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이론에서,
색심불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플랑크 상수 h로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물질과 에너지와의 상대적인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에너지는 우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물질은, 입자의 집중 고정화한 것으로,
우주공간에서, 그 체적과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집중과 분산의 연생(緣生)은,
열이랑, 압력, 전자력, 그 외의 힘의 작용을 받아,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플랑크의 에너지 입자의 h가,
집중해서 고정화되고, 진동도 없어진 상태.
이것이 물질이겠죠.
요컨대. E = hν에 있어서 진동수가 0 이 되어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진동수 ν는 E/h = ν 가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입자의 수 그것이겠지요.
요컨대. 집중 고체화와 분산의 변화도,
에너지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고,
현상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육체와 마음으로 바꾸어 생각해보아도,
마음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능력으로, 육체는 물질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겠지요.
움직임을 나타내는 능력이 없어서는,
그것의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겠지요.
잠자고 있을 때에,
우리 마음의 움직임은 있는 것일까요.
의지를 가지고 육체적 행동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육체주는, 확실하게 심장을 중심으로 해서,
각 기관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 배가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차원을 넘어선 “공(空)”의 존재를 확인하며,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계의 존재로,
현상계와 차원을 넘어선 4차원 이후의 세계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색심불이(色心不二). 색불이공(色不二空).
이라고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색(色)과 마음(心)은 둘이 아니라고 하는 쪽과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말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공과 마음과는, 일체(一體)라는 것입니다.
그 “공(空)”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생각에 의한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허무한 것으로부터 물질의 존재가 태어날 리가 없고,
허무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육체주가 완성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물며,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다. 불가사의하다’
라고 현혹하고 마는 등으로 말하는 것은,
‘그런 점에 고마움이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불교는,
이미 말법의 모습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과연, 고대의 인도에 있어서,
붓타는 이와 같은 어려운 말로,
붓타-스트라를 설했을까요.
노예랑, 상공업자인 중생이 ,
현대 사람들처럼 교양이 있었을까요.
무학문맹의 사람들에게, 어려운 것을 말해봤자. 알 리가 없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지금에는, 배례하는 제목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만다라’라고 하는 대상물로......입니다.
그것은 붓다가 입적한 후
2,545 년의 현재(AD1072년)를 교체해서 생각해 봅시다.
2,545명의 사람들을 10m 간격으로 서게 하고,
붓타가 설파했던 법을, 구전으로 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도중의 사람이 써 두어도,
그 글 속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2,545명 째가 되면,
거의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타력(他力)만을 믿고 있는 사람은,
이것처럼, 가르침을 실제 체험해 보고 나서 부정하세요.
“ 수렁 속에서 피는 아름다운 연꽃,
그러나 물 밑은, 지저분한 수렁이다.
중생들이여, 그대들의 몸은 어떠한가.
눈은 눈곱, 코는 코딱지. 귀에서는 귀지,
입에서는 이 똥, 땀, 비듬, 대 소변,,,,
이것은 모두 육체주의 산물이다.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더러워진 육체주에 집착을 가지고,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더러워진 수렁과 같은 육체주라고 해도,
선장인 혼, 그 중심에 있는 마음이.
우주의 법을 깨달은 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름다운 연꽃처럼,,,
둥글고, 넓고 풍부한 마음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안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붓다가,
자애(慈愛)의 눈빛으로 도(道)를 설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나라 쥬르나(AD 2 세기)는,
바라몬종으로 태어난 후,
구전되어 왔던 불교를 모으고, 5개로 분류했지만,
역시 자신이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붓타의 시대에 나타났던 영적 현상을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요컨대. 학문적으로 체계를 정하는 것으로,
오히려 불교를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해 버렸다는 것으로서,
학문 불교에 의해,
행위가 동반하지 않게 되고,
앎(智)만이 발달해서,
마음을 잃은 불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행위를
그저 고행이라고 하는 육체 수행의 방향으로 가고 말아서,
본래 일상생활 속에 있어야 할
마음과 행위의 팔정도를 아주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주; 그 결과,,,
심지어는 팔정도는 어려운 것으로서,,
깨달은 후에야 가능하다고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수레의 앞과 뒤를 뒤바꾸는 것이며...
역으로 설명하면,,
부처님께서,
중생이 할 수 없는 것을 가르쳐준 결과가 되어버리는 ,,,
깨달으신 부처님의 수준을 무시?
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