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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번째 금강경 23장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說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 단어공부
善法 ~ 도리에 맞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방법
思量惡法하면 化爲地獄하고 思量善法하면 化爲天堂이니라.
시기와 장소에 꼭 맞는 법, 상황에 꼭 맞는 법
시기 장소와 상황이 각각 다르니 이것이 법이다 라고 할 수 있는가
無有定法, 분별 이전에서 마음을 내야 꼭 맞는 법이 된다.
* 해설
평등 하려면 어떠하여야 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인가 가지고 있으면 평등하기 어렵습니다.
크고 작음이 있으면 평등이 아니요 높고 낮음이 있으면 평등이 아닙니다.
상대의 세계 분별의 세계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텅 빈 세계라야 평등할 수 있습니다.
공의 세계는 나와 남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습니다.
이 세계가 본래자리입니다.
본래는 빈 것이며 같은 자리인데
이 자리를 보고(觀空) 이 자리를 기르고(養空 ) 이 자리를 행하면(行空)
이것이 선법이요 대원정각입니다.
어떻게 보아야 공인가 생각해 봅니다.
왜 공이라고 하는가 왜 공이 되는가 연구를 하여야 공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을 어떻게 기르는가 생각해 봅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여러 가지 때들이 뭍습니다. 자리를 잡습니다.
비우고 닦아야 합니다.
공을 어떻게 사용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이 없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가 봅니다.
자기의 자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는 않는가 봅니다.
진리의 작용이 보이면 공을 행함이 됩니다.
선도 악도 진리의 나타난 면입니다.
어찌 그리 되었는가를 알면 이해하게 되고
모두가 의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자리는 선악도 없고 고락도 없습니다.
없는 그 자리가 공의 세계입니다.
平等하야 無有高下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무엇이 평등하다는 말인가?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無上正遍智, 無上正等覺으로 한역
無上正等正覺, 無上正等菩提
아뇩다라(阿耨多羅)’ 진나라 말로는 ‘무상선법(無上善法)’이라고 한다.
삼먁’은 진나라 말로 ‘진실(眞實)’이라는 말
靈 - 法身, 一圓, 佛, 性
無上, 眞實 - 꾸미는 말,
원기 109년 6월 18일
제목 : 좋은 글을 읽다가
노경만
어저께 우연히 카톡으로 받은 글을 읽는데 감동으로 다가오는 좋은 내용이 나의 전신을 훈훈하게 데워주며 기쁨과 감동의 눈물이 났다. 이러한 내용은 널리 알리면 많은 이들의 가슴에 善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어느 중국집 배달 소년이 비가 오는 날 주문받은 식사를 오토바이에 싣고 가다가 그만 빗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났다. 다친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절룩이며 일어나 이리저리 흩어진 음식들을 모았다. 랩을 씌워 놓아 쏟아지진 않았어도 엉망으로 뒤섞여서 차마 배달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일단 식사를 기다리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싣고 달렸다. 한참 늦었지만, 초인종을 누르고 꾸중 들을 각오하며 서 있는데 아버지이신 듯한 분이 나오시더니, 아무 말 않고 위아래로 훑어보시더니 비 오는 날 주문하여 불편했지? 다친 곳 없나 아프겠다 하시는 따뜻한 말씀에 눈물이 나고 한 시간 이상이나 늦었지만, 꾸중은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식대와 다친 곳 약 사 발라라고 치료비까지 주시는데 한사코 거부해도 괜찮다며 주셔서 아! 아직도 살아갈 만한 세상이구나 생각하며 감동에 젖었는데 이 내용을 그분의 아드님이 SNS에 올려서 알려졌다. 뒤에서 조용히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노라니 꼭 이렇게 저렇게 생의 지침을 알려주지 않으셔도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게 바로 저절로 스며드는 인성교육. 산 교육임을 느꼈습니다. 훌륭하신 나의 아버지 감사드리고 존경합니다~ 라고.
읽는 내내 참으로 부러웠고 읽은 저도 나 혼자만 알지 말고 주변에 많이 보내서 훈훈함을 함께 하여 밝고 맑은 사회 만들기에 조금이라도 발자취를 내어보려고 마음 일기에 대신합니다
교무의 이견
참 좋은 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세정은 알아주지 아니하고 자기 입장에서 말들을 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물건이 젖고 길은 미끄러워 배달이 참 어렵습니다. 특히 배달하는 사람들은 아르바이트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습니다. 주인이나 손님들은 빨리 배달이 안 된다고 아우성칩니다. 따라서 배달하는 사람은 급히 서두를 수밖에 없고 특히 빗길에서는 미끄러져 오토바이가 넘어지기도 하고 접촉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이런 세정을 안다면 배달원에게 고마워 해야 할 일입니다.
혹시나 사고로 오토바이가 넘어지면 음식이 쏟아지고 양쪽에서 야단을 맞을 뿐만 아니라 길에 흩어진 음식을 처리하는 일은 엄청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그냥 가면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치우려니 도구도 없고 아주 난처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다행히 랩이 씌워있어서 쏟아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오토바이는 위험합니다. 넘어지면 다치기 쉽습니다. 음식은 엉망이 되고 몸은 여기저기 다치고 그 중에도 주인은 뭐라 할 것이고 손님은 왜 발리 안 오느냐고 탓을 할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음식을 시킨 손님 앞에 서는 것은 정말 싫은 일입니다.
여기에서 손님이 음식에 대해 타박을 하기보다는 비 오는 날 배달을 시켜 미안하다고 하고 치료비까지 챙겨주는 것은 진짜 드문 일입니다. 배달원은 얼마나 감동을 하였겠습니까.
대종사님께서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 하였습니다. 한 가족이라면 음식보다는 얼마나 다쳤느냐고 묻는 것이 먼저인데 우리는 한 가족임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서로 세정을 살피고 배려하며 따뜻한 정이 흐르는 사회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배려가 있는 곳이 낙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원기 109년 6월 17일
제목 : 차가 달리는 초록 신호를 보며
시계를 보니 문화원 요가수업에 참석하려면 지금 집에서 나가야 한다. 그리곤 수업시간엔 거울 앞자리를 잡아야 한다. 요즘은 뒷자리 이쁜이가 거울 앞자리를 탐한다. 오늘도 거울 앞자리를 고수하고 싶다. 서방님 커피까지 서비스하고 *운동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달리다시피 바쁜 걸음으로 건널목까지 왔다.
신호를 보니 초록색이 눈에 들어왔다. 차들이 서야 하는데 계속 달린다. 나는 손을 들고 차들을 서라고 제지했다. 나의 행동을 무시하고 차들은 달렸다. 초록 불에 서지 않고 이차들이 왜 이러지. 건널목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 주위를 보니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몇 분이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앞 신호대를 보니 빨강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본 신호대를 보니 그것은 자동차신호대였다. 그래서 당연히 차가 달린 것이다. 평소 때도 건너다니며 신호대를 보았는데 오늘은 내 마음이 바쁘니깐 초록색 만이 내 눈에 들어와 있었다.
자동차의 신호 초록색에 내가 건너겠다고 행동한 이 몸은 누구란 말인가?
거울 앞자리를 탐하여 빨리 건너가려고 한 나. 부처 되려고 마음공부를 하는 내가 이생에서 부처도 되기 전에 갈 뻔했다.
순간순간을 챙기며 살아가자. 부처는 누구이며 중생은 누구런가 성가를 떠올려 본다.
교무의 의견
요가수업이 있는 날은 서둘러야 하네요. 특히 거울 앞에서 포즈를 보며 멋진 요가를 위해서는 자리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먼저 온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면 비껴달라고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식구들 돌보고 나오려면 일씩 나서기가 쉽지 않지요.
요가를 위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급히 서둘러 가는데 앞에 초록불이면 빨리 건너려는 마음이 앞서지요. 사거리에 보면 보행자 신호등도 있고 차 신호등도 있는데 급한 마음에 그 구별을 하지 않고 차량용 초록불에 가려 하셨네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쑥스럽기도 하고 숨고 싶은 마음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빨리 가야 한다는 마음에 집착이 돼 있습니다. 주착심이라고 합니다. 이 주착심이 있으니 영지에서 나오는 마음에 주착심이 색안경이 되어 신호를 혼동하게 되지요.
화재의 현장에서 보면 자기 집이 불탈 때 불이야 하고 소리치는데 소리가 나지 않고 119를 누르는데 손이 떨려 잘 누르지 못합니다. 경계를 초월 된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경계 속에 묻혀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생을 살아가는 데는 육신의 건강이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이 아프면 마음도 따라서 약해지고 자신감이 떨어지며 불만이 많아지게 됩니다. 한순간의 잘못으로 사고 날 뻔하였네요. ‘급할수록 천천히’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서두르다 오히려 사고를 내고 일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삼학 공부를 시키는 뜻은 이런 경계에 어떻게 취사를 하여야 하나 단련을 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원기 109년 6월 18일
경계 : 남편의 짐 정리
여행 중 짐 정리는 내 몫이 되었다. 남편은 그냥 벗어놓으면 그만이다. 그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지니 한마디 한다. “좀 개켜 놓으면 안 될까?”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개켜 놓는다. 나는 거기에 또 생색을 내고 만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할 거야?”“자기처럼 못해서 그러지, 나도 혼자 여행 잘 다녀왔잖아?” 한다,
그렇지. 남편이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지. 그 안 함은 바로 나로 인함이고. 스스로 자초한 일을 상대에게로 그 탓을 돌리고 있는 나다. 맘에 안 들어도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면 되는 것을. 내 맘에 들게 하라고 간섭한 결과이다. 그런 나를 보게 되니 남편을 탓할 수 없네. 남편 또는 다른 이에게도 나의 불편한 부분, 못마땅한 부분이 분명 있을 테니까.
교무의 의견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은 하나의 기준이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저장이 되고 그 기준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문화, 관습)
남편이 여행 중에 짐 정리는 잘 안 하는군요. 짐 정리를 안 하면 찾을 때 시간이 걸리고 널브러지게 보이지요. 성격이 깔끔한 사람은 정돈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돈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기준이 다를 뿐입니다.
정리정돈을 안 하는 사람은 거기에 익숙해져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별 느낌 없이 살아갑니다. 물론 정리정돈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불편함이 작게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인과보응을 믿습니다. 원인행위에 결과가 있습니다. 정리를 안 했으면 그 대가를 받고 정리를 하면 그 대가를 받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인과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나의 의견은 말할지언정 탓할 일은 아닙니다. 내가 불편하면 내가 하면 되고 그렇지않으면 명령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부탁할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말이 감사와 부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탁하면서 명령을 하면 좀 어색할 것 같습니다.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자기가 노력을 하면 되고 필요하면 상대에게 부탁을 할 일입니다.
원기 109년 6월 18일
경계 : 절 밥
교도 훈련 가는 길, 통도사에서 비빔밥 점심 공양을 받게 되었다. 사전에 교무님으로부터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음을 고지받았지만, 부처님 오신 날 무료로 제공하는 맛있는 절밥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기에 그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빔밥 재료가 너무 부실하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인원을 상대하는 공양간이라지만 너무 푸대접이다. 무료급식 배급받는 기분이랄까? 함께 자리한 도반들과 이렇게 큰 절에서 너무 물질적인 이익에만 급급한 것은 아닌가? 부처님의 자비심과 같이 좀 넉넉한 인심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불평을 반찬 삼아 밥을 먹었다.
부처님 도량에서 주는 귀한 밥을 먹으면서 원망의 소리를 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교무님의 사전 고지 말씀이 걸렸지만 멈추지는 못했다.
한편 식사 중 내 눈에 들어온 벽에 걸린 문구가 있다. 부처님께 올린 공양물로 만든 음식이니 남기지 말라는 것과 음식을 남긴 그릇은 설거지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많은 대중 공양을 하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당연한 글귀이고 안내문이었지만 왠지 나는 너무 폭력적으로 느껴져 이 또한 마음이 상당히 불편하였다.
식당을 나오면서 돌아본다. 식사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그로부터 확장되어 느껴진 글귀에 대한 불편한 마음. 도대체 이런 마음들은 왜 일어난 걸까?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내 생각, 나의 기준을 들이대어 분별하고 판단함에서 일어났음이 알아진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니 지역적인 문화 차이가 있으니 우리의 기준과 그들의 기준이 다를 수도 있겠고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해진다. 그리고 글귀는 부처님께 올린 공양물로 만든 음식이니 더 소중히 여겨달라는 안내 글귀일 뿐인데 내가 거기에 나의 요란한 감정을 넣어버렸네. 똑같은 글귀가 경계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이게 바로 진공 모유의 조화인가? 식사하며 내 마음에 들어진 여러 생각들을 보면서 원래 없던 요란함이 기대에 못 미친 식사라는 경계를 따라 내 마음에 요란함이 있어지고 그 요란함을 늦게나마 이렇게 나를 통해 원인을 찾아 연마하니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해지며 상대와 내가 하나가 됨을 느낀다.
교무의 의견
교도 훈련을 하러 가는 중간에 통도사가 있었고 마침 점심 공양이 있는 날이었네요. 가는 길에 절에서 점심을 먹으면 새로운 경험도 되고 점심값도 아낄 수 있으니 그렇게 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절에서 점심 공양이 좀 어설펐나 보네요.
절에서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고 이렇게 하겠다고 공지를 한 적도 없는 데 체험을 위해 찾아간 것이지요. 그런데 절 밥이 나의 기준에서 볼 때 못 미친 것 같습니다. 절에서 밥을 준다면 여러 가지 산나물에 푸짐한 상을 생각하였는데 간단하게 먹으라 하니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지요
절의 입장에서 보면 요즘은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월급을 준다고 해도 교통이 불편한 곳은 잘 가지 않습니다. 밥하는 사람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밥값을 받는 것도 아닌 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니 보통 큰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절에 오신 분들에게 시장기라도 면하자고 공양을 주니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찬이 있니 없이 하면서 원망을 하게 되지요.
만일 산길을 가자 길을 잃어 헤맬 때 배는 고프지요. 날씨는 어두워지지요. 길을 못 찾을 때 절집에서 밥을 무상으로 준다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낮은 곳에 비교하면 감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찾으면 감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은혜를 찾는 것이 낙원으로 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