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경표 상의 산줄기를 모두 밟았다.
거인산악회 노장 대원 12명, 남한땅 1대간 9정맥 종주 완료
노장들이 남한 땅의 1대간과 9정맥을 모두 주파했다. 평균연령 50대 중반의 거인산악회(회장 박창서) 회원 12명이 도상거리 약 2,720km, 실거리 3,700km에 이르는 대장정을 7년 10개월간 170여 회의 산행 끝에 10월13일 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인 속리산 천황봉에서 막을 내렸다.
종주를 마친 대원 12명은 거인산악회 백두대간 구간종주 1, 2, 3차 대원들로, 60세 전후가 주도했는데, 앞으로도 거인산악회의 평균연령 기록은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1차 대간 종주대원으로 완주한 이주희씨(48)는 여성 최초의 타이들을 웬만해서는 빼앗기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속리산 천황봉에서 남한땅 1대간과 9정맥 종주산행을 마친 거인산악회 회원들. 안내등산회 회장으로서 지난 6월 대간과 정맥을 완주한 안경호씨(한국요산회 회장)는 “완주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실제 한 구간도 빼놓지 않고 완주한 사람은 열 명 안팎일 것”이라며, 1대간 9정맥 완전 종주의 어려움을 귀띔해주었다.
안내등산회인 거인산악회가 조선 때 우리의 산맥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산경표>에 나와 있는 산줄기를 찾아나선 것은 95년 1월1일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백두대간 등줄기에는 유명 산 외에는 산길이 잘 나 있지 않아 엉뚱한 산줄기를 타거나 가시덩굴과 잡목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시작한 1차 팀에 이어 95년 12월24일 시작한 2차 종주팀, 그리고 96년 12월14일 시작한 3차 종주팀이 계속 이어지며 대간 완주자가 탄생하면서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낙동정맥 구간종주였다. 97년 8월 시작한 이것도 98년 9월에 끝을 맺었다. 그러자 더욱 큰 욕심이 생겼다. 아예 1대간과 9정맥을 모두 끝내자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10월13일은 이렇게 점점 키운 꿈이 현실로 완성되는 날이었다.
이 날 거인산악회 이구 대장과 함께 천황봉에 도착할 즈음 100여m를 앞두고 땀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새벽 5시경 말목재를 출발, 천황봉 정상에 오른 한남금북정맥 종주대의 기세에 속리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조차 맥을 못쓰는 분위기였다.
좋은 일 슬픈 일 많이 겪어
정상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30분경, 함께 올라온 김종운씨와 그의 아들 성수군을 보는 순간 정상에 모여 있던 산악인들은 죄다 한 마디씩 해댔다. “많이 컸다”, “빨갛게 물들였다더니 머리색이 새카맣네”, “백두대간 타다 오대산에서 세뱃돈 받은 거 다 썼냐?”는 둥 악수도 하고, 머리도 쓰다듬으면서 반가움을 나타냈다. 성수군은 초등학생 때인 98년 9월부터 4차 종주대원으로 대간 종주를 마치고, 이어 호남정맥과 낙동정맥도 완주했다.
이 날 정상에는 대간 정맥 완주자 12명 외에도 6차에 이르는 대간 종주 참가자들과 정맥 종주자들, 그리고 완주를 축하하기 위해 천안, 부산, 대구, 경주 등지에서도 산악인들이 올라왔다. 이들 모두 대간과 정맥 종주 중 인연을 맺은 사이.
이구 대장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정상표석에 다가섰다. 그리곤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지방을 붙이고, 그 앞에 향 한 뭉치를 꽂아놓았다. 이들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종주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이들이었다.
거인산악회 종주대는 그동안 좋은 일도 많았지만, 가슴 아픈 일도 여러 차례 겪었다. 특히 종주붐이 한창 일던 시기인 97년 1월1일 사고는 참가자들의 마음 깊이 박혀 있다. 제3차 대간 종주에 참가했던 대원 3명이 설악산 공룡릉 산행 도중 목숨을 잃은 일이었다.
1월1일 새벽 두번째 구간인 마등령~한계령 산행을 위해 설악동을 출발한 대원은 125명에 이르렀다. 그 날 새벽녘 이슬비가 살짝 내리면서 흐릿하던 날씨가 마등령을 올라섰을 때 돌변하더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이 날 목표는 중청대피소였다. 그런데 급변한 날씨에 견디지 못한 대원들이 한 명 한 명 탈진, 결국 신선대 부근에서 한 명, 무너미고개에서 또 한 명, 그리고 소청 부근에서 한 명 등 세 명이 악천후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이구 대장은 구조에 나섰다가 오히려 탈진, 사망 직전에 이르기까지 한 험악한 상황이었다. 사고 뒤 이구 대장은 여러 달 동안 유족들에게 시달림을 받았고, 거인산악회는 등산연합회에서 제명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로 인해 거인산악회는 사라지는 듯했으나, 125여 명 가운데 계속 종주산행에 나선 40여 대원들이 사고가 일어난 지 두어 달 뒤 집에 드러누워 있는 이 대장을 산행버스까지 몰고 찾아가 “이 대장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대간 종주를 할 수 있냐”며 끌어냄으로써 다시 종주산행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제3차 종주대는 산행하면서도 동료 3명을 잊지 않았다. 한 구간이 끝날 때마다 영정을 꺼내놓고, 잔에 술을 부어 고인의 넋을 달래곤 했다. 한이 많던 팀이다 보니 술을 많이 마셔댔고, 그로 인해 ‘백주대간팀’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끈끈하게 지내다 보니 좋은 일도 많았다. 당시 42세로 동갑내기인 김경선·김미선씨가 백년해로를 맺는 등 무려 다섯 쌍의 부부가 탄생했다. 이들 가운데 두 쌍은 지금도 종주산행에 계속 참가하고 있다.
두번째 사고는 너무도 황당하게 일어났다. 98년 9월 24차에 걸쳐 낙동정맥 종주를 마치고 삼척 추암 해수욕장에서 뒤풀이를 하던 중 남녀 두 사람이 바다로 들어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때도 이구 대장 역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중 각각 물로 들어서더니 거의 동시에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저도 그 두 사람을 구하겠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오히려 파도에 휩쓸려 버렸죠. 다행히 급히 달려온 구조대가 저를 끄집어낸 덕분에 살아났지만, 갯바위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의 시신이 해안으로 밀려나오는 걸 보니까 꿈을 꾸는 것 같더군요.”
낙남정맥은 정간으로 격 높여야
이 날 마지막으로 천황봉에 도착한 것은 백노회 조용원 회장(63) 부부였다. 조 회장과 정맥 세 줄기를 함께 종주해낸 아내지만, 무박산행에 처음 참가하다 보니 잠을 제대로 못자 컨디션 조절에 실패, 산행 내내 뒤쳐져 올라왔다. 앞서 올라온 거인산악회 박창서 회장(66)에 이어 동생인 봉원씨(61)의 축하 인사를 받으면서 조 회장은 “막내도 오늘 함께 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막내 동생인 춘원씨도 대간 종주를 함께 시작했으나, 간이 나빠지자 맏형인 조 회장이 산행을 금지시켰다.
“어제는 다른 산행 때보다 두어 시간 일찍 약속장소에 나와서 기다렸습니다.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든지 소풍 전날 초등학교 학생처럼 느껴지지 뭡니까. 산행하면서 8년 가까운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천황봉이 가까워오니까 아쉬움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더군요. 참 긴 세월이었습니다. 산행 횟수도 횟수지만, 집을 나온 날짜를 따져보면 1년이 훨씬 넘으니까, 얼마나 긴 세월이겠습니까.”
오랜 세월 함께 산행하다 보니 모두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박창서 회장이 맏형이라면 교장과 교사로서 10여 년간 같은 초등학교에서 생활했던 조용원 회장은 둘째로서 수많은 아우들을 사랑과 인내로서 이끌어왔다. 박 회장과 조 회장은 1년이면 휴일 외에도 평일에 한두 차례씩 산에 다니다 보니 아내들에게 ‘아부’도 많이 했다고 말한다.
박 회장은 “산에 가지 않는 날은 어떡하면 집에 충실할까 늘 고민하는데, 간혹 드라마나 책 속에서 아내나 애인의 마음을 사는 장면을 보게 되면 눈여겨봐 두었다가 비슷한 기회가 닿으면 각색해서 꼭 써먹곤 했다”며 껄걸 웃는다.
이 날 인사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이구 대장이었다. 95년 대간 구간종주를 시작한 이후 지형도로 대간과 정간 등줄기를 잇고, 그 지형도를 들고 답사 산행을 통해 맥을 찾아다니느라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맥에서 벗어났다는 걸 한참 지난 다음에 깨달았을 때는 정말 울화가 치밀곤 했습니다. 표식기도 다시 싹 걷어내면서 헷갈린 지점을 되돌아가려면 진이 빠졌으니까요. 대간 종주 때도 힘들었지만 호남정맥 때는 대원 모두 낫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로 덩굴과 잡목이 우거졌습니다. 게다가 산줄기 높이가 낮고 시야가 나쁘다 보니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엉뚱한 지능선으로 빠지기 일쑤였죠. 혼자 나선 답사산행 때 대여섯 시간 걸린 거리를 다른 회원들이 1시간 남짓한 시간에 주파할 때는 맥이 빠지기도 했고요.”
박창서 회장은 “대간과 정맥을 종주하는 사이 내 나라 내 땅 사랑하는 마음도 깊어졌지만, 반면 개발에 의해 송두리째 파헤쳐지는 산줄기를 보면서 너무도 가슴아팠다”고 한다. 특히 아파트 공사로 산줄기가 아예 주저앉아 버린 용인 구성 지구를 지날 때는 분노까지 일어났다고 말한다.
“구성지구로 한남정맥이 지나가는데, 아파트 숲이 덮이면서 산줄기가 없어졌지 뭡니까? 그래서 아파트를 가로지르다가 CC카메라에 잡혀 무단침입죄로 고발당하기도 하고, 아파트 공사장에 들어섰다가 경비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저희들까지는 그래도 맥을 따라 잡았지만, 뒤에 오는 이들은 아마도 제 줄기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이런 일이 다 일제가 우리 산줄기를 왜곡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산줄기가 깎여나가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구 대장은 현재 9정맥 가운데 낙남정맥은 낙남정간으로 격을 한 단계 놓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산경표가 세상에 처음 알려질 당시 인용한 영인본에는 낙남정맥으로 나와 있지만, 뒤에 발견된 원본에는 낙남정간으로 나와 있다”며, “장백정간은 위쪽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라면, 낙남정간은 아래를 떠받치는 형국으로 다른 정맥에 비해 더욱 의미있는 산줄기”라 주장한다.
12명 모두 등산을 삶으로 생각
하산길에 들어서기 전 12대원은 다음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를 모은다. 이번에는 기맥이다. 우리 산줄기를 좇는 산악인들은 정맥에서 갈라진 산줄기 중 가장 긴 줄기를 기맥, 기맥에서 갈라진 산줄기 중 가장 긴 줄기를 지맥이라 일컫는다. 현재 기맥으로 일컬어지는 산줄기는 한강기맥, 땅끝기맥, 진양기맥, 예성북기맥 등 여섯 가닥이고, 지금도 조사중이다.
“대간 정맥 완주자들은 다음 달부터 지맥을 찾아나설 겁니다. 한 달에 두 차례씩 나서면 3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지맥도 종주해야겠죠. 지맥은 짧지만 가닥이 워낙 많아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한 명도 낙오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등산을 삶으로 생각하는 분들이시니까요.”
이구 대장은 “그 동안 대간과 정간 종주를 여러 선후배와 함께 하다보니 내 생활을 생각하고 즐길 기회가 거의 없었다”며, “오늘 산에서 내려가면 사나흘 집에 틀어박혀 쉬어야겠다”는 말로써 그간의 어려움을 나타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 날 하산길에서 6차 대간종주대원으로서 축하차 참가한 김천태씨(55)는 하산길에 발목 골절상을 당하고 말았다. 안내등산회라 사후 처리에 당황하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전화가 터지지 않자 일부 대원들은 급히 뛰어내려가 119 구조대에 연락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사고자를 간호, 결국 무사히 후송했다. 이것이 여러 해동안 능선 종주를 하는 사이 다져진 거인산악회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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