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서점 다녀온 날
정경희
무료함이 느껴지는 어느 날 오후, 시내의 대형 서점에 들렀다. 여러 종류의 책들이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 여유롭게 매장을 둘러보는 사람들 틈에서 두꺼운 책 몇 권을 선택하였다. 카드 내밀며 결제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어려운 책 읽는 나는 꽤 멋진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옆에서 잡지 여러 권 들고 결제 순서 기다리는 젊은 남성이 눈에 뜨인다. 참으로 편안해 보인다.
집에 들어서며 무거운 책을 ‘퉁’ 내려놓는데 아들이 쳐다본다. 인터넷 구입하면 가격도 할인받을 수 있고, 편하게 책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것도 좋지만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무언가 기대하며 서점에 가는 길이 즐겁다. 이름 알려진 이들의 추천서 쓰인 책 고르며 나도 좀 수준 높게 살고 있다는 허영심이 발동한다. 대형서점의 포장용 종이가방 들고 지하철 탈 때는 왠지 뿌듯하다.
한글 깨치면서부터 독서의 중요성은 듣고 또 들었다. 학교 도서관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 책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웃동네 만화방에 가는 일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만화 보는 것을 어지간히 싫어하였다. 공부 안하는 농땡이라며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다. 따로 용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가게 문 열고 들어갈 용기는 더 더욱 없다.
가끔 옆집 사는 친구 따라 만화방에 갔다. 작은 만화책 한 권을 친구가 들고 책장을 넘긴다. 둘이 머리 맞대고 있는 우리 모습이 못마땅한 주인장은 잔뜩 인상을 쓴다. 그때 읽은 내용은 까마득하지만 만화방의 퀴퀴한 흙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다. 아이들이 드나들 때마다 유리 끼운 나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었다. 백열등 하나에 의지한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만화 보는 아이들 눈만이 빛을 내었다. 만화방 다녀오는 날은 괜히 눈치를 본다.
학교에서는 고전읽기가 권장되었고 선생님 말 잘 듣는 나는 열심히 고전을 읽었다. 숙제 때문에 책 읽고, 읽다보면 재미있어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가끔 삼촌이 사다준 소년소녀 잡지는 더 재미있다. 눈망울이 커다랗고 긴 머리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는 가슴 두근거리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서로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에게 으스대는 기분도 좋다.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잡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학교 도서관에 사서선생님이 있을 정도로 도서관이용이 활발하였다. 집집마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은 커다란 책장에 종류별 전집을 꽂아두었다. 할머니 집에 가면 삼촌이 사 놓은 수십 권의 문학전집, 한국사전집, 세계사전집은 내가 자발적으로 독서에 빠져들 수 있게 만들었다. 국어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예문으로 드는 작가와 제목은 막히는 법이 없었다. 국어시간이 더 재미있어졌다.
공부하느라 밤잠을 줄여야 될 시기인 어느 날이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연예소설 실린 잡지 한권이 아이들 사이에 왔다 갔다 한다. 수업시간에 책상 아래 숨기고 보다가 딱 걸렸다. 너무 유치한 내용에 선생님은 헛웃음을 웃는다. 수줍음 많은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 더 기 찬 모양이다. 수업시간에 몰래 위인전기 읽은 기억은 없다. 아무래도 잡지는 쉽게 볼 수 있고 흥미를 끄는 것이 확실하다.
직장 다니면서부터는 자기개발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 업무에 필요한 법전이나 규정집이 관심 분야가 되었고 나를 더 발전시켜야 하였다. 한동안 남편이 가지고 온 두꺼운 시사 월간지는 그나마 꼼꼼히 보았다. 재미나 흥미보다 직장생활 하려면 기본은 갖추어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감 때문이다. 하고 싶은 다른 것이 있는지, 어떤 소질이 있는지 살펴볼 여유 없이 살았다.
백수 된 지금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 수백 쪽의 두꺼운 것이라도 부담이 없다. 인류의 문명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 왔는지 등을 알려주는 책을 읽으며 감탄을 한다. 남편과 둘이 자동차 여행 할 때마다 책 내용을 설명하였다. 두서없이 말할 때가 많고, 책과 거리 먼 남편이 귀담아 듣는지 잘 모른다. 확실한 것은 또 으스대고 싶은 내 마음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며 두껍고 어려운 책을 숙제처럼 읽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친구와 만화방 간 것은 나에게 작은 일탈이었다. 대부분 선생님이 추천하는 고전을 읽었다. 삼촌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은 국어시간을 재미있게 했기에 더 재미를 느꼈다. 직장에서는 좀 더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자기 개발 서를 가까이 하였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는 변하고 싶다. 경쟁사회에서 남들보다 더 잘나고 싶은 욕심 내려놓으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아직은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못 끄면서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자체가 욕심일수 있다. 그래도 가끔은 멀리 바라보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유명인이 추천하는 책 읽고 은근히 자랑하고 만족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잡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시내의 대형서점에 다녀온 날, 많은 생각을 한다. 선생님의 가르침 따라, 남보다 잘나고 싶은 마음으로 숙제하듯 책 읽은 것은 아닌가 싶다. 고전이나 널리 알려진 두꺼운 책 보며 가슴 뿌듯함을 느꼈으니 말이다. 잡지 여러 권 사가는 젊은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확실할 것이다. 내가 좋아할 잡지는 어떤 분야의 책일까? 예순 살이 넘은 지금 사회의 거대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 (20250317)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