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저 편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노라면 다락방에서 울먹이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보인다.
낡은 돗자리가 깔려 있고 서랍이 두 개 달린 앉은뱅이 책상 위엔 작은 창 너머로 석양빛이 고왔다. 낮은 천장에 매달린 촉수 낮은 전구는 일어 설 때마다 머리에 닿아 서글픈 내 그림자와 함께 흔들거리곤 하였다. 언니들을 거친 색깔 바랜 옷들을 물려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의 사랑마저 동생들 차지가 되고 보니 일찍부터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시샘을 부리다 부모님께 꾸중을 듣고 올라 간 다락방의 작은 창 너머로 햇살에 일렁이는 나뭇잎들은 서러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위로하려는 듯 쉴 새 없이 반짝이며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밤이면 다락방 벽을 긁어대는 서생원의 기척이 못 견디게 싫었지만 다락방 창 밑으로 잇대어 만든 수돗가의 양철 지붕에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는 마치 수업이 끝난 빈 교실에서 울려 퍼지는 실로폰 연주처럼 들려 밤새워 귀를 기울여 듣던 소리였다. 사춘기가 되면서 다락방에 홀로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세상과의 보이지 않는 견고한 성을 쌓아 끝없이 자신을 감추는 일에서 헤어 날 수가 없었다.
밤마다 남의 詩를 베껴 적었다.
그것은 장차 다가 올 미래에 대한 설레임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 주었지만 나의 편협한 생각을 이해하여 주는 벗 하나 없던 그 시간들은 나로서도 감당 못 할 외로운 세계였다. 초라한 다락방에 안주하면서도 어쩌면 세상을 향하여 누구보다 힘찬 날갯짓을 하고 싶었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말 새벽이면 소리 없이 일어나 배낭을 꾸려메고 산을 찾아 다녔다. 산은 말이 필요 없는 과묵한 친구였고 그런 친구에 대한 예우로써 큰 변이 나지 않는 한 꼭 종주를 하였다. 산행에서 돌아 와 휘장을 친 수돗가에서 찬물로 몸을 씻은 후 다락방에 올라가 잠깐 선잠이 들면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에선 고등어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며 올라오곤 하였다. 연탄불에 구워 노란 기름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고등어는 그나마 한 토막은 아버지 앞에, 남은 한 토막은 동생들 앞에 놓여져 중간에 앉은 나의 젓가락은 늘 헛손질을 해야 했고 그때 내 소원은 고등어를 원 없이 먹어보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언니들이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나고 빈방이 생겼어도 나는 여전히 다락방을 오르내렸다.
자식들 교육에 있어 아버지는 결코 진보적이질 못하셨다. 아들자식 하나 없이 딸만 일곱을 키우시는 아버지 또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절망적으로 비관해 하셨다. 담임 선생님께서 찾아 와 간곡하게 나의 진학을 권유하고 돌아가신 날 저녁에 아버지는 내 책가방을 던져 버리셨다. 그리고 그 날의 일기장엔 '나의 인생은 끝났다.'라고 적혔다. 나는 사사건건 반항했고 좌절했으며 세상을 원망했다. 성난 고양이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언니들도 동생들도 차츰 내게서 멀어져 갔다.
온통 암울한 잿빛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 할 길이 없었던 내 열아홉 시절, 나는 다락방에서 성숙한 여인이 되어갔다.
밤이 되면 부엌으로 통하는 다락방의 계단을 소리 없이 내려 와 친구들이 모이는 카페로 달려갔다.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어설픈 인생을 토로하며 열띤 논쟁을 벌이거나 돼먹지도 않은 詩를 끄적여 카페 주인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내 詩를 액자로 만들어 카페의 벽에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여권을 건네주셨고 나는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매서운 2월의 광풍에 쫓기듯 외삼촌이 계시는 방콕으로 떠났다.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여전히 우울했고 집 생각을 하는 대신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보잘 것 없는 나의 존재를 거부하고자 했던 그 회복하기 힘든 절망감에 틈만 나면 챠오프라야강변을 쏘다녔다. 광활한 들판을 달려 파타야로 향하던 그 날은 음력으로 시작되는 새해의 첫 날이었고 아무에게나 물을 뿌려대는 축제의식이 여기 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던 트럭에서도 화물칸에 커다란 물통을 싣고 가면서 내가 타고 있던 차창으로 마구 물을 뿌려댔다. 그것이 축복을 기원하는 의식이라니 화도 못 내고 차에서 내려 젖은 옷을 털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난생 처음 보는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맞닿은 광야의 일직선은 그대로 수억만 개의 예리한 침이 되어 내 몸에 전율로 꽂혔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아지경의 상태로 나를 몰고 가니 호흡마저 멈춘 듯 아! - 하는 감탄사뿐.
그 순간을 어떤 신령스런 체험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 할 방법이 없다.
다만 스스로 굳게 닫았던 녹슨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빗장이 열리는 환상과 함께 사무치게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미워 할 때마다 그러면 못 쓴다며 한없이 아버지를 감싸시던 어머니. 한동안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오열했다.
여권의 체류 기간이 끝나고 나는 다시 신림동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전과 다른 느낌으로 소중하게 여겨졌고 더 이상 나는 어린 계집아이가 아니었다.
삶에 허덕이는 부모님이 가여워졌으며 그 와중에서도 대학생이 된 동생들이 대견하기만 하였다. 몇 년 후 결혼을 하고 신방을 꾸민 시댁의 건넌방에도 조그만 다락이 딸려 있어 창문을 열면 노란 들국화가 만발한 뒤뜰이 보였다.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 힘에 부치는 순간마다 신림동 다락방의 절망에 겨워하던 시간들을 떠 올렸고 그리고 뱃속의 아이가 편협스런 이 엄마를 닮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일년에 서너 번 친정에 갈 때마다 꼭 해야 할 일처럼 다락방 문을 열어 본다. 을씨년스런 어둠 속에서 책상 앞에 무릎을 싸안고 울고 있는 나의 열 아홉 시절이 보이는 듯 하다. 일곱 형제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친정의 다락은 이제 아무도 오르내리는 사람없이 그저 잡다한 물건 위에 뽀얗게 먼지만 쌓여 있을 뿐이다.
철없는 계집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고 성숙하기까지 그 어설픈 고통과 번민을 함께 하여 주고, 날개가 돋쳐 백조가 되기를 갈망하는 턱없는 몸부림을 조용히 끌어안아 주던 다락방.
이제는 친정에 가도 다락방이 없다. 부모님은 치악산이 바라다 보이는 원주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고 다락방이 없는 친정은 어쩐지 남의 집만 같다.
다락방이 그립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 촛불을 켜 놓고 보내지도 못 할 편지를 밤 새워 쓰고 싶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빨리 어른이 되어 세상을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그 때가 나의 일생 중에 가장 빛나는 자유를 구가하던 시절이었지 싶다.
여건이 주어진다면 서쪽으로 창을 낸 조그만 다락방을 꾸며 보고 싶다.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버거운 삶에 지친 피곤한 영혼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한 번 그 소녀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