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8월 6일(목) 요한일서 4:7-21 찬송 458장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개역 개정)
- 하나님께 속한 증거로서의 사랑의 실천 -
거짓 진리 분별의 문제를 언급한 삽입 단락 1-6절에 이은 오늘 말씀은
다시 3장 끝에서 중단된 성도의 삶의 적그적인 측면에서의 특징으로서
사랑의 실천에 관한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이 본 서신에서
사랑의 실천을 주제로 다룬 것은 본문이 세 번째이다.
그 첫 번째는 2:1-11로 하나님의 계명 준수라는 측면에서 사랑의 실천을 다루었다.
두 번째는 3:13-24로 사랑에 빚진 자의 본연의 자세로서의 사랑의 실천을 다루었다.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의 증거로서의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요한은 먼저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그가 먼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을 위한 제물로 주셨음을 밝히고(7-10절)
이어서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만이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사랑의 공효(功效)에 대해(11-18절) 언급한 뒤
결론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19-21절)
이러한 본문은 불과 15절에 불과하나 여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명사형으로 14회, 동사형으로 15회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이라는 단어 또한 5회의 대명사를 포함하여 무려 25회나 사용되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대명제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고전 13장과 함께 사랑의 송가의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다만 고전 13장은 사랑의 실천적인 면이 강조된 반면,
본문에서는 사랑의 신적 기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이상의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되
우리의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화목 제물로 내어놓으시는,
즉 그 깊이와 넓이와 정도에 있어 무한한 사랑을 주셨는데(롬8:32)
그에 비해 우리들의 사랑은 얼마나 얄팍하고 이기적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진정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아니라 현재의 삶속에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과 뜨거운 교제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사랑의 실천은커녕
이웃에 대해 무감각하고 냉담한 채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 자체가 결국 최후 멸망에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고전3:11-15)
따라서 우리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행하는 사랑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0절 말씀은 형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과장법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길 가르치지 위해 충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본절의 진의는 액면 그대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볼 수 있는 형제를 사랑한다’는 영적 원리를 강하게 교훈한다.
여기에 우리의 가장 갚은 내면에 던지는 도전이 있다.
정신질환자가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또한 그들을 위해서 때로는 헌신적인 희생을 한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 있어 그들이 갖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나와 많은 추억을 함께 나누었든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든지,
아니면 이성적 매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한두 명쯤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주님께 당당히 나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본절에서 말하는 형제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인가?
내가 좋아하고 내가 선호하고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형제 사랑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내 잣대로 형제를 평가해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 사랑’이 아니다.
사랑 실천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상태에 있는 누구를 사랑하셨는가?
로마서 5:6에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고 했으며,
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하였다. 그렇다.
비록 연약함과 죄투성이였지만 사랑하신 것이다.
조건에 합격점을 받았기에 사랑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이 진리이며, 사랑 실천의 원리이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 상대가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못마땅한 점이 있어도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애통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이루려는 몸부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성격 차이, 학력 차이, 생활 수준 차이, 인물 차이, 신앙 차이 등을 내세우면서
사랑할 대상을 구분하고 있는 우리를 회개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 또 그의 사랑을 아는 자의 마땅한 태도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