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두 가지를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는 축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일조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씩 질문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답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 1.
어느날 갑자기 저희 교회 전도사님(대학원 MDB과정 마친후에 대학원에서 더위의 과정 영어로? 를 하고 있음)이 교수님이 아래의 민수기의 축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면서 이 축도를 합니다.
제가 문의하는 것은 아마 목회자는 제사장의 직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평소에도 이 부분을 자주 강조합니다 : 사도적 직임, 예언자적 직임 등등..)이라고 이 축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축도에 대해서 쓴)목사님의 글을 보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1.
목사가 공예배에서 예배를 폐하기에 앞서서 축도를 하는 것은 교회적 모임을 가진 성도가 이 모임에서 흩어져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기에 이들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서 입니다. 목사는 예배를 집례하는 자로서 축도를 하는 것이며, 이것이 공적 집회에서 행해지는 것이기에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만이 행할 수 있는 특권이어서가 아닙니다. 하지는(J. A. Hodge)는 '장로교회 헌법'(Presbyterian Law)에서 "축도는 목사만이 할 수 있다고 함이 장로교회의 주장이다"라고 하였고, 우리나라 장로교회 헌법에서도 목사의 직무에서 "목사가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표하여 축복하고…"라고 말하고 있어서 축도(축복기도)가 목사의 직무로서 행해지는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는 성도가 함께 회중으로 집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예배를 가짐으로써 목사가 예배를 집례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때의 축도는 예배의 요소로서 공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행해지는 것이죠.
그러나 말입니다. 목사가 제사장의 직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축도권을 가지고 있어서 이 권한(권세)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이는 참으로 가당치 않습니다. 제사장은 구약 시대에서 왕과 선지자와 함께 존재하였던 직분입니다. 이 직분들은 모두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말해주는 것으로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의 언약에서 제사법으로 주어진 제사를 집례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로 맺어진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다른 직분인 왕과 선지자와 함께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직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직분은 말이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필요한 직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헌제제물로 드리는 희생제사를 영단번(永單番)의 성격으로 드림으로써 다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장에게 제사를 드릴 제물을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희생제사로 드려질 제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제사장의 직분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속 사역으로 제사장이 수행해야 할 제사의 직분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마쳐진 후부터는 제사가 더 이상 행해지지 않으며, 또한 제사장의 직분도 계속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의 신약 시대에서의 제사장의 개념을 '만인제사장'으로 설명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라고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언급을 하면서, 또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 라고 한 말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란 말은 '왕의 제사장들'이라는 말인데, 이는 왕의 다스림을 받는 제사장들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왕의 다스림을 받는 제사장들로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를 자신들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려 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이제 제사장은 특정 인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목사의 직분을 오해하고, 또는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서 왜곡시키는 자들은 목사를 제사장의 직분이라고 거짓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신약 시대에서 제사장의 직분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교회의 직분은 목사가 아니라 '집사'입니다. 왜냐하면, 집사는 '그리스도의 긍휼(자비)'을 베푸는 직무를 수행하는 봉사의 일을 함으로써 성도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박윤선은 '헌법주석'에서 바우만(H. Bouwman)의 말을 인용하여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자비를 배우며, 그리스도의 뜻을 돕기 위하여 자비를 행해야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특수한 의미에서 교회에 긍휼의 직분(집사직)을 세우셨다. 그리스도께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선지자직'으로는 (목사직을 통하여)가르치시고, '왕직'으로는 (치리장로를 통하여)다스리시고, '대제사장직'으로는 (집사직을 통하여)긍휼의 왕국을 보여준다."라고 하면서, "집사직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사역 성격을 보여준다."라고 집사직의 성격을 잘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자신들을 제사장 운운하다니요!. 목사가 이렇게 자신들을 제사장으로 내세우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현혹하는 짓인데, 자신들을 높이 받들어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런 저런 명목을 내세워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려고 하며, 성도들의 것(재물 등 등)을 도적질하려는 탐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만인제사장론으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해에 의해서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거룩한 제사장', 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 세상의 이방인들에게 보내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그들을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직분을 맡기셨다고 하는 의미에서입니다(롬15:16, 빌4:18). 이렇게 해서 만인제사장의 의미는 성경의 복음 진리를 이루는 중심 사상의 하나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온 땅에 택하신 자들을 불러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일군 된 직분을 맡은 자 라고 하는 것과 관련하여서 쓰고 있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만인제사장직은 교회적 직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자의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인제사장직이 이런 것이며, 만인제사장론을 성경 신학의 주요 사상으로 가르치고 있어서 신학을 배운 목사가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목사의 직분을 받아 사역하는 목회 현장에서는 성도들에게는 그들 각자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만인제사장 된 자라고 말하고 목사인 자신들에게 적용하기는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다."는 식으로 말하여서 성도 앞에 절대적 권한을 가진 자로 존경을 받고 군림을 합니다. 이는 말이죠. 성도와 목사의 관계성을 그릇되게 가져가게 합니다. 성도는 죄에서 구원받았으니 이제 성도는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를 잘 섬김으로써 곧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에 있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대제사장을 통해서 축복을 기원하게 하신 복을 받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요!. 성도는 자칭 제사장으로 있는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왕의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직접 제사장의 신분과 자격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 은혜를 받아 누리는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어떠한 그리스도인이건 간에 세례 받은 모든 신자(죄 사함을 받은 모든 신자)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도는 만인제사장으로서 주 안에서 함께 복음의 사귐을 갖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대제사적 축도'이든, 사도적 축도이든, 여기에서 기원되고 있는 내용이 지닌 의미를 따라서 기원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축도를 공예배에서 회중에게 할 때는 당연히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가 합니다. 이를 교회 헌법에 "목사만이 할 수 있다."고 그 자격 여부를 못 박아 놓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회 예배의 질서 속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가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도와의 믿음의 교제 속에서는 모든 성도가 서로를 위해서 갖는 기도로서 가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는 구원론적인 축복,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지를 쓰거나 요즘에 사용하는 메일이나 핸드폰 문자를 보내면서도 축복을 기원하는 말을 합니다. 그 축복을 기원하는 단어가 '축도'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가 교회에 보낸 인사에서 볼 수 있는 말인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7, 고전1:3) 라고 하거나,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7) 라고 하거나, 이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하여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라고 하는 등의 기원인 것입니다. 이 기원에, 이것을 할 수 있는 특정한 자격과 신분을 갖춘 자가 있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자가 있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강조하여 말하거니와, 축도는 '축복 기도'이며, 이는 '기원'(祈願)입니다. 목사가 예배에서 성도인 회중들에게, 그리고 성도가 성도의 모임 자리에서 함께 믿음의 형제된 자들에게 갖는 마음이요 그 원함입니다. 그들 안에 품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목사는 예배 의식에서 축도를 두 손을 들고 합니다만, 이것이 성도가 성도의 모임에서 아무런 손을 드는 것이 없이 단지 함께 한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기도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축도하는 것이 아닌, 손을 들지 않고 축도한다고 해서 성도인 회중들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가 훼손을 당하거나 이로 인해서 축복의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축도를 하건 하지 않건 간에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는 그에게 주어질 복의 완성을 본 자입니다. 그럼에도 축도의 의식(儀式)을 갖고, 또한 성도가 교제의 자리에서 축복을 기원하는 것은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오니, 공예배에서 목사가 한 축도를 성도들 또한 믿음의 형제들과 사귐을 갖는 교제의 자리에서 얼마든지 사용하세요. 축도 방식을 흉내내어서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기원으로서 말입니다.
질문2.
님은 '축도'와 함께 '십일조'에 관해서도 질문을 하였습니다.
"십일조에 관하여 여러 의견들을 보고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도 십일조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십일조 언급부분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답변2.
십일조에 관하여 여러 의견들이 있다고 하지만, 두 가지 이죠. 하나는 지금도 십일조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은 십일조가 폐지되었으며 성도를 섬기는 연보(헌금)로 믿음의 자유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님은 초대교회에도 십일조가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 때로부터의 교회에 관한 연보(헌금)에서는, 그러니까 초대교회에 관한 연보(헌금)에서는 십일조가 다루어지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 십일조가 행해졌다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왜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가 행해지지 않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십일조가 행해졌는데 말이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십일조가 행해졌습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에게서는 율법으로 주어진 의무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릴 제사를 위하여 맡은 봉사할 일을 인하여 가나안 땅의 분배가 없는 레위 지파를 지원하여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레위 지파에게서는 그들이 받은 기업은 '땅'의 일부분이 아닌 자기 동족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바로 그 자체였으며, 또한 이들의 주가 되신 '여호와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분배한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장차 '메시야'(그리스도)로 오실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땅의 실체였으며, 그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12지파 중에서 11지파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이를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그들의 소유의 것이 아닌 '여호와의 것'이며, 그러기에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살아갈 자로서 그들의 생명을 보살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땅에서 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얻은 소득에서 십분의 일을 성전을 관리하며 제사 드리는 일을 봉사하는 레위 지파에게 드리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그들이 얻은 기업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레위 지파는 '여호와의 것'인 십일조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보살펴 나가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11지파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듯이 동일하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의 땅 안에 거하는 자기 백성의 생명을 돌보십니다.
십일조는 이렇게 레위지파를 섬기는 것으로 드려지는 것 외에도 고아와 과부 및 객들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3년에 한차례씩 십일조를 하였으며, 또한 절기를 지키면서 들어가게 되는 소비를 위해서도 십일조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서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십분의 일' 개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드린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 아닌 레위지파와 가난한 자를 섬기며, 절기를 지키는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이 모두는 성전의 관리와 이 안에서 행해지는 제사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두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나타나져야 하는 필요성이 있게 되는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도록 한 것이기에 십일조는 사실은 '하나님의 풍성한 글휼하심(자비로우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서는 세 가지의 십일조를 통해서 하게 하셨던 것이며, 그 십일조는 소득의 약 25% 이상이 드려졌습니다.
레위 지파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을 맡아 봉사하는 것은 단번에 자신의 몸을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려 다시는 짐승으로 제물을 드리지 않게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마쳐졌습니다. 이는 절기를 따라서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속죄 사역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이것이 있기 전까지 존재해 왔던 제사법과 절기법과 성전법은 그 하는 일이 성취되어서 다 완성되었으므로 폐지되었으며, 여기에 함께 따랐던 십일조에 관한 율법도 같이 폐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사와 절기와 성전과 관련한 의식법(儀式法)이 폐지되어서 더 이상 그것이 사람을 그 의식법(율법)아래 두고서 제도적으로 법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시며 절기의 날이며 성전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들이 갖는 율법의 성취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에 의한 구속의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그 믿음에 있는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가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에서,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나타나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은 십일조란 항목으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용어는 우리말 성경으로서는 '성도를 섬기는 일'(고후9:1)이었다는 것이요, '연보'였습니다(고후9:5). 이들이 행한 성도를 섬기는 일로서 가진 연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고린도후서 8-9장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연보를 하게 되었으며, 이를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연보에서 나타난 특징은 고린도후서 8장 14절에서는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이죠.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에 있었습니다. 종합하여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더함도 없이 그리고 모자람도 없이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생명의 주'이신 까닭입니다. 이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연보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긍휼(자비)를 알게 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 연보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땅에서 나는 양식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서 공급되어지는 '인자의 살과 피'에 있으며, 이를 먹고 마시는 자가 주께 대하는 것이, 자기 소유의 부정입니다. 곧 주님 한 분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 이것으로 나타나지는 것이 자기 안에 계신 주이신 그리스도의 긍휼의 공급인 연보입니다. 이를 통해서 성도는 가진 자도 그리고 없는 자도 다만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음으로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초대교회에서 십일조가 행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 곧 신약 성경에는 그 어디에도 십일조란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참조, 눅11:42)라고 말하여 십일조를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서 이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려오고 있는 가운데서 하신 말씀입니다.(눅18:1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들어서 현하 교회의 목사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이겠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십일조 제도를 신약 시대의 교회도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던 당시는 초대교회가 세워지기 전의 때에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시는 것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의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는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아직 율법 아래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십일조 언급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옛언약을 성취하시기까지는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자의 위치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는 아직은 구속 사역을 진행해 나가는 때에 있으므로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여전히 제사와 절기와 성전에 관한 의식법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도 친히 여러 절기들을 지키셨으며 또한 의식 규례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바른 준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신명기 14장 22-23절에서 명령하고 있는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데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렸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양념에 쓰이는 채소에 이를 만큼 십일조의 적용을 세세한 부분에까지 적용하여서 지켜나갔습니다. 그래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세심히 관심을 쓰며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십일조 생활을 인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들이 아직은 십일조의 율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해온 대로 그 모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단지 그러한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율법에 따라 바치는 그들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십일조의 율법 준수는 그야말로 작은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가장 중요한 율법의 준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정의)와 인(자비)과 신(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설사 십일조만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기까지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무시하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의와 인과 신을 행하여 나가는 참으로 큰 율법을 지켜 나가고 있는데, 사람의 식탁에 오르는 양념에 쓰이는 채소의 십일조를 하는 세세한 규정들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예수님의 십일조 언급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 사역을 진행하시는 과정에서 아직 십일조의 율법 아래 있는 바리새인에게 그들이 이것을 가지고서 외식하는 믿음을 책망하는 데서 있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로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지적하며,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을 말하고자 해서이지 구약에서 행해져온 십일조의 율법을 신약 시대에서도 계속해서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서 시행해야 할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율법 아래 놓여져 있었을 때에는,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의 율법을 준수해야 할 때에는 그것들을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진실함으로 올바르게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율법이 말씀하고 있는 모든 요구를 다 성취하신 후에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종 되어 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는 제사법과 절기법과 성전법에 속한 십일조의 율법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5-16절에서 "원수된 것 곧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였으며, 또한 골로새서 2장 14-15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말한 후, 16-17절에서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23절에는 말이죠. 그럼에도 이런 것을 따라서 행하게 하는 것은 자기 육체에 괴로움을 주어 괴롭히는 것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기자(바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옛언약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멜기세덱의 대제사장직과 새언약의 대제사장직을 통해서 설명하였습니다(히7-8장).
한국교회가 십일조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민감함이 예수님의 십일조 언급을 초대교회의 십일조 준수로 임의적으로 적용시켜 나가면서 오늘날에 교회에 주어진 준수해야 할 것으로 가르쳐져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일조 언급을 십일조의 바른 이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알고자 하는 것으로 다루어가야 하는데, 이를 탐심으로 가져나가서도 안 됩니다. 십일조에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외면하고 자기를 위하는 태도를 가져나가는 것이 십일조의 의미를 바로 이해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는 재물을 신(神)으로 섬기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인 지체들과 함께 하시는 긍휼하심을 사람들이 이렇게 가져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십일조로 해야 하느냐?, 아니면 연보로 해야 하느냐? 이것이 지금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되고 어떤 것으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헌금(연보)의 원리를 말해주어도 그것을 십일조란 이름으로이든 아니면 연보란 이름으로이든 자기 식으로 임의로 가져나가는 것이 악한 죄성을 띤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굳이 구약에서의 십일조란 이름을 고집하고 나갑니다. 또는 그렇게 연보란 이름에 '자유'란 말을 붙이고 '믿음의 분량껏'을 외치고 싶어합니다. 성경적 규명으로서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헌금을 하고자 하기에 말입니다. 십일조이든, 연보이든 그 드리는 헌금이 '자기 것(소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드리면서 하나님과 종교적인 거래(去來)를 하려고 들죠.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는데 무성하게 해 주시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는데 열매가 많게 해 주시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별로 없는데 소출을 많이 거두게 해 주시며, 밭에 식물이 없는데 밭마다 가득히 채소가 넘쳐나게 하시며, 외양간에 소가 없이 비어 있는데 쌍태의 새끼 밴 암소가 있게 해주시며....."(참조, 합3:17). " '넘치도록 부어 주는 복을 너희가 받을 것이다' 라고 했으니 밭과 포도원에서 병충해를 제거하여 곡식과 나무마다 열매가 풍년이 들게 해 주셔야 합니다"(참조, 말3:10-11) 라고 말입니다. 이 모두가 아니면, 그 행한 헌금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고 하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라도 받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연보는 '자기 것'을 부정케 하시며 '그리스도의 것'을 인정케 하셔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을 입게 하시는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하여 연보를 한 마게도냐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 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고후8:1-6).
교회법에 같힌 교회를보면 답답 함을 느낌니다 교회법에 축도는 목사만이 할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목사만 축도 할수있다 전도사는 안된다 그럼 민인제사장이란 것을 말하지 말아야하고 성경도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하는것 아닌가요? 이것도 질서 아닌가요? 성경이 우선이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안되는 것이 잘못된것이 아닌가요? 잘못된 것을 향해 가는 교회...... 법을 성경보다 존중해가는 교회
첫댓글 목사님 이제 정리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교회법에 같힌 교회를보면 답답 함을 느낌니다 교회법에 축도는 목사만이 할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목사만 축도 할수있다 전도사는 안된다 그럼 민인제사장이란 것을 말하지 말아야하고 성경도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하는것 아닌가요? 이것도 질서 아닌가요? 성경이 우선이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안되는 것이 잘못된것이 아닌가요? 잘못된 것을 향해 가는 교회...... 법을 성경보다 존중해가는 교회
감사합니다....죄인인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그래서 날마다 죽어야 하고 죽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