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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와 루터파와 감리교회가 동의하는 칭의에 대한 질문
2006년 7월에 한국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WMC)에서 7월 23일에 열린 에큐메니칼 예배에서 감리교, 루터교, 가톨릭의 대표들이 ‘칭의 교리에 대한 교리적 합의 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날 세계감리교협의회가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칭의에 대한 공동 선언문’에 동참한 것이다.
이 일은 루터교세계연맹과 로마 가톨릭이 지난 1999년 10월 31일에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칭의에 대한 공동 선언문’(JDDJ)에 서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측은 1986년에 ‘루터교-로마 가톨릭 합동위원회’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몇 차례의 모임 끝에 1993년에 칭의 교리에 관한 문헌의 초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에 합동 선언문 초안을 작성해 1997년에 합동 선언문을 완성했으나, 내부 합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공식 발표를 연기하던 중에 1999년 10월 31일 오전 독일 아우그스부르그(Augsburg)에서 당시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위원회 카시디 추기경과 루터교세계연맹의 크라우저 회장이 칭의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동안 세계감리교협의회는 JDDJ 문서에 나타난 칭의론의 기본적 진리에 대해 동의하고, 이후 가톨릭 및 루터교회와 지속적인 교류와 연구 모임을 가진 끝에 올해 서울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서 이에 동참한 것이다. 이 일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사람들은 세계감리교대회(WMC) 셋째날인 23일에 진행된 ‘에큐메니칼과 대화’에서 “이번 서명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감리교 신학자 제프리 웨인라이트 박사는 “루터교도 성화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고 가톨릭 역시 일반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은총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이제 감리교, 루터교, 가톨릭이 함께 대화하게 되는 역사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 제기
그러나 천주교회와 루터파 교회가 1999년에 동의하고, 이번 회의에서 감리교회가 동참한 칭의에 대한 공동 선언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또 루터나 칼빈 등의 개혁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종교 개혁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현대에 사는 개신교인들이 천주교회와 함께 선언한 것이라면, 그것은 20세기와 21세기 초의 맥락에서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을 버리는 것이 된다. 또한 개혁자들이 과거에 칭의에 대한 강한 선언을 하고서 천주교회의 칭의 이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라면, 이에 동의하는 오늘날의 루터파 교회와 감리교회는 성경적 칭의 이해를 버리는 것이 된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이므로 우리는 먼저 1999년에 천주교회와 루터파 교회가 같이 발표했던 공동 선언에서 칭의 이해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선언에서 천주교 신학자들과 현대 루터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 칭의에 대한 공통적 이해”를 말하고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5항).1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는 내용이 과연 어떠한가 하는 게 문제다. 사실 공통의 선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한 바로 뒤에 이는 천주교회와 루터파 교회가 칭의에 대해 가르치는 바 모든 것을 포함하진 않는다고 한다. 또한 칭의 교회의 기본적 가르침에 대한 의견 일치를 표현할 뿐 그것을 각 교회가 설명할 때의 차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그것이 교리적 정죄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5항). 그리고 각 교회가 칭의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언어, 신학적 설명,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그것을 18항에서 39항에 걸쳐 언급한다. 40항 참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교리의 관계, 교회론, 교회의 권세, 교회의 통일성, 사역, 성례들, 칭의와 사회 윤리의 관계” 등의 문제에서 서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며 칭의의 기본적 개념 일치의 빛에서 앞으로 이런 문제를 계속 탐구해 나가길 원한다고 한다(42항).
공동 선언 내용 중에서 동의할 수 있는 점
우리는 이 문서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선언하는 것에 대해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1)칭의의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15항). (2)“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성령을 받는 것이 오직 은총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 편에서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주어진다”(15항)2라고 말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19항).3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들로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그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거나 자신들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발생한다”(19항).4
(3)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삶과 십자가의 일을 설명하고 그것이 율법을 온전히 성취한 것이라고 한 후에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명들은 칭의 받은 자들에게 대해 계속해 타당성을 지니며, 그리스도께선 그분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표현했으므로, 그 하나님의 뜻은 칭의 받은 자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기준이다”(31항)5라고 율법의 제 3의 용도를 잘 표현한 것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 잘 말하고 있듯이 “선행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사는 기독교적 삶은 칭의의 뒤를 따르며, 칭의의 열매”이기(37항, 강조점은 필자의 것임) 때문이다.6 여기까지 말에 대해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이에 충실한 입장을 보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이 공동 선언은 그 이상의 말을 하고 있기에 전통적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그들이 강조한 성경적 가르침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이 문서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진다.
문제점
1. 변화한 신학적 정황의 산물
이 선언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 칭의”(justification by God's grace through faith in Christ)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말로 서로가 설명하는 것이 다름을 드러내면서, 그렇지만 같은 말을 사용하는 이상 근본적 진리를 같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그러니 서로 교리적 정죄하지 말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칭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손상시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그러나 역사적으로 변화된 상황에서 그런 식의 질문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대화 상대자들의 생각이었다.
이 선언문은 “그동안 교회들로 하여금 분리케 하는 문제들과 정죄들을 다시 점검해 보도록 하고, 또 그것을 요구하는 변화가 일어나 그 문제들과 정죄들을 새로운 빛에서 보게 한다”(7항)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공동 선언은 천주교회와 루터파가 그 정통적 입장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변화의 빛에서 읽혀져야 한다. 둘 다 성경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화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소위 근대와 현대에 나타나는 신학의 변화의 빛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우리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3항의 표현은 바로 이런 일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이런 변화된 분위기에서 이 선언은 천주교회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칭의하시는 행위에 동의함으로써 칭의를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일에서 ‘협동’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다(20항). 그 근거는 그런 개인적 동의 자체가 은혜의 결과요 사람의 본유적 능력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고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7 그러나 과거 개혁자들은 천주교회의 그런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그런 식으로라도 ‘협동’이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동의하는 새로운 루터파 교회는 천주교회의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교회라고 해야 한다. 또한 이를 받아들이는 감리교회는 알미니안주의를 넘어서 반-펠라기우스주의에로 나아가기로 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칭의에 인간이 기여한 것이 없음을 강하게 인정하면서도 선행의 ‘공로적’ 성격을 확언하는 것(38항)에서도 이런 점이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렇게 말할 때 그들은 성경적 증언에 따르면 이런 선행들에 대해선 하늘의 보상이 약속돼 있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에도,8 오히려 인간 행위의 공로적 성격을 다 버리고서 그러나 주께서 부족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신다면 그것을 말해야 한다.
3. 칭의와 성화를 섞어 이해하는 문제점: 종교개혁적 칭의 개념의 상실
이 공동 선언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대표적인 구절은 11항에 나오는 “그것(칭의)은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받아들여짐이다. 이는 이미 현존하는 것이며, 또한 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전히 있게 될 것이다”(롬 5:1f.)는 말이다.9 칭의가 현존함을 말하는 것은 좋으나 이는 장차 온전해짐을 시사함으로써 개혁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말할 때 강조한 영단번의 칭의 개념을 (최소한으로 말하면) 모호하게 하거나 (최대한으로 말하면) 부인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공동 선언의 작성자들의 의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결국 이는 칭의를 말하지만 그것을 성화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시켜 말함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혼동시켜 버렸다고 평가되는 전통적 천주교 사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를 주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27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서 말한다면 어느 정도 긍정될 수도 있다.
“천주교의 가르침이 칭의하는 은혜에 의해 이뤄지는 삶의 갱신을 강조하지만 믿음, 소망, 사랑의 갱신은 항상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대해 누구도 자랑할 수 없을 정도로 칭의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롬 3:27).10
그러나 칭의와 성화(삶의 갱신)를 일단 나눠 생각해야 한다. 칭의는 단번에 주어진 것이고, 성화(삶의 갱신)는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는 고전적 문제 제기가 항상 뒤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천주교회가 삶의 갱신이 칭의하는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우리가 칭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도록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이 진술과 같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는 구원을 끝까지 주장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 관계에서 온전함을 얻는 것은 영혼에 관한 한 죽음에서이고, 몸에 관한 한 부활 때, 즉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를 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칭의는 우리의 상태의 변화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선언되느냐에 관한 것이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선언은 그 자체가 영단번에 온전한 것으로 주어졌다고 봐야 종교 개혁자들의 의미가 살아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도 누리는 것이나 극치의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히 누리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옳지만, 이를 칭의와 연관시켜 사상사(思想史)를 무시한 채 말하는 것은 개혁자들이 말하는 칭의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결국 칭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의 문제다. 사실 이 공동 선언은 천주교회적 칭의 개념을 중심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4.2. ‘죄 용서와 의롭게 만듦’(Justification as Forgiveness of Sins and Making Righteous)이라고 표현된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칭의를 ‘의롭게 만듦’이라고 생각해 왔다(우리나라 언론계에서도 이 문서를 번역하면서 의화(義化)라는 용어를 사용해 그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이 문서는 천주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바로 의롭게 만든다는 개념을 칭의에 넣어 설명하고 있다. 27항의 다음 진술이 그 대표적이다. “죄인들에 대한 칭의는 죄들을 용서하는 것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드는 칭의하시는 은혜에 의해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11 여러 개념을 섞어 쓰고 있어서 명확히 칭의 개념이 드러나지 않고, 결국 의롭게 만든다는 전통적 천주교의 칭의 이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종교개혁적 칭의 개념 즉 법정적 개념이 상실된 것이다. 이 문서는 개혁자들의 칭의 개념보다 천주교적 개념이 주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8항의 다음과 같은 공동 고백의 뒤섞여진 용어 사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에서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칭의하며, 그 사람을 참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이라고 함께 믿는다”(28항,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4. 세례 중생설
또 하나 모호한 표현은 11항 등에서 나오는 “그것(칭의)은 세례에서 성령을 받음과 한 몸에 참여하게 됨에서 발생한다”(롬 8:1f., 9f.; 고전 12:12f. 참조)12는 어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이는 세례 중생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천주교회와 일부 루터파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런 입장을 취해 왔으므로 이에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이는 논의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이 문서에선 천주교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자들과 그것을 믿는 자들로서 세례를 통해 칭의된다”(27항)라고 말하고 있고,13 “세례에서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the grace of Jesus Christ imparted in baptism)에 대해 말하고 있다(30항). 또한 루터파의 입장을 진술하면서도 “세례와 성령으로 새롭게 난 사람”(the person who has been born anew by baptism and the Holy Spirit)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29항), 공동의 고백에서도 “우리는 세례에서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칭의하며, 그 사람을 참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이라고 함께 믿는다”(28항)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14 이런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5. 그리스도인의 죄된 성향에 대한 오해
이 공동 선언서 30항에서 천주교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천주교의 확신에 의하면 인간의 죄에는 항상 개인적 요소를 갖고 있는데, 칭의 받은 자들 안에 있는 죄된 성향에는 이 요소가 없으므로 천주교회는 이 성향을 참된 의미에서 죄라고 보지 않는다”15라는 매우 천주교적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개혁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점들
또한 16항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로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는다”(All people are called by God to salvation in Christ)라는 말도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서 그 뜻이 다양하고 또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다. 이를 복음의 자유롭고 진지한 제시를 뜻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개혁파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이는 그렇게 해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천주교회와 일부 루터파와 감리교회는 이런 표현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또 21항에 나오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인하는 표현도 일부 루터파와 감리교회에선 즐겨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개혁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전혀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맺는 말
이 모든 것을 들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독자들은 나름대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문서는 일부분에선 개혁자들의 칭의 이해를 버리고 오히려 천주교의 전통적 입장인 칭의와 성화를 같이 설명해 가는, 그리하여 그 독특한 특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문제와 다른 본질적 문제가 있는 이상 우리는 이를 참으로 바른 교회의 일치의 방향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이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다. (1)우리 교회는 이런 칭의 이해에 대한 동의에 과연 동의할 수 있는가? (2)루터는 과연 이런 칭의 이해에 동의할 것인가? (3)(이번 세계감리교대회에서 이 문서에 대한 동의와 관련해) 웨슬리는 과연 이런 칭의 이해와 동의할 것인가? (4)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런 이해를 옳다 하시며, 이에 근거해 보다 가시적인 연합에로 이끌어 가실 것인가?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여러 가지 다른 전통을 지닌 교회들이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경에 더욱 충실하려고 하며, 그 결과로 이전에 성경에 덜 충실했던 것들을 고치고 성경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의견의 일치를 나누며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교회의 하나 됨을 향해 나가는 것을 원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에큐메니즘의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성경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의견 일치와 가시적 연합의 추구는 결국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는 방향으로 일치를 추구해 가야만 한다.
주(註)
1. 9항에서도 칭의에 대해 비슷한 표현을 잘 표현하고 있다. “the ‘justification’ of sinful human beings by God's grace through faith (Rom 3:23~25), which came into particular prominence in the Reformation period.” 11항에서도 마찬가지다. “All this is from God alone, for Christ's sake, by grace, through faith in the gospel of God's Son”(Rom 1:1-3, emphasis is mine).
2. 바른 이해를 위한 15항 원문 대조: “By grace alone, in faith in Christ's saving work and not because of any merit on our part, we are accepted by God and receive the Holy Spirit….”
3. 바른 이해를 위한 19항 원문 대조: “all persons depend completely on the saving grace of God for their salvation.”
4. 바른 이해를 위한 19항 원문 대조: “as sinners they stand under God's judgment and are incapable of turning by themselves to God to seek deliverance, of meriting their justification before God, or of attaining salvation by their own abilities. Justification takes place solely by God's grace.”
5. 바른 이해를 위한 31항 원문 대조: “God's commandments retain their validity for the justified and that Christ has by his teaching and example expressed God's will which is a standard for the conduct of the justified also.” 또한 39항도 보라.
6. 바른 이해를 위한 37항 원문 대조: “good works - a Christian life lived in faith, hope and love - follow justification and are its fruits”(emphasis is given).
7. 바른 이해를 위한 20항 원문 대조: “When Catholics say that persons ‘cooperate’ in preparing for and accepting justification by consenting to God's justifying action, they see such personal consent as itself an effect of grace, not as an action arising from innate human abilities.”
8. 바른 이해를 위한 38항 원문 대조: “When Catholics affirm the ‘meritorious’ character of good works, they wish to say that, according to the biblical witness, a reward in heaven is promised to these works.”
9. 바른 이해를 위한 원문 대조: “It is acceptance into communion with God: already now, but then fully in God's coming kingdom”(Rom 5:1f).
10. 바른 이해를 위한 원문 대조: “While Catholic teaching emphasizes the renewal of life by justifying grace, this renewal in faith, hope, and love is always dependent on God's unfathomable grace and contributes nothing to justification about which one could boast before God”(Rom 3:27).
11. 바른 이해를 위한 27항 원문 대조: “The justification of sinners is forgiveness of sins and being made righteous by justifying grace, which makes us children of God.”(27항, my emphasis).
12. 바른 이해를 위한 11항 원문 대조: “It occurs in the reception of the Holy Spirit in baptism and incorporation into the one body”(Rom 8:1f, 9f; I Cor 12:12f).
13. 바른 이해를 위한 27항 원문 대조: “Persons are justified through baptism as hearers of the word and believers in it.”
14. 바른 이해를 위한 28항 원문 대조: “We confess together that in baptism the Holy Spirit unites one with Christ, justifies, and truly renews the person.”
15. 바른 이해를 위한 30항 원문 대조: “Since, according to Catholic conviction, human sins always involve a personal element and since this element is lacking in this inclination, Catholics do not see this inclination as sin in an authentic sense.”
이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