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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채문 智蔡文
#高麗史94卷-列傳7-智蔡文-001
○智蔡文鳳州人顯宗元年補中郞將王聞契丹兵至遣蔡文將兵鎭和州以備東北及康兆敗兆及李鉉雲盧 等皆被執命蔡文移兵援西京
지채문은 봉주(鳳州) 사람이다. 현종(顯宗) 초년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되어 복무하던 중에 왕이 거란군이 침입한다는 보고를 듣고 지채문을 보내 군대를 인솔하고 화주(和州)를 진수하면서 동북 방면을 경비하게 하였다. 그 후 강조(康兆)가 패배하고 강조, 이현운(李鉉雲), 노의 등이 포로되자 왕이 다시 지채문에게 병력을 이동하여 서경을 원조할 것을 명령하였다.
蔡文卽與軍容使侍御史崔昌進次剛德鎭. 爲契丹鄕導與契丹人劉經齎檄至西京諭降副留守元宗奭與僚佐崔緯咸質楊澤文晏等已修降表蔡文等聞之引兵至西京城門閉. 昌呼分臺御史曹子奇曰:
지채문은 즉시 군용사 시어사(軍容使侍御史) 최창(崔昌)과 함께 강덕진(剛德鎭)에 진군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그런데 노의는 거란의 길잡이가 되어 거란사람 유경(劉經)과 함께 격문을 가지고 서경에 가서 투항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서경 부류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막료 최위(崔緯), 함질(咸質), 양택(楊澤), 문안(文晏) 등과 함께 적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투항문을 작성하였다. 지채문 등이 이런 정형을 듣고 군대를 거느리고 서경에 도착하니 성문이 닫쳤었다. 최창이 분대 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서 말하기를
"吾等奉王命倍道來今不納何也?" 子奇具告 經諭降事遂開門蔡文入屯故宮南廊. 昌諷宗奭拘留 經固守宗奭不從昌密與蔡文謀遣兵城北候 等還掩殺之取其表焚之.
“우리가 왕의 명을 받고 주야로 행군하여 구원하러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않는가?”고 질문한즉 조자기가 그 사이에 노의와 유경이 와서 적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한 사연을 자세히 설명한 후 드디어 문을 열어 주었으므로 지채문이 입성하여 옛궁전의 남쪽 행랑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대하여 노의와 유경을 억류하고 성을 지켜 나갈 것을 암시하였으나 원종석이 응하지 않으므로 최창이 지채문과 상의하고 은밀히 성 북쪽에 군대를 파견하여 노의 등이 돌아오는 길을 지키고 있다가 그들을 습격하여 죽이고 투항문을 탈취하여 불태워 버렸다.
時城中疑貳蔡文出鎭城南獨大將軍鄭忠節從之俄而東北界都巡檢使卓思政率兵至遂與合軍復入城. 王以三軍敗 州郡陷沒上表請朝契丹主許之遂禁 掠以馬保佑爲開城留守王八副之遣乙凜將騎兵一千送保佑等又遣其閤門引進使韓杞以突騎二百至西京北門呼曰:
당시 성중에는 동요하는 기세가 보이므로 지채문이 성 남쪽으로 나가서 진수하였는데 오직 대장군(大將軍) 정충절(鄭忠節)이 그를 따라 갔을 뿐이었다자 동북계 도순검사(東北界都巡檢使) 탁사정(卓思政)이 군대를 인솔하고 도착하였으므로 두 부대가 합세하여 다시 성 안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왕은 이때에 삼군이 패배하고 많은 고을들이 함몰되었다 하여 그만 항복문을 보내 화의를 청하니 거란 임금이 수란하고 드디어 약탈과 납치를 금하게 되었으며 거란 사람 마보우(馬保佑)를 개성유수로, 왕팔(王八)을 부유수로 배치하기 위하여 을름(乙凜)에게 거란 기병 일천 명을 주어 마보우 등의 부임을 호송하게 하고 한 편으로 거란의 합문 인진사(閤門引進使) 한기(韓杞)에게 돌격 기마대 2백명을 대동시켜 서경 북문 밖으로 보내서 외치기를
"皇帝昨遣劉經盧 等齎詔曉諭何至今無消息也若不拒命留守官僚來聽我指諭." 思政聞杞語與蔡文謀使麾下鄭仁等將驍騎突出擊斬杞等百餘人餘悉擒之無一人還者. 思政以蔡文爲先鋒出與乙凜戰乙凜保佑敗走於是城中人心稍安思政還入城蔡文與李元出屯慈惠寺契丹主復遣乙凜擊之.
“지난날에 우리 황제가 유경과 노의 등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글을 주어 보냈는데 지금까지 어째서 소식이 없는가? 만일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다면 유수와 관료들은 나와서 나의 지시를 받으라!”고 하니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지채문과 더불어 대책을 토의한 후 그 휘하의 정인(鄭仁) 등에게 명령을 주어 날래고 건장한 기병을 인솔하고 급히 나가 돌격하여 한기를 위시한 적 기병 백여 명을 죽이고 나머지 적들은 모조리 생포하여 한 명의 적병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탁사정은 지채문을 선봉으로 삼고 나가서 을름과 교전한 결과는 을름과 마보우가 패주하였다. 이리하여 성중의 인심이 약간 안돈되었다. 탁서정은 성안으로 돌아 가고 지채문은 이원(李元)과 함께 자혜사(慈惠寺)에 나가 주둔하였다. 거란 임금은 다시 을름을 보내 서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邏卒報: "敵兵來屯安定驛勢甚盛." 蔡文馳告思政遂與思政及僧法言率兵九千迎擊于林原驛南斬首三千餘級法言死.
지채문은 “적군이 안정역(安定驛)에 와서 머물고 있는데 그 수가 대단 많다”는 순라병의 정찰 보고를 받고 이것을 탁사정에게 급보하고 드디어 탁사정 및 중(僧) 법언(法言)과 함께 병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남쪽에서 적군을 요격하여 3천여 명을 죽였으며 법언은 전사하였다.
翼日蔡文復出戰契丹兵敗走於是城中將士登城以望競出逐之至馬灘契丹回兵擊之我軍敗遂圍城. 契丹主次城西佛寺思政懼 將軍大道秀曰: "君自東門吾自西門出前後夾攻蔑不勝矣?" 遂以麾下兵夜遁道秀出東門始知見 又力不可敵遂率所部降于契丹諸將皆潰城中 懼.
이튿날 지채문이 또다시 출전한 결과 거란군이 패주하였다. 이때 성중에 있던 장병들이 성 위에 올라서 바라보다가 적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일시에 달려 나와 적을 추격하여 마탄(馬灘)에 이르렀을 때 거란군이 돌연 역습하여 와서 아군이 패전하였으며 적들이 드디어 성을 포위하게 되었다. 거란 임금이 서편 성 밖에 있는 절에 숙영하니 탁사정이 겁을 먹고 장군(將軍) 대도수(大道秀)를 꼬이기를“당신은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가서 앞뒤로 적을 협공하면 못 이길 리가 있으랴?”고 하고 그는 자기 부대만 거느리고 어둔밤에 도망쳤다. 대도수가 동문으로 나가서야 비로소 속은 줄 알았으며 또 적대할 역량도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자기 부대를 인솔하고 거란에게 항복하였으며 다른 부대들도 모두 흩어지게 되니 성중 인심은 혼란과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統軍錄事趙元隘守鎭將姜民瞻郞將洪 方休等莫知所措乃共禱神祠筮得吉兆於是衆推元爲兵馬使收散卒閉城固守.
통군 녹사(統軍錄事) 조원(趙元), 애수(隘守) 진장(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 방휴(方休) 등은 어찌 할 바를 몰라 의논 끝에 일동이 신사(神祠)로 가서 점을 쳤더니 길한 증조를 얻었다. 여기서 여러 사람들이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분산된 병사들을 집합한 후 성문을 닫고 다시 고수하게 되었다.
#高麗史94卷-列傳7-智蔡文-002
蔡文奔還京奏西京敗軍狀群臣議降姜邯贊獨勸王南行蔡文請曰: "臣雖駑怯願在左右效犬馬勞." 王曰: "昨李元崔昌奔還自請扈從今不復見爲臣之義果如是乎? 今卿旣勞于外又欲 衛予甚嘉之." 賜酒食及銀鞍.
지채문은 패주하여 서울에 도착한 후 서경에서 패전한 정형을 보고하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강감찬(姜邯贊)이 홀로 반대하며 왕에게 남으로 피난 갈 것을 권하니 지채문이 나서며 “제가 비록 불민하나 왕을 모시고 충성을 다하여 호위하겠노라”고 자원하니 왕이 말하기를 “전날 이원(李元), 최창(崔昌)이 도망해 와서 수행하겠다고 자청하더니 지금은 다시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신하된 도리에 이럴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는 전선에서 수고하였는데 또 나를 호위하겠다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기노라”고 칭찬하고 술과 음식이며 은장식한 안장을 주었다.
是夜王與后妃及吏部侍郞蔡忠順等率禁軍五十餘人出都行至積城縣丹棗驛武卒堅英與驛人張弓矢將犯行宮蔡文馳射之賊徒奔潰復自西南山突出遮道蔡文又射却之.
王至昌化縣有吏告曰: "王識吾名面乎?" 王陽不聞吏怒將構亂使人呼曰: "河拱辰將兵來矣." 蔡文曰: "何故來耶?" 吏曰: "欲擒蔡忠順金應仁等耳."
이날 밤에 왕이 후(后), 비(妃)와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 및 금군(禁軍) 50여 명을 인솔하고 도성을 떠나 적성현 단조역(積城)에 이르니 병졸 견영(堅英)이 다른 역졸들과 함께 활을 버리어 왕의 행차를 침범하려 하는 것을 지채문이 달려 가서 활을 쏘니 적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또다시 서남 산으로부터 돌연히 나와서 길을 막는 것을 지채문이 또 쏘아 물리쳤다.
왕이 창화현(昌化縣)에 도착했을 때 아전 한 명이 대들어 말하기를 “국왕은 나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가?”고 묻는 것을 왕이 거짓 못 듣는 척한즉 그 자가 노하여 소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로써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河拱辰)이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고 하므로 지채문이 “무엇하러 오는가?”고 물은즉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잡으러 온다”고 그 아전이 대답하였다.
應仁及侍郞李正忠郞將國近等皆遁獨蔡文忠順周佇等留侍夜賊又至侍從臣僚宦官嬪御皆亡匿唯玄德大明二王后侍女二人承旨良 忠弼等侍蔡文隨機應變賊不敢近. 及曉蔡文請二后先自北門出手控御馬*閒行入道峯寺賊不之知忠順繼至. 蔡文奏曰: "去夜賊疑非拱辰臣請往跡之." 王恐其亡不許. 蔡文曰: "臣若背君言與事違天必誅之." 王乃許.
이 말을 듣고 김응인과 시랑 이정충(侍郞李正忠), 낭장 국근(郞將國近) 등은 모두 다 도망치고 오직 지채문과 채충순, 주저(周佇) 등이 남아서 왕을 호위하였다. 밤중에 적들이 또 습격하여 오니 시종하던 관원들과 환관이며 왕비와 궁인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오직 현덕(玄德), 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 승지(承旨) 양협, 충필(忠弼) 등만 남아 있었다. 지채문이 임기 응변으로 방어하매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새벽이 되어 지채문이 두 왕후를 북문으로 먼저 나가게 하고 자기는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빠져 도봉사(道峯寺)에 이르니 적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이어 채충순이 따라 왔다. 지채문이 왕에게 고하기를 “지난 밤의 적들은 하공진의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가서 탐지하여 보겠습니다”고 하니 왕은 그가 혹시 도망갈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지채문이 다시 말하기를 “제가 만일 전하를 저바리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맹세하였으므로 왕이 비로소 승낙하였다.
卽往昌化縣道逢國近國近曰: "吾衣裝盡爲賊奪." 蔡文曰: "汝爲臣不忠獲保首領足矣." 適拱辰柳宗赴行在蔡文遇諸道具言賊變且詰之果非拱辰所爲也.
지채문이 그 길로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國近)을 만나니 그가 말하기를 “나의 의복과 행장은 모두 적들에게 강탈당하였소”하고 하소연한즉 말하기를 “그대가 신하로서 충성치 못했은즉 죽지 않은 것만 다행일세!”라고 꾸짖었다. 그때 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왕을 찾아 오는 것을 지채문이 길에서 만나 그들에게 그 동안 여러 곳에서 적들에게 봉변당한 말을 낱낱이 말하고 또 그들의 행동을 질문하여 본즉 과연 하공진의 소행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
拱辰道見中軍判官高英起敗軍南走與俱來時拱辰所領卒二十餘人蔡文遂以其卒搜昌化縣得賊所盜馬十五匹鞍十部將還蔡文謂拱辰等曰: "吾與諸君偕進王必驚動請諸君少後." 遂獨行忠弼在寺門望之入奏: "智將軍來矣." 王喜出門迎之.
하공진이 도중에서 중근 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고 남으로 도망치는 것을 만나 그와 함께 왔으므로 그때 하공진이 영솔하는 대원이 여 명이 있었다. 지채문이 그 군사를 데리고 창화현을 수색하여 적들이 도적한 말 15필과 안장 열 부(部)를 찾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지채문이 하공진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과 같이 가면 왕이 필연코 놀랄 터이니 그대들은 조금 뒤떨어져 오라”고 하고 먼저 혼자 돌아오니 충필(忠弼)이 절문 앞에서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가서 왕에게 지 장군이 온다고 전달하였더니 왕이 기뻐서 문 밖까지 마중 나왔다.
蔡文奏曰: "臣已得賊實非拱辰所爲且偕拱辰來." 王引見拱辰宗勞之遂遣拱辰往契丹營請和. 明年正月王次廣州失二王后所之令蔡文往尋之至饒呑驛乃得奉還王喜爲留三日王發廣州踰嶺宿鼻腦驛.
지채문이 보고하기를 “도중에서 적의 정체를 탐지한즉 사실 하공진의 소행이 아니며 또 지금 하공진도 같이 온다”고 하니 왕이 하공진과 유종을 접견들을 위로한 후 드디어 하공진을 거란 영문에 파견하여 화의를 청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왕이 광주(廣州)에 유할 때 두 왕후의 간 곳을 잃고 지채문을 시켜 찾게 하였더니 요탐역(饒呑驛)에서 상봉하여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서 일부러 사흘 더 유숙하였다. 왕의 일행이 광주를 떠나 영(嶺)을 넘어 비노역(鼻腦驛)에서 유숙하였다.
#高麗史94卷-列傳7-智蔡文-003
蔡文奏: "扈從將士皆托尋妻子四散昏夜恐有賊竊發請爲幟揷將士冠以辨." 從之.
지채문이 왕에게 고하기를 “호위하는 장병들이 처자를 찾겠다고 청탁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밤중에 혹시 적이 우리들의 틈을 엿볼 수도 있을 터인즉 그런 때의 표식으로 호위 장병들의 관에 깃발을 꽂아 식별하도록 하자”고 하니 왕이 그대로 실시하였다.
宗曰: "臣鄕陽城去此不遠請幸之." 王悅遂幸陽城夜宗應仁等矯旨毁御鞍以賜縣人遲明縣吏皆遁. 이때 유종이 고하기를 “저의 고향 양성(陽城)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그리로 가십시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드디어 양성으로 갔었는데 밤중에 유종과 김응인 등이 왕의 명령을 위조하여 왕의 말안장을 뜯어서 그 고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동틀 무렵에 그 고을 아전들이 모두 도망갔다.
宗應仁等又請: "遣二王后各歸其鄕遣扈從將卒往東邊備急." 王以問蔡文蔡文大哭曰: "今君臣失道橫罹殃禍播遷如此正當動由仁義以收人心 王后以求生其可忍乎?" 王曰: "將軍言是也." 遂行過蛇山縣蔡文見群 在田欲慰悅王心躍馬而前 驚飛 身仰射應弦而墮
유종과 김응인 등이 건의하기를 “두 왕후를 각각 그의 고향으로 돌려 보내고 경위하는 장병들은 동부 방면으로 출동시켜 긴장된 사태에 대비하자”고 하였다. 왕이 지채문에게 문의한즉 지채문은 목놓아 울면서 하는 말이 “지금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자기 도리를 잃고 환란을 당하여 이처럼 파천(播遷)하게 되었으니 이때가 바로 인(仁)과 의(義)로써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할 때인데 왕후를 버리고 혼자만 살 길을 구하자는 생각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하고 드디어 길을 떠나 사산현(蛇山縣)에 이르렀을 때에 지채문이 문득 기러기 떼가 논에 내린 것을 보고 왕의 마음을 위안시키자는 생각으로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서니 기러기 떼가 놀라서 날아가는 놈을 지채문이 겨누고 자기의 몸을 제치며 올려 쏘니 활 시위 소리와 함께 화살 맞은 기러기가 떨어졌다.
王大悅. 蔡文下馬取鴈進曰: "有臣如此何憂盜賊?" 王大笑慰奬. 至天安府宗應仁奏: "臣等請往石坡驛供頓以迎." 遂逃. 至巴山驛王謂蔡文曰: "玄德王后有娠不宜遠行其鄕善州距此不遠可以遣之." 蔡文固執前議王曰: "勢不獲已." 遂遣之次
이것을 본 왕은 대단 기뻐하였다. 지채문은 말 등에서 내려 그 기러기를 집어 왕에게 드리면서 “이런 활 잘 쏘는 신하를 두셨으니 도적이 있은들 정이 있으리까”라고 하니 왕도 크게 웃으면서 그를 칭찬하였다.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렀을 때 유종과 김응인이 고하기를 “자기들은 석파역(石坡驛)으로 가서 차나 말을 준비하여 가지고 마중 오겠다”고 구실을 붙이고 드디어 도망쳤다. 파산역(巴山驛)에서 왕이 지채문에게 말하기를 “현덕 왕후는 태중이므로 먼 길을 갈 수 없다. 그의 고향 선주(善州)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 그리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상의하였더니 지채문은 전일에 말한 의견을 고집하였으나 사세가 부득이한 것을 인정하고 왕은 드디어 왕후를 그의 고향으로 보냈다.
礪陽縣將卒有離心蔡文奏曰: "聖祖統合之時有功者雖小必賞 今方涉險艱要得衆心宜先懋賞." 王從之授玄安之等十六人爲中尹.
여양현(礪陽縣)에서 유숙할 때 장병들이 배심을 품고 있으므로 지채문이 건의하기를
“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 공로 있는 사람은 비록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거늘 하물며 지금 같은 험난한 때에는 대중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니 우선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주어 인심을 수습합시다”라고 하니 왕이 그의 의견을 좇아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을 중윤(中尹)으로 임명하였다.
至參禮驛全州節度使趙容謙野服迎駕朴暹奏曰: "全州卽古百濟聖祖亦惡之請上勿幸." 王然之宿長谷驛容謙謀欲止王挾以號令與轉運使李載巡檢使崔 殿中少監柳僧虔以白幟揷冠鼓 而進蔡文使人閉門堅守賊不敢入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니 전주 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평복을 입고 왕의 행차를 맞았다. 박섬(朴暹)이 말하기를 “전주는 백제(百濟)의 옛땅일 뿐만 아니라 우리 태조(聖祖)께서도 밉살스럽게 보셨으니 청컨대 전하께서는 가시지 말기를 바랍니다”고 하였으므로 왕이 “그렇다”하고 장곡역(長谷驛)에서 유숙하였는데 조용겸이 왕을 그곳에 머물러 놓고 왕을 끼고 호령하려는 야심을 품고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와 순검사(巡檢使) 최즙(崔楫), 전중 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들과 공모하고 갓에다 흰 깃발을 표식으로 꽂고 북을 치고 함성을 올리면서 다가오므로 지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단단히 지키니 적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王與后乘馬在驛廳事蔡文登屋問曰: "汝等何得如是柳僧虔來否?" 賊曰: "來矣." 又問: "汝爲誰?" 賊曰: "汝亦爲誰?" 蔡文* 以他語賊曰智將軍也蔡文認其聲曰:
왕과 왕후는 말을 탄 채로 역(驛)의 청사(廳事)에 있었고 지채문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묻기를 “너희들이 왜 이러느냐? 유승건이 거기 있느냐?”고 외치니 적들이 “왔다”고 대답하였다. 계속하여 “너는 누구냐?”고 다시 물으니 적도 “너야말로 누구냐?”고 반문하는 것을 지채문이 다른 음성으로 꾸며서 대답하였으나 적이 알아 차리고 지 장군이라고 지껄였다.
"汝是親從馬韓兆也." 仍以王命召僧虔僧虔曰: "汝不出吾不敢入." 蔡文出門呼僧虔引至王前僧虔泣奏曰:
지채문이 그의 음성을 듣더니 “너는 친종마(親從馬) 한조(韓兆)로구나!”하고 지목한 다음에 이어 왕의 명령으로 유승건을 부르니 유승건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오기 전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하므로 지채문이 문 밖으로 나가 유승건을 데리고 왕의 앞으로 가니 유승건이 울면서 말하기를
"今日之事容謙所爲臣不知也." 請奉旨召容謙來王許之僧虔出遂逃. 王命良 召容謙載旣至諸將欲殺之蔡文呵止之使二人牽大明宮主馬而行旣而遣還全州.
“오늘의 일은 조용겸이 꾸민 것이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청컨대 왕명을 받들고 조용겸을 불러 오겠습니다”라고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였더니 유승건이 밖으로 나가서 그만 도망쳤다. 왕이 양협을 시켜 조용겸과 이재를 불렀는데 그가 오자 장병들이 모두들 죽이려 하는 것을 지채문이 소리쳐서 제지하고 그 두 사람을 시켜 대명 왕후가 탄 말을 몰고 가게 하다가 얼마 후에 전주로 돌려 보냈다.
王入羅州夜候人誤報契丹兵至王大驚走出外蔡文奏曰:
왕이 나주(羅州)에 들어 가던 날 밤에는 “거란군이 온다”고 야경군이 그릇 보고하여 왕이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 나갔으므로 지채문이 아뢰기를
"大駕夜行百姓驚擾願還御行宮臣 知然後動猶可及也." 蔡文出候之通事舍人宋均彦別將丁悅齎契丹前鋒元帥駙馬書及拱辰奏狀來
“전하께서 야밤에 행차하시면 백성들이 놀라고 소동이 일어날 터이니 행궁(行宮)으로 돌아가셨다가 제가 알아 본 후에 출발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지채문이 나가 탐문하니 그것은 통사 사인(通事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이 거란의 선봉 원수부마(先鋒元帥駙馬)의 공문과 하공진의 보고서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蔡文率詣行宮王見拱辰狀知兵已退喜以均彦爲都兵馬錄事丁悅爲親從郞將駙馬書無解契丹字者莫曉其意.
지채문이 그들을 데리고 왕의 행궁으로 돌아오니 왕이 하공진의 보고를 읽고 거란군이 이미 물러 갔음을 알고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송균언을 도병마 녹사(都兵馬錄事)로, 정열을 친종랑장(親從郞將)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부마의 공문은 거란 글자로 썼으므로 그 뜻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二月還至公州賜蔡文田三十結敎曰: "朕因避寇狼狽遠塗所從臣僚罔不逃散唯蔡文蒙犯風霜跋涉山川不辭羇靮之勞終保松筠之節諒多殊效何惜異恩?" 2
월에 왕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공주에 이르러 지채문에게 토지 30결(結)을 주고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내가 적의 침략을 피하여 허둥지둥 먼 곳으로 피난할 때 따라 오던 신하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오직 지채문만은 풍상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말 모는 수고도 서슴지 않고 끝내 송죽 같은 절개를 세웠으니 그 특출한 공훈을 생각할 때 내가 어찌 특이한 은전을 아끼리오?”
七年以武職兼右常侍十七年拜右僕射卒德宗卽位制曰: "故上將軍左僕射智蔡文當聖考南幸獨全
忠節功在第一宜錄功科以勸將來." 曾孫祿延.
현종 7년에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하고 동 17년(1026)에 우복야(右僕射)로 있다가 죽었다. 덕종(德宗)이 즉위(卽位)하자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고(故) 상장군 좌복야 지채문은 선왕께서 남녘으로 피난하실 때에 홀로 충절을 다하여 첫 자리에 가는 공을 세웠다. 마땅히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진들에게 충성을 권장할지어다”그의 증손(曾孫)은 지녹연(祿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