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표는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표는 ‘떠남’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매일 타고 다니는 콩나물시루 같던 통학버스의 차표도 있지만 차표는 새로운 곳을 간다는 낭만과 설렘 속의 아스라한 추억이 깃든 증표였다.
타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우는 완행버스의 차표는 차장 누나의 흘려 쓴 현장 발매가 있었으나 대부분 터미널에서 반달 모양의 유리사이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요즘은 여든의 나이에도 코레일 애플리케이션으로 기차표를 끊고, 손주들 생일이면 기프티콘 선물을 보내기도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다. 심지어는 스마트폰의 ‘페이’ 기능을 이용해 용돈을 보내기도 한다. “기차표는 역에 가서 줄을 서서 끊었지” 라며 스마트폰으로 발매하는 편리함에 혀를 내두르며 나날이 변하는 신기한 세상에 빠져서 산단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 밤을 새워가며 역 광장을 뱀 똬리 틀 듯 줄을 서서 기다리던 고향 가는 열차표 예매 행렬은 전설속의 추억담이 되고 말았다.
완행버스나 완행열차는 정원의 두세 배는 탑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많은 사람을 태우다 보니 주말이나 명절 때 고향 가는 버스나 기차는 아수라장의 진풍경을 연출했다.
짐 보따리만 창문 틈으로 밀어 넣었다가 차가 출발하여 하소연 하는 할머니 심지어는 열린 창문으로 곡예를 하듯 온 몸을 새우 등처럼 만들어 탑승하는 학생들이나 젊은 청년들도 있다. 버스가사는 정원의 두세 배를 태운 버스 실내를 독특한 운전요령으로 정리를 했다. 속력을 높여서 달리다가 커브 길에서 갑자가 브레이크를 잡아 탑승객이 짐짝 떠밀리듯 하며 안쪽부터 정리가 되어졌다.
운전이 난폭하다보니 차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싣고 가던 짐짝이 터져 견디기 어려운 역겨운 냄새가 고개 돌리 틈도 없는 버스 안을 초토화시키기 일쑤였다. 점입가경은 차를 타는 일이 가끔이어서 멀미를 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차표 한장 손에 들고 떠나야 하는 낭만적이고 추억이 묻어나는 이별 여행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는 더욱 아니다. 인적이 끊어진 종착역에서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랑의 연가는 더더욱 아니다.
차표는 우리의 삶이며 생활이 되었다. 안동에서 자치를 하며 생활 하던 고등학교 시절 주말이면 어김없이 고향집을 가야만 했다. 일주일 동안 먹을 쌀이며 반찬을 가지러 갔다. 자전거를 타기 어려운 날씨이거나 이불 등 가지고 와야 할 짐이 많은 날에는 버스터미널까지 2km를 걸어서 버스표를 예매해서 버스를 탔다. 버스표라고 해야 완행버스는 단지 탑승권이지 지정 좌석이 없었다.
요행히 줄을 서서 기다려 좌석에 앉았더라도 언감생심 좌석에 앉아 집에 까지 가기란 여 간 운수 좋은 날이 아니고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급히 먹은 점심 때문인지 속이 불편했다. 괜찮아 지겠거니 스스로 위안하면서 요행으로 좌석에 앉아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짐을 머리에 이고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차에 올랐다. 차창밖에 이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 밖을 내다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시장판 같이 떠들어 대는 탑승객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잠을 자는척 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결국은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다. 당시 안동지방에서 학생이 교복을 입고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더욱 양보 할 수밖에 없는 일은 새하얀 교복 상의에 까만 치마를 정갈하게 입은 여학생이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런데 운명의 장난을 논하기에는 이른 너무나 큰 사건이 벌어 졌다.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 했다. 버스가사는 늘 하던 대로 탑승객 정리를 시작했다. 꼬부랑길을 몇 차례 휘어 치자 장내는 정리 되었으나 그렇잖아도 거북하던 속은 완전히 뒤집어 지고 말았다. 하늘이 빙빙 도는 가운데 넘어질 듯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그러나 문제의 여학생 때문에 참았던 인내심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시절엔 비닐봉지도 흔한 시절이 아니었다. 오로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속에 든 것을 비워야만 했다. 자리를 양보한 할머니에게 “할머니!”라고 외치기도 전에 간신히 차창을 열고 속을 비웠다. 왜 하필이면 그 여학생이 보는 앞에서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더욱 낭패스런 일은 차창으로 가기 전 옆에 있던 여학생에게 오물이 튀고 말았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 되고 말았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수줍은 듯 아리땁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얀 광목 상의 이름표 위에 세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던 모습이 눈에 아련하다. 얼마나 창피 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 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그날 이후 졸업 때 까지 그 시간대 버스는 절대 타지 않았다. 왜냐 그 여학생을 먼날까 두려웠다. 같이 탔던 친구가 들에 다녀오는 어머니를 만나 초죽음이 된 나의 모습을 전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크는 나이에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날 저녁 밥상에 아끼던 씨암탉 다리가 내 손에 들려 졌다. 다가오는 주말엔 노란 물감보다 더 곱게 물들던 그 시절 그 신작로 길을 차표 한 장 끊어서 가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