돈 버는 법. 그러니까 다 원하는 거 다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보살되는 법을 올리잖아요. 우리만의 차별성이 이겁니다. 걔네도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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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몰입을 얘기하고 같은 정신 차림을 얘기한다. 그런데 정신 차리는 동기가 다르고, 몰입하는 동기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다크사이드 계열의 그런 시스에 대항해서 제다이라면 달라야 된다. 양심 제다이는 빛의 검을 휘둘러야 되기 때문에 탐진치의 검이 아니라 다른 몰입을 하고 있다. 차이를 오늘 좀 분명히 해보죠. 대상의 몰입과 나에 대한 몰입인데 나에 대한 몰입은 무조건 참나각성 이거든요. 이거는 문제가 없고. 대상에 대한 몰입의 경우 둘로 나누자. 욕망의 몰입과 참나의 몰입으로 나누자. 참나의 뜻을 이루어주는 참나의 몰입과 에고의 뜻을 이루어주는 욕망의 몰입 둘로 나누자. 요거죠. 그래서 욕망에 대한 몰입은 대상, 즉 탐진치에 대한 몰입이 51% 이상이다. 참나에 대한 몰입은 대상에 대한 몰입을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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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조차도 참나에 대한 몰입이 51% 이상이다. 이렇게 분간하면 되겠죠. 그럼 이쪽(참나쪽) 기본값이 더 작동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럼 인의예지가 육바라밀이 나를 더 끌고 가죠. 대상에 대한 몰입이 더 세면 탐진치가 나를 끌고 가겠죠. 그러면 금방 매몰되거나 산란해지기 쉽겠죠. 자 도식. 몰입 두 가지. ①대상에 대한 몰입. ②참나에 대한 몰입. 대상에 대한 몰입 두 가지. ①욕망에 몰입. ②참나에 몰입. 욕망의 몰입은 어떻게 된다고요? 매몰되거나 산란해진다. 됐죠. 내 욕망에 대한 몰입인지 참나에 대한 몰입인지 알려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참나에 대한 몰입이면요 ①초연함 ②자명함 ③초긍정 ④따뜻함 ⑤유연함 ⑥충만함이 흐르고요. 욕망에 대한 몰입은요 결핍감 흐르게 돼 있어요. 결핍감, 부족하니까 결핍감. 그죠. 탐진치의 마음 기본값이 작동하거든요. 계속 중독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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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더. 이게 결핍감이잖아요. 더 더 더. 내가 몰입은 잘 되고 있는 거 같고 신바람도 나는 거 같은데 더 더 더. 막 드라마 너무 재밌어서 몰입됐는데 더 더 더 끊을 수가 없고. 그럼 이게 드라마 삼매 같은데 약간 이상한 삼매다. 이게 욕계삼매라서 그래요. 욕계삼매라서 그렇습니다. 이것도 삼매예요, 일종에. 그런데 사람이 왜 이 삼매를 즐기냐? 미쳐야 재밌어요. 인생은 뭔가에 중독이 안 되고 몰입이 안 되면 재미없어요. 그런데 몰입 됐다는 거는 이게 도파민 중독이죠, 사실은. 그러니까 보세요. 이게 이 부분도 또 설명하면 좋은 게요. 욕망에 대한 몰입에 빠졌다가도 참나가 51% 이상이 돼 버릴 때가 있겠죠. 그때 그런 환희감에 빠져들죠. 그럼 신성과 그때는 합일 돼요. 그러니까 욕망에 대한 몰입도 꼭 욕망에 대한 몰입만 계속되는 건 아니에요. 바뀌는 거죠. 그랬다가 욕망이 더 강해지면서 돌아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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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함이 사라져가고 내 욕망의 성취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거죠.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몰입일 때는 계속 이 부분만 조절해 주면 재밌겠죠. 욕망도 이루고 참나도 이루는 이것도 가능하겠죠. 수시로 그러니까 참나를 자꾸자꾸 의식해주면 욕망도 이루면서도 참나도 안 놓치는 몰입도 가능하기도 합니다. 신성도 챙기면서 욕망도 구현하는 거. 그게 좋죠.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봐야 돼요. 깨어 있다는 건. 그렇죠. 그러니까 제가 “수시로 정신 차리라”는 게 차릴 때마다 그럼 신성이 강해지겠죠. 그럼 신성이 계속 욕망을 또 중화시키겠죠. 그리고 또 욕망에 빠져들었다가 또 신성 일깨우고 다시 욕망이... 이게 계속 콜라보가 이루어지는 거죠. 이 결과는 스펙트럼이 다양할 것 같은데 어떤 이런 콜라보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만약에 보살도 필요할 때는 욕망의 선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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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겠죠. 이렇게 하셔야 돼요. 욕망에 대한 물입을 그냥 멀리 하시면 안 되는 게, 이게 방편입니다. 현상계에서 뭘 이루려면요 욕망을, 탐진치를 써야 되잖아요. 저는 탐진치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욕망에 대한 몰입도 필요할 때는 써야 된다. 내가 당장 인류를 살리려면 저걸 해야 되면요 더 더 더 하면서 달려가서 이뤄내야 될 때도 있다는 거예요. 여유롭게 막 참나 알아차려 가면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니 자식 먹여 살려야 되는데 지금 내가 내 참나 생각할 때가 아니다.” 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게 지금 너무 시급한 거 같고 꼭 필요하다면, 그러니까 필요할 때는 욕망에 대한 몰입도 활용하시라. 그리고 아까 얘기했지만 욕망에 대한 몰입이나 이런, 필요할 때는 매몰된 상태마저도 에고의 절전 상태로 활용하시라. 적당한 스트레스도 우리 에고를 또 긴장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것도 활용한다는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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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하시라. 매몰과 스트레스마저, 산란마저도 활용하셔야 된다. 그거 가지고 스트레스 받지는 마시라. 2차 가해는 하지 마시라, 자기한테. 이렇게 하면 됐죠. 참나에 대한 몰입도 소승과 대승의 차이? 마하리쉬도 참나에 몰입하고 보살도 참나에 몰입하는데 소승과 대승의 차이? 그런데 참나에 대한 몰입은 똑같아요. 왜냐하면 거기는 에고가 힘쓸 영역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업의 차이. 나에 대한 몰입의 차이가 아니라 업의 차이. 그러니까 업이 안 깔려 있는 거예요. 육바라밀 업이 안 깔려 있으니까 참나에 대한 몰입을 했을 때 육바라밀이 안 나와요. 참나에서는 하라고 하는데 내 업이 그걸 수용을 안 하는 거예요. 내 안에 카르마가 안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육바라밀, 보시바라밀 인욕바라밀에 반응할 나의 그 회로가 안 깔려 있는 거예요, 마음의 회로가. 이걸 깔아놓고 나에 대한 몰입에 들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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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보살은 뭐가 다르냐면 나에 대한 몰입 들어가기 전에 작업이 달라요. 적극적으로 자량위(資糧位)라고 육바라밀의 밑천을 쌓아 놓으라는 이유가? 쌓아놓고 빵 터뜨리라는 거예요, 불경들이. 자량위 다음에 견도위(見道位)가 나오는 게요 육바라밀의 그 업을 지어놓고 견성을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육바라밀의 길을 이미 뚫어놓은 대로, 왜냐하면 견성했다는 거는 물이 터져 나오는 건데 이미 길을 내 놓은 대로 가요. 길이 안 나 있으면 물이 가운데 고여 있겠죠. 그런데 길이 나 있으니까 촤악 육바라밀 길로 여섯 줄기로 물이 힘차게 나가겠죠. 나에 대한 몰입이라는 거는 물을 펌프질하는 건데, 어떻게 보면 성령의 그런 영적인 기운을 솟구치게 하는 건데 내 업이 안 깔려 있으면 못 받아먹는다. 나에 대한 몰입에서는 사실은 에고가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참나와 합일돼서 에고는 녹아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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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그 점에서 차이가 있는 건 아니고. 그게 차이가 있는 거예요. 그 효과가 차이가 있는 거예요. “나에 대한 몰입 상태에서 누구는 육바라밀이 나오고 왜 누구는 안 나오냐?”라고 한다면 그 차이죠. 업이 안 깔려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같으면 깨어있는 마음 상태에서 계속해서 업을 깔아야 된다. 깨어 있는 마음에다가.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나라도 더 지적인 탐구를 해야 되고, 6바라밀을 실천해서 계속이 깨어 있는 마음으로 계속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을 해야지 그 부분이 더 개발돼 가지고 깨어 있기만 해도 물줄기가 촥 흐르듯이 그쪽 방면으로, 지혜와 실천 방면으로 뭔가 이 참나의 뜻이 구현될 거고. 에고의 뜻도 이루어질 거고. 그게 안 돼 있으면 나에 대한 몰입만 들었을 때 착각할 수 있죠. 참나는 인의예지를 원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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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소승 성자들처럼. 6바라밀이 나오는 걸 막고 있는 거예요, 참나에서. 그러니까 대승은 만약에 나에 대한 몰입할 때는 육바라밀의 그 지혜와 능력을 참나에서부터 뽑아내고요, 대상에 대한 몰입할 때는 나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 알아차리면서, 대상에 대한 단순한 몰입이 아니라, 양심 구현을 거기서 해낼 수가 있죠.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 보세요. ①나에 대한 몰입을 통해 육바라밀의 역량을 함양하고, ②대상에 대한 몰입을 통해 육바라밀 역량을 펼치겠죠. 그 대상에가 드러내겠죠. 이게 우리가 말하는 기본, 경이죠. 경(敬)! 깨어있음. 올바른 몰입. 보살의 몰입. 가만히 있을 때는 참나에 빨대 꽂아가지고 육바라밀 역량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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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하고. 움직일 때는 그 역량을 써 가지고 그 대상에다가 적용시키고. 그런데 단순히 대상에 몰입하라는 말이 같지만 다른 이유가 보살과 군자는 그 대상에 대해서 몰입하되 내 안에 있는 육바라밀을 꺼내서 쓰는 쪽으로 몰입을 한다면, 욕망에 몰입을 하는 사람은 그 세상을 통해 욕망을 성취하는 데만 몰입하고 있다는 거죠. 자기 욕망. 그게 다르다. 조선 선비도 그거밖에 없어요. 미발(未發) 때 나에 대한 몰입. 이발(理發) 때 어떤 대상에 몰입하되 욕심을 제압하고, 탐진치를 그 상황에서 나오는 걸 제압하고, 육바라밀로 상황을 해결하는 거. 그래서 선비들 글에 보면 지금 하는 일에 몰입하는 게 경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선비들이 그럼 이 말은 너무 심플하게 했는데 이 안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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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는 그 일에 단순히 몰입해서는 욕망에 빠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욕망의 몰입이 되지 않게, 지금 하는 일에 몰입하되 항상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는 자기 정신을 차려가지고 몰입함으로써 육바라밀을, 양심을, 사단을 구현해라. 이 말이 들어 있는 거죠. “지금 하는 일에 몰입하라”에 그 메시지까지 들어 있는 거죠. “양심을 각성시켜서 구현하라”는 말까지 있는 거죠. 그게 생략돼 있는 거죠. 만약에 부처님 같으면요 “지금 일어나는 6근을 알아차려라.” 그러면 그 정념(正念)이란 게 그 알아차림을 통해 삼학(三學)을 구현하라는 거거든요. 팔정도(八正道)를 구현하라는 정념이지, 그냥 몰입하라가 아니거든요.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몰입을 통해 팔정도, 육바라밀, 사단(四端)을 구현하라는, 지금 하는 일을 알아차려라, 지금 하는 일에 몰입하라라는 몰입이라는 거죠. 단순한 대상에 대한 몰입 같지만 다르다. 예. 오늘 요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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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생생톡톡] 몰입의 모든 것_240107(22:56)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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