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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를 이룸에 대하여
앞서의 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와 '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의 역사와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이해를 가져왔습니다만, 이제 여기에서는 '개혁교회를 이룸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에 의해 시작되고 칼빈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평가되는 교회개혁은 크게는 둘로 구분되는데, 신앙의 개혁과 예배의 개혁입니다.
Ⅰ. 종교개혁기의 교회개혁 : 신앙의 개혁
루터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개혁에 있은 교회개혁이 어떤 것인지는 1517년에 그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내 걸은 ‘95개조 논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하나하나에서 당시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 실정이 고발되며 교회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데, 교회의 면죄부(속죄부) 판매에 의한 ‘선행(돈)으로 속죄를 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선행(돈)으로 속죄의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수 없었으며, 이를 침묵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에 의한 비신앙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청은 루터의 설교에 눈을 감고 귀를 닫음으로써 아무런 개선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개선의 여지가 전혀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1)를 내 걸고 기존 교회와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들어감으로써 종교개혁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95개조 논제의 원제목은 “면죄부(免罪符)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입니다만, 우리에게는 ‘95개조 항의문’ 또는 ‘95개조 반박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95개조의 명제는 내용상 일반적으로,
1. 속죄에 대한 규정(1-4조)
2. 교황의 사죄권의 한계(5-7조)
3. 교회법이 부과한 속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연옥 영혼에 대한 구원문제 취급 (8-29조)
4. 면죄와 참회 그리고 사죄문제(30-40조)
5. 면죄부의 구입과 면죄시행의 남용(41-52조)
6. 면죄설교와 복음설교의 가치비교, 교리의 보화, 면죄부 판매 설교의 과장 등 (53-80조)
7 면죄부 남용에 따른 평신도의 산발적 질문과 면죄시행에 대한 공박(81-91조) 8.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생활 언급(92-95조)
으로 나뉘는데,
(1) 회개의 삶을 강조하고 사제들에 의해 집행되는 고해성사 즉, 고백과 속죄는 불필요하다.
(2) 면죄부는 죄책감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교황 자신이라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 일은 자신의 수중에 보전하셨다.
(3) 면죄는 죄에 대한 처벌을 교황이 사면 할 수 없다. 그 사면권은 역시 하나님 에게만 있다.
(4) 면죄부는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다. 교회가 부과한 처벌은 오로지 산 자에게만 적용되며 사망이 그러한 처벌을 취소시킨다. 연옥에 있 는 영혼에게 교황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도에 의할 뿐이지 자신의 관 할권이나 열쇠의 권한에 의해서 자신의 힘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 참으로 회개하는 신자라면 면죄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이며 면죄부는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참된 회개를 요 구하신다.
(6) 사람을 낚는 그물인 공로의 보화는 불필요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 을 받는다. 십자가를 외치고 하늘나라를 들어가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와 함께 하는 많은 고난을 받음에 있다.
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이를 통해서,
(1) 속죄(면죄)의 유일한 권세(권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2) 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 는 믿음으로 얻는다.
(3) 그 믿음으로만 그리스도를 따라서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
는 신앙의 개혁에 있었습니다.
이에 의하여서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개혁교회의 입을 통해 말해져 왔습니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서 있어온 신앙의 개혁에 의한 교회개혁은 칼빈을 통해 더 큰 결실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크게 두 가지에 의해서 있게 됩니다. 하나는 칼빈의 성경주석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그의 신구약 성경 주석은 곧 그의 설교였으니 성경의 해석에 의한 설교였습니다. 이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설교가 교황의 해석과 설명이 교회에 하달되는 교황의 권위에 두고 있는 것에 반하여 개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에 의해서 성경이 해석되어 설교되는 것에서 교회의 자리에 성경의 권위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8에서의 성령의 권능에 의해 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어 전파될 것과 요한계시록 1:9-20에서의 각 교회에 세우신 사역자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심에 있는 감동하심에 의해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에 의존함에 있는 것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구약 성경 주석과 그에 따른 설교에서 말해지고 있는 신지식을 신학의 체계로 정립함으로써 오늘날 성경론,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내세론(종말론)을 다루는 조직신학(교의신학)의 근간이 되는 기독교강요2)를 저술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그 모두는 “~를 아는 지식”에 있게 하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에 의해서 올바른 신앙을 가져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있어나가는 것으로 칼빈은 교회에서는 성경 강론에 의한 설교와 함께 신앙고백문답서를 작성하여 가르침에 힘썼으며, 제네바 아카데미(제네바신학교)를 세워 개혁교회를 세워나갈 목회자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칼빈의 교회개혁은 한 나라에서의 교회개혁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전역으로, 그리고 후에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그리고 아시아를 비롯하여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개혁교회가 지녀온 참된 신앙인 신지식에 있는 개혁주의 신앙에 교회가 있게 하였습니다.
Ⅱ. 종교개혁기의 교회개혁 : 예배 개혁
종교개혁에 의한 교회개혁은 루터와 칼빈 모두 신앙의 개혁과 함께 예배의 개혁에 있은 것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한 두 사람 간의 개혁은 동일한 개혁에 있었으면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차이를 갖는 두 사람에 의한 예배 개혁과 그로 인한 개혁교회의 예배의식을 함께 보겠습니다.
루터의 예배 개혁
루터(A.D. 1483-1546년)는 카톨릭교회의 예배가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 사역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에서 제사를 통해 예표해 주시고 있는 십자가에 의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미사를 통해 재현하는 것에 있음으로써 기독교를 우상숭배 종교로 다루고 있는 것에 칼을 대 제거 하고,3)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희생제물이 되신 단 한번으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에 의한 구원을 받음에 있는 새생명에 있는 예배를 드림에 있는 개혁을 해 나갔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루터는 로마카톨릭교회가 행해온 미사에 의한 예배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루터는 카톨릭교회에 의해서 행해져 온 예배의 전통을 바꾸기보다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복음에 위배되는 것만을 제하고서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것을 강조하여 지켜가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로마카톨릭교회의 미사가 설교 없이 성례전만 집행되는 것에 반대하여 설교가 없으면 또한 예배도 없다고 한 그의 사상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존하지 않는 곳에서는 참된 믿음의 신자도 없으며,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복음 선포가 예배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보고, 그 말씀과 함께 하는 성례전을 중시함으로써 말씀선포와 함께 성례전의 시행을 교회의 표지가 되는 두 기둥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루터교회 예배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거행되는 곳에,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실제적으로 재현된다.”
칼빈의 예배 개혁
루터에 이어 칼빈(A.D. 1509-1564년) 또한 예배 개혁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에는 예배 개혁에 차이가 있습니다. 루터는 복음의 진리가 건드려져 훼손 되지 않는 한에는 미사에 사용된 의식의 형태나 교회 안에 존재하는 형상들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시행해 오던 성상 숭배는 반대했지만, 성경에서 금지로 다루지 않은 다양한 찬송들과 예식들을 예배의 내용으로 허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 본성의 악함에 의한 미신적인 것들의 우려를 가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것들로부터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그것들을 폐지하는데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첫째로, 명령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들은 그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그것들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 둘째로, 건덕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어떤 종류라도 받아들여진 것이 있다면, 바로 제거해야 하고, 그저 추문만을 일으키는 것들은 무엇이든지간에, 더 강력한 이유로 없애야 한다. 그것들은 우상숭배와 거짓된 의견의 수단이기 때문에, 조금도 관용을 베풀 이유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보듯이, 루터보다 26년 늦게 출생하여 종교개혁에 있은 루터를 깊이 존경했던 칼빈이지만, 예배의 구성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달랐습니다. 이는 칼빈이 쓴 『세례 시행에 관한 규칙』 (1542)의 마지막 결론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 시행하는 여러 가지 예식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그것들이 오래된 것이 아니라서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고안해냈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권위도 없이 개발해낸 것들이기에 거부하는 것이다."
예배의 방식과 내용을 정립함에 있어서 칼빈이 루터와 다른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루터는 유대인의 율법준수와 같은 엄격한 의무조항과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대조시킵니다. 루터는 구약 성경에의 율법 조항과 복음 아래서 보다 자유로운 입장과를 대조시켰습니다. 루터는 (1) 형상이나 형태를 숭배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 그 계명의 금지조항에 어떤 형상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고, (2) 복음으로 대체된 후에는 형상들이 교육적으로 유익한 도구들이 될 수 있으며, (3)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우상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상처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복음의 기본들을 훼손시키지 않는 한에는, 형상들을 파괴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교회 당 안에서 각종 형상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1520년대 중반에 칼 쉬타트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형상에 대한 루터의 기본 입장은 로마 가톨릭과 별반 차이가 없으며, 단지 적용에서만 차이가 날 뿐입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믿음으로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참된 교리를 근거로 삼기만 한다면, 나머지 적용의 문제는 포용적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원리에 거슬리는 것들은 제거하지만, 그 외에 것들은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악함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에로 나아가는데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로 있어왔음을 로마카톨릭교회를 통해서 겪어온 칼빈은 오직 진리에로 집중해 나감에 마음을 빼앗기며 방해받을 수 있는 것은 예배의식에서도 또한 교회 내에서도 모두 제거하는 개혁에 있었습니다.
그런 칼빈은 예배의 개혁에 있어서 가장 강조하고자 했던 부분은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공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분명히, 우리가 의로움을 얻는 가장 중요한 기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뒤집혀 버린다면, 마치 건물들이 서로 떨어져서 붕괴하듯이, 모든 의로움의 회중들이 파괴되고, 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런 칼빈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합당한 예배를 두 가지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경건이 실천에서 진보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길은 (1)공적인 예배에 출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2)성례에 참여하는 것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칼빈은 그럴 수 있기 위해서 비록 마틴 부써의 예배모범을 수용하여 따르는 것이었지만, 이는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는 정신과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의해서 제네바 교회의 예배의식을 만들어 교회가 사용하게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들음과 여기에 연결된 성례에 참여하는 이 둘에 온전히 집중해 나갈 수 있는 순서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기도와 찬송이 예배 요소로 있어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언제나 올바로 갖도록 하였습니다.
‘칼빈의 예배개혁과 직분개혁’에서 저자는 "참된 예배는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미사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사람의 정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성령)과 진리'로, 곧 성신님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여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고 그 자리에 친히 임재하셔서 복음의 강설로 다가오시고 구원을 선언하시면, 성령의 은혜로 그것을 깨달은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빈궁함을 그분께 고백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삼위 하나님과 교제합니다.”라고 하면서, “참된 개혁은 사람이 개혁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이 매 주일 개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혁하시고, 사람은 그분의 말씀으로 개혁되는데 이것이 예배에서 볼 수 있는 참된 개혁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개혁교회의 예배의식
우리나라에서 개혁교회를 이룸에 있는 교회를 보면 대개의 경우 ‘OO개혁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가 지역 이름을 따서 'OO교회'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개혁이란 글자를 넣어서 'OO개혁교회'라고 하는 것은 개혁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잇는 교회이고자 하는 것에서입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만 개혁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잇는 것에서만은 아닙니다. 개혁교회가 있어온 그 실질에 있는 것에서입니다. 그것을 다음 두 가지에서 생각합니다. 하나는, 개혁교회의 예배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개혁교회 신자들이 살아온 신앙을 따르는 것에서입니다.
먼저, 개혁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봅니다. 이승구교수는 ‘장로교회의 예배 이해와 장로교 예배 모범의 전통’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서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προσκυνέω)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이 말해주고 있는 우주적 예배의 정황(계 5:13)을 미리 이 땅에서 선취하여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최후의 할렐루야 찬양은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 가운데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하늘에 천사들과 온전케 된 성도들과 다 함께 모여서 그 천상의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 이런 우주적 예배에 참여하는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도록 명령하신 것이고,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당위이다. (2) 그러므로 기독교회가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카슨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성경적 종교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성, 다시 말해서 예배”이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역사상에서 교회가 그 예배를 주께 드리는 방식을 이해해 온 것은 상당히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보게 됩니다. 교회가 행하고 있는 일반적 예배의식을 보면, 개교회간에 차이가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대개의 경우 주일예배의 순서는 대체적으로는 예배안내 - 예배부름 반주(전주) - 예배부름 낭독 – 찬송 – 신앙고백 – 찬송 – 기도 – 말씀선포 – 헌금 – 찬송 – 축도 - 예배마침 반주(후주)의 순서에 의한 의식 진행에 의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보면 예배의식으로 정해진 기도 외에도 말씀선포 전에 말씀선포를 위한 기도도 함께 하고, 말씀선포 후에도 말씀선포에 따른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한 후에도 헌금을 위한 기도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의식에 비해서 개혁교회의 예배의식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용했던 예배순서(1542, 1545 예배의식 참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배부름
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
사죄의 선포
시편 찬송 : 운율 시편
십계명
성령의 임재와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말씀
설교
성례(*칼빈은 매주 시행하기를 원했으나 매월 1회 실시 되었음)
헌상(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헌금)
회중을 위한 기도
주기도문 암송과 해설
사도신경(목사 혼자 하며, 성찬예식이 있는 주일에는 성도들과 다같이 함),
시편 찬송,
축도
이러한 제네바의 예배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성격을 이남규교수는 '개혁교회 예배모범을 통해 본 예배순서와 요소'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 제네바의 예배는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아멘”의 기원과 함께 시작합니다.
2) 다음은 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가 뒤따릅니다. “주 하나님, 영원하신 전능하신 아버지여, 우리가 주님의 거룩하신 위엄 앞에서 비참한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나이다. 우리는 불의와 부패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나 악을 행할 수 밖에 없고, 모든 선에 대하여 무익하며 우리의 잘못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주님의 계명을 범하는 자들입니다. …”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혜를 날마다 더 부어 주셔서 의의 열매를 맺기를 간구합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목사는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사죄를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습니다.”(행 10:43).
3) 다음으로 사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찬송이 뒤따른다. 제네바에서는 시편에 곡을 붙인 시편 찬송을 불렀습니다.
4) 찬송 후에 목사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함을 권고합니다. 1545년에 개정된 예배모범을 따르면 찬송 후에 목사가 십계명의 첫 번째 부분을 읽도록 되어 있습니다. 1542년 판에는 율법의 3사용에 대한 설명이라면, 1545년에는 십계명 첫 부분(1-4계명)을 낭독한 것입니다. 이후 회중이 찬송할 때(1545년 개정판에서는 두 번째 부분을 부를 때), 목사가 설교단에 오릅니다.
5) 설교단에 오른 목사는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기도-주기도-시편찬송-조명을 위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기도에서 우리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구하며, 성령님이 참된 지식으로 이끌어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의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종으로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구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이어서 합니다. 시편찬송을 부른 후 설교자는 조명의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에서 성령의 은혜를 구합니다. 말씀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신실하게 설명되어지며, 교회가 세워지고,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6)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합니다. 설교는 매주일 성경 본문이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임의로 택하는 것이 아닌 성경 한 곳의 강해에 의하여 순차적으로 행해졌습니다.
7) 설교가 끝나면 헌금이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목사는 여러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권세자들을 위해서, 목사들을 위해서, 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데 아직 주님을 떠나 어둠속에 있는 자들이 구원의 바른 길로 돌아와 아버지와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이미 믿는 이들을 위해서는 주님을 한 마음으로 높이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흩어진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참석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8) 목사와 함께 회중의 주기도문 암송이 있으며, 목사가 주기도문의 간략한 해설을 합니다.
9) 목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합니다. 그러나 성찬예식이 있는 주일이면 성도들과 함께 다같이 하였습니다,
10)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후에는 시편 찬송을 부릅니다.
11)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이는 아론의 축복과 함께 회중을 떠나보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보게 되는 제네바 예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 첫째 부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온 언약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인이어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설수 없음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하여 은혜를 구한다. 사죄가 선언되면 하나님의 백성은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확인한다(십계명). (2)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순서다. 강단에 오른 목사는 회중과 함께 기도한 후 시편찬송을 부르고, 특히 조명을 위한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한다. (3) 세 번째 부분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순서다. 여기서 회중은 시야를 넓혀 복음의 전파와 온 세상에 흩어진 교회로 향한다.
이러한 예배의식은 로마카톨릭교회가 행해온 순서에 비하면 현저히 간추려진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남규 교수는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적 예배를 근원으로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예배가 되게 했다. 개혁교회의 예배모범에서 예배시간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만 서는 시간이어서, 하나님께만 집중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섬김을 받으시길 원하시는지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시어 알리시는 길 외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와 관련해서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이 알리신 내용에 따라 우리의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섬김을 받던지 하나님께는 상관없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이 친히 계시하신 내용을 멀리 치우고, 하나님의 지시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느낌을 따라 자신의 필요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덧붙여 외적예배의 근원인 내적예배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배가 근본적으로 내적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방식은 예배의 의식주의에 의한 외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예배의 복잡한 의식에서 벗어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예배가 되게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 만들어졌을 때, 찰스를 위한 국교회 사제 헨리 해먼드가 반대했던 주된 이유는 그 단순성과 간소함에 있었습니다.
장로교회에서의 예배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의 뿌리에 제네바 예배모범이 있다는 면에서 제네바 예배모범과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비교할 가치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스코틀랜드 (개혁)장로교회의 예배 예식서(1564)와 비슷한데, 스코틀랜드 예식서가 제네바에서 사용되었던 존 낙스의 예식서의 영향아래에 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성경봉독이 스코틀랜드 예배예식서에는 빠져 있지만 실제로는 행해졌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예배가 갖는 특징은 (1) 예배 전 행사로, 함께 모여 성경강해를 듣는 시간이 있고 고백기도, 시편찬송, 신구약성경봉독을 한 후에 (2) 목사가 사회를 이어받아 기도함으로써 예배의 정식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위한 기도, 주기도문, 사도신경, 시편찬송 축도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 이르면 사도신경고백이 생략되고 주기도문도 하나의 권고로 그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교회 예식주의의 특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권고하는 주기도문마저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교회에서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의해 시작된 장로주의를 따르면서도 장로교회가 고백할 신앙고백으로 영국에서의 웨스트민스터교회 회의(1641-1648)를 통해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문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대신앙고백문답서,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서)에 의한 예배지침서를 통해서 확증된 예배의식의 순서에 따릅니다. 청교도들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예배지침서에 의한 예배순서에 의하면,
예배부름
은혜와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읽기(구약과 신약에서 한 장씩)
시편 찬송
죄 회개와 중보기도
설교
감사와 간구의 기도
회중을 위한 기도와 주기도문,
시편 찬송
축도
예배마침
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순서가 지금까지 장로교의 전통적인 예배순서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 따른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배로 부름이 있습니다. 회중이 모이면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예배하도록 회중에게 요구한다.
2) 예배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가에 대한 인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기를, 말씀으로 은혜주시기를 구합니다.
3) 성경봉독, 구약과 신약을 둘 다 순차적으로 봉독하도록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성경봉독을 공예배의 한 요소로 정하면서,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종속을 인식한다고 설명합니다. 성경봉독 후엔 해당내용을 길지 않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4) 시편 찬송이 있습니다.
5) 그 후에 설교 전 공적 기도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설교하는 목사가 공기도를 하도록 했습니다. 무엇을 간구할지 보여주는 기도예시문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데, 이것에 의하면 (1) 그 시작을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하도록 함이 핵심임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예시문의 앞은 죄를 어떻게 고백할지 어떻게 은혜를 구해야 할지가 차지합니다. 우리가 가진 원죄와 자범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줍니다. 몇 가지 열거하면 자범죄에서 우리가 범한 죄, 권세자들의 죄, 목사들의 죄, 온 나라의 죄를 고백합니다. 마음의 강퍅함, 하나님의 선하심의 풍성함을 멸시한 죄, 열심 없음의 죄. 이런 죄의 고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여 우리가 이 생애에서 일시적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고, 후에 불과 유황 못에 버려져서 영원히 슬퍼해도 마땅함을 인정하는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후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고, 약속을 의지하여서 긍휼을 구하여, 사죄와 화목의 완전한 확신, 위로, 평화를 인치시고 상한 마음을 가진 자를 싸매어 주시기를 구하고 성화에 대해 간구합니다. (2) 일종의 죄 고백기도를 이렇게 드린 후, 이제 다음의 주제들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길게 권고합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위해서, 권세자를 위해서, 주일성수를 위해서, 은혜의 방편의 유익, 특히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기도합니다. 이 긴 기도를 한 번에 할 수도 있고, 형편에 따라 일부분을 설교 후에 미룰 수도 있습니다.
6) 설교가 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설교준비를 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전달할지 상세히 설명합니다.
7) 설교 후 기도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이 항목을 따로 한 부분으로 설명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설교 후 기도는 둘로 나뉘는데 여기서 (1) 먼저 감사와 설교내용이 열매 맺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2) 이 기도 후에 회중을 위한 기도가 있으며, (3)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8) 시편 찬송을 합니다.
9)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해산합니다.
여기서 중요시 여길 것은 예배의 중요한 네 가지 요소는 변함없지만 예배 순서는 시간이 자나면서 약간의 변형되었다는 점입니다. (1)예배부름 (2)회개기도와 중보기도, (3)찬송과 (4)성경읽기와 설교 등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에 비하여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고백은 성례식과 관련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헌금시간이 따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도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칼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순서에다 삽입하는 것을 용납하기는 했지만, 1549년 이후의 자신의 예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헌금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개혁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실천입니다.
또 하나 눈 여겨 볼 것은 예배 기도가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져진 목회기도는 한국식처럼 장로나 평신도를 대표하여 누군가가 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와 사죄를 위한 기도와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및 중보기도를 나누어서 두 번 대표기도 시간을 가습니다. 이 부분을 오늘날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에서는 하나로 묶어 목회기도로 목사가 합니다.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 예배 기도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은 17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배에서도 보게 되는 것인데,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처럼 죄고백 기도와 사죄선언을 따로 넣지 않고 설교전 기도에서 포함하여 기도하는 예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의 기도의 특징은 예배 시작에 드리는 짧은 기도와 다르게 설교 전 공기도는 상당히 길었습니다. 이 기도에는 죄고백, 사죄의 확신에 대한 간구, 다른 이를 위한 간구, 조명을 위한 간구가 함께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때에 따라 설교 후 감사기도도 이 때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그렇게 되면 더 길어질 수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의 기도에는 제네바 예배모범의 첫째부분과 두 번째 부분, 즉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부분과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부분이 함께 있게 됩니다. 또 구약과 신약의 봉독이 십계명 낭독을 대체했는데 그 목적이 다르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봉독한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의 종 된 위치를 확인하고 평생을 하나님을 섬겨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고, 성경봉독의 목적도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종속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배순서와 관련하여 잉글랜드에 최초로 장로교회를 세운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예배의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네 가지 성경적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The Works of John Whitgift, Coolidge, p.5.)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전 10:32).
둘째, 질서정연하게 시행되어야 한다(고전 14:40).
셋째, 교훈하고 훈육적이어야 한다(고전 14:26).
넷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전 14:6-7).
이것은 개혁교회 예배모범과 이를 따르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보는 바,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서에서 보는 바, 예배순서와 관련하여 어떤 사항은 개교회가 신앙적 유익을 얻을 수 있음에 따라 적합하게 적용해 나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세대, 장소, 회중, 그리고 다른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에 결정해서 영원한 표본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예배모범과 맞물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내세운 개혁주의자들에 의한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들이 취해야 할 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글에 담긴 하나님 말씀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이것이 종교와 예배, 그리고 섬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유일한 정경이요 규범이라고 믿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기록한 말씀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법적이지 않다”는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매우 적법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의식이 극성을 부릴수록 진리는 줄어듭니다. 예배의 단순화는 장로교 예배나 청교도들의 예배의 특성이었습니다. (1) 그들은 사제복장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종교자유의 침해와 로마카톨릭을 연상시킬 우려가 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을 멀리하고 오히려 화려함과 겉치레를 조장할 수 있으며, 또한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 건물조차도 단순하게 만들었습니다. 각종 형상과 조각상을 교회에서 치워버렸으며 사제와 회중을 갈라놓는 예배실도 없애버렸습니다. 이들 교회당의 특색은 예배당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강단과 강단에 올라가기 위해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과 강단위에 펼쳐져 있는 큰 성경, 그리고 강단아래에 위치한 성찬 테이블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강단이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교회에서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구약적 성전 개념을 없애버리고 교회를 예배당이라는 모이는 집의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배를 하늘의 아버지와의 영적 가족들의 만남이라고 해서 예배의 가족성을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여기에 주일의 축제적인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청교도들이나 언약도들은 카톨릭이나 영국국교회인 성공회가 만들어 놓은 성일이니 축일이니 하는 날들을 주일 예배로 대체시키고 모든 절기를 폐지하였습니다. 리차드 그린함 목사는 “우리에게는 매 주일이 부활절, 승천절, 성령강림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3) 또 이들은 교회 음악을 단순화 했습니다.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오로지 시편만이 합당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화음을 이용한 작곡이나 애매모호한 라틴어 노래들 그리고 직업적인 음악가를 배제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으로 된 시편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바른 찬송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스코틀란드의 개혁장로교회인 자유교회에서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 예배 찬송은 시편만을 부르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논하기에 앞서서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주신 시편을 예배 시에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회개해야 할 일이라고 믿으며, 공예배에서의 찬송을 부름에 있어서는 시편 찬송을 부름에 있는 전환에 있도록 한국 교회가 예배 찬송을 개편하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성도들을 교화하며 영적 지식과 거룩함, 형제들을 향한 기쁨을 피차 나누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존 카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요 관심과 소원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의식을...잘 집행하는 것이다...이 때 우리는 인간적인 잔꾀를 덧입힐 생각을 버리고 그것의 때 묻지 않은 순수성과 단순함을 보존해야 한다.”
개혁교회의 예배가 이러한데, 현재 한국 교회의 형편과 관련해서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설교입니다. 취리히에서 예배의 요소를 회중찬송을 제외한 채로 거의 설교로만 생각했던 점이나, 제네바 예배모범에서 목사가 설교단에 오른 후에 다시 예배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데, 스코틀랜드 초기 예식서에서도 목사가 오른 후 드리는 기도에서부터 본격적인 예배로 생각했던 점, 네덜란드에서도 16세기 말에 한동안 십계명, 사도신경, 시편 부르기가 예배 전 행사로 여겨졌던 점들은 개혁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자체를 예배로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찬송도 시편 찬송이나 성경 다른 부분의 찬송시나 십계명을 불렀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찬송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임에도, 때때로 찬양으로만 예배 전체가 구성되는 형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찬송이 빠져도 예배가 되지만 말씀이 빠지면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말씀 다음에 중요한 요소는 기도입니다. 예배모범이 기도서란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예배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로 이해되었습니다. 찬송도 기도의 다른 형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칼빈이 예배의 세 요소를 말할 때, 말씀과 기도와 성만찬이었습니다.
셋째, 예배 첫 부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온 백성의 신분을 확인하는 데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철저한 죄에 대한 인식과 고백, 그리스도의 속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했습니다. 십계명 낭독과 신구약 낭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백성의 위치를 확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예배시간 자체에만 관계되지 않고, 예배드리러 하나님 앞에 나온 이들의 존재와 삶 전체와 관계했습니다.
넷째, 예배에서 성만찬이 빠진 것은 칼빈에 의한 예배관에 의하면 아직 예배의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는 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칼빈은 매주일 성찬식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예배를 온전한 예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만찬이 더 자주 행해지기를 제언합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 그 대체를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에서 대개의 경우 예배 후에 갖는 성도의 식사에서 가져나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과거의 한국 교회는 주일예배를 아침예배와 저녁예배로 가져나갔습니다만,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거주자의 예배 참여가 교회 지역을 벗어난 거주자 중심에 의한 예배 참여로 변화를 갖게 되면서 거주자의 상황에 의해서 주일예배가 오전예배와 오후예배로 가져나감으로 오전예배 참여자가 오후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점심을 해결할 수 있도록 식사를 제공하게 됨으로,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에 의한 식탁이 마련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까닭에 주일예배는 오전과 오후로 이어져가는 상황에서 그 의식이 단순화되는데, 예배시간 또한 아주 제한적으로 가져나가야 하는 실정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개교회적인 문제는 잘 대처해 나가야겠습니다만, 오전예배와 오후예배 사이에 갖게 되는 점심의 식탁은 매주일 시행하기 어려운 성찬의 의미를 살려나가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성찬 그 자체는 ‘주님의 만찬’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가진 식탁에서 음료와 떡을 제공하시는, 주께로부터 주어지는 그분의 피와 그분의 살이 갖는 대속에 의한 죄 사함과 부활에 의한 영원한 생명에 있어 이를 기념(기억)하여 그 은혜를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므로, 이를 교회가 정하여 실시하는 성찬의 시행과 함께 매주 갖는 주와 함께 하는 성도의 식탁에서 의미 있게 가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매주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주의 식탁을 가볍게 가져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후예배에 참여하기 위해서 단지 점심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이 식사의 자리를 갖는 것을 통해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요 6:51) 라고 하신데 따라,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눅 22:19; 고전 11:25) 라고 하신 떡과 음료를 마심에 있는 믿음의 일체(一體)에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 같이하는 자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다섯째, 살핀 대로 개혁파 안에 규정된 하나의 형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예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고백과 사죄선언이 있기도 하고(제네바), 공기도 안에 포함되기도 했습니다(웨스트민스터예배모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도 하고(제네바), 그러지 않기도 했습니다(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십계명 낭독이 있거나 없는 예도 있고, 성경낭독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축도를 축복선언으로 생각했다면, 다른 곳에서는 기도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때때로 예배모범에서 개략을 말하고 세부적으로는 지교회 당회에 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치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일치를 추구하면서도 교회와 회중의 건덕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글을 맺고자 하는데, 이승구교수는 ‘장로교회의 예배 이해와 장로교 예배 모범의 전통’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과거 개혁파 교회의 예배 모범을 반영하면서 한국에서 신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김홍전 박사에 의해서 제안된 예배의 순서에 근거해서 한국 장로교회적인 예배 모범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모아 반주자가 주께 대표로 찬양을 올리고 모든 성도는 그 찬양을 속으로 따라 같이 마음을 모아 드리고(전주, prelude)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데 바로 성경에 있는 기도인 시편을 낭송하여 함께 기도하고, 가장 모범적인 기도인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린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gloria), 시편을 교독한 후 (우리의 믿는 바로 사도 신조로 하나님과 온 세상 앞에 공표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sanctus), 목회자가 목회 기도를 하여 온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진전해 나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근거해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경배송을 드리고(worship),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성경 봉독과 듣기) 헌상(獻上) 예식을 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자신들을 다 주께 드려 주께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용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공로에 싸서 주님께 드리는 헌상 찬송(offertorium)과 헌상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다른 지체들과 함께 받고, 간절한 마음으로 적용을 위한 기도를 하고,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는 송영(doxology)을 드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반주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드리는 후주와 함께 우리도 하나님을 속으로 찬양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께 절하는 예배 의식을 마치게 된다.
이런 예배에 있어서 어떤 요소는 모두가 같이 주께 드리고(찬송들, 헌상), 어떤 요소는 인도자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주께 드리는바(전주, 후주, 목회기도, 때로는 기도송, 찬양) 이때 모든 성도들은 그 인도자의 인도를 따라서 속으로 조용히 같이 그 찬송과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특히 목회자가 공기도를 인도할 때 모든 성도들은 조용히 함께 속으로 그 기도의 내용을 따라서 같이 기도드리고, 마쳐지면 다 같이 조화롭게 “아멘”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개혁교회의 예배모범에서 예배시간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만 서는 시간이어서, 하나님께만 집중합니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현대의 변형되고 때로 기형적인 예배의 모습들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고 주의 말씀을 듣는 이 귀한 일은 이후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주의 몸된 교회에서 계속되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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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 앞에 내건 ‘95개 논제’는 내용상 일반적으로 8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1. 속죄에 대한 규정(1 – 4조)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셨다. 이 뜻은 신자의 생활 전체가 회개적으로 될 것을 의미한 것이다.
(2) 이 말씀의 뜻은 신부가 집행하는 죄자복과 죄사면에 관한 속죄 성례의 뜻과 전연 다른 것이다.
(3) 그러나 회개는 다만 심적 참회에 끝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내정을 죽이는 외부의 고행이 또한 있어야 한다.
(4) 참된 심적 참회는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할 것이다.
2.교황의 사죄권의 한계(5 – 7조)
(5) 교황은 자기와 자기교회가 만든 법을 범한 죄 외에는 아무의 죄도 사면할 의지도 없고 권한도 없다.
(6) 교황은 아무의 죄도 사면할 권한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면하심을 공포하거나 보증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이 사면해야 할 경우에는 할 수 있으나 그것도 당자가 원치 않으면 그 사람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7) 하나님께서 누구의 죄든지 사면하시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하나님의 대표인 신부의 지도를 받게 하신다.
3. 교회법이 부과한 속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연옥 영혼에 대한 구원문제를 취급(8 – 29조)
(8) 교회의 해죄법은 생존자에게만 통용하고 사망자에게는 통용치 말 것이다.
(9) 그러므로 교황은 성신의 지도하심을 따라서 발령하되 사망자에 관한 조항은 늘 제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 신부가 사망자의 연옥고를 교회의 사죄로 면케 한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요 교양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11) 교회벌을 연옥벌로 변한다는 말은 감독들이 잘 때 가라지를 뿌림과 같다.
(12) 전에는 교회벌 선고를 사면 후에 하지 않고 전에 해서 참된 통회를 하게 한 것이다.
(13) 죽는 사람은 그 죽음으로서 모든 이 세상에서 받을 벌을 다 받았으며 교회 벌칙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14) 죽는 사람이 신앙과 자신에 부정이 있으면 큰 공포를 느끼게 되고 그 부정이 심하면 그 공포도 더욱 심해진다.
(15) 다른 것은 말고 이 공포만으로도 연옥의 고통에 해당한 것이다. 이 공포는 절망의 공포다.
(16) 지옥, 연옥, 천당이 각각 다른 것과 같이 마음의 절망과 평안도 또한 다르다.
(17) 연옥에 있는 영들에게 있어서는 자선이 증가되어야 공포가 감소될 것은 사실이다.
(18) 연옥에 있는 영들이 적선범위나 자선 증가권외에 있다는 것은 이지나 성서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19) 연옥에 있는 영들이 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자기네들이 누릴 복락을 확신하는지 증명할 수 없다. (연옥은 사람이 그 곳에서 얼마 동안 속죄고생을 하면 천당으로 올라가는 곳이라 함)
(20) 그럼으로 교황이 사람의 모든 지은 죄를 사유한다 하는 것은 자기가 정한 죄에만 국한된 것이다.
(21) 그럼으로 누구든지 전도하기를 교황의 사면부가 사람을 그 받을 모든 형벌에서 석방구원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틀린 것이다.
(22) 교황이 연옥에 간 영들의 죄를 사면할 수 없다. 이는 그 영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교회법대로 속죄행위를 했어야 할 것이었다.
(23) 만일 어떤 사람의 모든 죄를 사유할 수 있다면 그런 죄 사유함 받을 사람은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야 할 것이요 또 그런 사람은 소수의 사람일 것이다.
(24)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혼란한 허울 좋은 약속으로 기만적 사죄를 받을 것이다.
(25)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세는 저의 교구 내 모든 감독들도 가질 수 있고 또한 모든 목사가 가질 수 있는 것이니 교황만이 가지는 독점의 권세가 아니다.
(26) 교황이 영들의 죄를 사유함에 있어서 자기 직권으로 하지 않고 공중의 기도에 의하여 하는 것은 바로 하는 것이다. 연옥에서는 교황직권도 소용없다.
(27) 사죄부 파는 자들은 전도하기를 돈이 헌금궤에 쩔렁하고 떨어질 때마다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서 나온다 한다.
(28) 돈이 그렇게 쩔렁하고 떨어질 때 탐욕과 모리가 늘어날 것이다.
(29) 연옥에 있는 영들이 다 구속받기를 원하는지 않는지 누가 알 것이냐 성 셀비니누스와 파샐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럴 것이다.
4. 면죄와 참회 그리고 사죄문제(30 – 40조)
(30) 각자가 자기 자신의 회개에 대한 진실성을 알 수 없거든 어찌 자기가 완전히 사죄함을 받았는지 알 수 있으랴.
(31)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드물다. 또 참으로 회개를 하고 사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32) 누구든지 면죄장을 받고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 저와 저의 선생은 다같이 영원히 멸망될 것이다.
(33) 교황의 사죄가 곧 하나님의 지극히 귀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삼갈 것이다.
(34) 이러한 사죄의 의사는 사람이 만들어 논 제도에 의한 속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5) 사람이 만일 사죄부를 사 가지고 영을 연옥에서 구출하는지 혹은 인죄장을 사면 저에게는 회개가 필요가 없다고 하는 전도는 기독교 교리가 아니다.
(36)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참회개하면 저는 면죄장이 없어도 전체 구원의 특전을 얻어서 고통과 정죄함을 면할 수 있다.
(37) 참된 그리스도인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면죄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모든 은사를 다 받을 수 있다.
(38) 교황의 사죄도 결코 멸시할 것은 아니다. 이는 내가 이미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이 사죄하심을 공포하심이 되는 까닭이다.
(39) 사죄의 효력과 진정한 회죄의 필요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강조하는 것은 박학한 신학자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40) 진정한 회죄는 형벌 받을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사죄를 함부로 하면 형벌감을 완화하고 수형법을 발하게 한다.
5. 면죄부의 구입과 면죄시행의 남용(41 – 52조)
(41) 사도적 사죄는 이것을 선포하는데 조심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이것을 자선 사업보다 더 중요시할가 함이다.
(42)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알 것은 사죄부를 사는 것이 자선사업에 비할 수 없다고 교황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43) 그리스도인이 또 알 것은 이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어려운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사죄부를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44) 자선사업을 하면 할수록 사랑이 늘어가고 그 사람의 인격이 높아간다. 그러나 사죄부를 사면 저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형벌만 면하게 되는 것이다.
(45)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알 것은 이 누구든지 어려운 사람을 보고 돕지 않고 거저 지나가면서 사죄부는 산다면 저는 교황의 사죄부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사는 것이다.
(46)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알 것은 누구든지 큰 부자가 아닌 이상 그 있는 돈을 가지고 자기집 살림에 보태 쓸 것인지 사죄부 사는데 쓸 것이 아니다.
(47) 그리스도인이 알 것은 사죄부 사는 것은 자유로 할 것이요 의무적으로 할 것은 아니다.
(48) 그리스도인이 알 것은 교황이 죄를 사유할 때에 기도를 요구하지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9) 그리스도인이 알 것은 교황이 사죄는 사람이 그것만을 의지하지 않아야 유익한 것이요 그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잃으면 이는 극히 해로운 것이다.
(50) 그리스도인이 알 것은 만일 교황이 목사들의 사죄부에 대한 행동을 안다면 성 베드로 성당이 불에 타 버릴지언정 저의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서 그 성당을 짓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51) 그리스도인이 알 것은 만일 교황이 그 목사들이 사죄부를 가지고 모리하는 줄 알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든지 혹은 자기의 사재로서 사죄부 산 사람들의 낸 돈을 반환할 것이다.
(52) 사죄장에 교황이나 혹은 어떤 감독이 보증을 선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서 구원 얻을 가망은 없는 것이다.
6. 면죄설교와 복음설교의 가치비교, 교리의 보화, 면죄부 판매 설교의 과장등(53 –80조)
(53) 사면부를 선전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말 하는 것을 금지하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황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54) 교회설교 시간에 사죄부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이 길게 한다든지 혹은 더 길게 하면 이는 잘못하는 것이다.
(55) 교황의 생각에 사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 사죄 축하에는 종 하나만 울리고 행렬도 한번만 할 것이다. 그 반면에 있어서 복음이 매우 중요하다면 복음은 종백개로 울려 전하고 행렬을 백번하고 성례를 백번해서 전할 것이다.
(56) 교황이 사죄부를 발행하는 교회의 금고는 교인들에게 전연 알리지 아니했다.
(57) 그 금고에 세상 재물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있다면 언제든지 써 버릴 것이다. 많은 신부들은 보물을 거기에 쌓아 놓기만 하고 있다.
(58) 사죄부 금고에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교황도 모르게 사죄부가 사람의 마음속에 은혜를 베풀고 십자가의 효력을 나타내고 죽음과 지옥을 면케 한다고 말한다.
(59) 성 로렌스는 말하기를 교회의 보배는 빈곤한 교인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저는 그때 당시에 쓰는 말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60) 그리스도의 공로로 교회가 맡은 직권이 곧 교회의 보화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61) 지금 형사를 보면 교황의 권력만이 기결죄와 미결죄를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62) 교회의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러나 그 보화가 천대를 받게 되고 첫째로 있을 것이 끝에 가 서 있다.
(64) 사죄부 보화는 맨 끝에 있을 것인데 맨 첫째로 있어 환영을 받고 있다.
(65) 복음의 보화는 예로부터 사람을 많이 낚는 그물이었다.
(66) 사죄부의 보화는 사람의 재산을 따먹는 것이 되었다.
(67) 신부들이 사죄부가 가장 큰 은혜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은 순전한 모리행위이다.
(68) 그러나 사죄부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독신에 절대로 비할 수 없다.
(69) 감독들과 신부들은 사도의 사면특사를 경건되게 영접할 것이다.
(70) 그러나 저희가 주의할 것은 이 특사들이 교황의 말을 전하는 대신 자기네들의 욕망을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71) 누구든지 사도의 사죄에 대한 진리를 반대하면 저주를 받을 것 이다.
(72) 그러나 누구든지 사죄부를 선전하는 자의 방종하게 나아감을 반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지어다.
(73) 사죄부 매매에 기만적 수단을 써서 그 사죄를 방해하는 것을 교황이 엄금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74) 누구든지 사죄의 미명하에 거룩한 자선의 진리를 기만수단을 씀으로 인하여 중생하면 이는 교황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75) 교황의 사죄권으로 성모에게 범죄함과 같은 용납 불가능한 것까지 사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발광적 생각이다.
(76)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교황의 사죄는 죄 중에 제일 경한 죽지 않을 죄도 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77) 성 베드로 자신도 교황 이상의 은전을 베풀 수 없다는 것은 성 베드로에게 대한 큰 모독이다.
(78)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현 교황이나 혹은 다른 어느 교황이든지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 수 있으니 곧 복음의 능력이요 병 고치는 은사이다. (고전 12:9 ∼)
(79) 교황의 팔에 다른 휘장들과 같이 있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80) 이러한 언론이 신도들 가운데 들어가게 하는 감독, 신부, 신학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
7. 면죄부 남용에 따른 평신도의 산발적 질문과 면죄시행에 대한 공박(81 – 91조)
(81) 사죄에 대한 방종적 설교에 평교인으로부터 예민한 질문이 튀여 나오는데 아무리 유식한 학자라도 교황의 위신을 꺾이지 않게 하고 대답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82) 예를 들어 말하면 아래와 같은 질문을 어떻게 답변한 것인가 "만일 교황이 지극히 거룩한 자선주의를 가지고 영들의 가장 큰 요구를 들어준다면 왜 연옥 전체를 공존케 못하나 이는 이치에 당연한 대의 명분이다. 성당 짓는데 돈이 절대 필요하다는 순수한 사유에 교황이 무수한 영들을 구출할 수 있다고 하면 위에 말한 대의명분을 넉넉히 실행할 수 있지 않은가?
(83) 영들이 연옥에서 구출되어 오면 왜 그런 영들을 위하여 장례미사기일 추도미사를 드릴 것인가 그런 미사를 위하여 기부한 돈은 그런 미사가 소용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84) 하나님을 공경치 않고 하나님의 원수된 사람이라도 돈만 내면 연옥에 있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을 구출하는 은혜를 베풀찐대 왜 돈을 받지 않고 순전히 은혜로 그런 영을 구출치 않는가 이것이 하나님과 교황의 무신 신식은전 인가?
(85) 회죄개과한 교역자들 중 이미 별세한지가 오래고 또 그들의 죄가 사유된 줄 아는데 그네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네들을 위하여 사죄부를 돈 주고 사서 그네들을 구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86) 오늘의 교황은 부자 중 거부인데 왜 자기의 돈을 드려서 성당을 짓지 않고 가난한 신자들의 돈을 거두어서 지으려나?
(87) 참으로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사죄 받을 있는 사람을 어찌 교황이 또 사죄를 한다는가.
(88) 만일 교황이 하루 한번뿐 아니라 백번씩이라도 진실한 신자들에게 사죄의 은전을 베풀진대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이 될까.
(89) 교황의 목적이 영혼 구출하는 것이요. 돈을 받는 것이 아닐진대 전일에 내린 사죄장이 왜 무효가 되나 그것이 사죄부와 같이 동일하게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인데.
(90) 평교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데 이론적으로 증명치 못하고 완력으로만 나아간다면 교회는 그 원수들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그리스도인으로 불결하게 할 것이다.
(91) 만일 사죄에 대하여 교황의 본의와 정신을 가지고 설교한다면 이런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오 있지를 않을 것이다..
8.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생활 언급(92 – 95조)
(92)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할지어다 평안할지어다“ 하고도 평안이 없는 것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다 물리칠 것이다.
(93)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라 십자가라“하고 십자가가 없는 것을 말하는 선지자는 화를 받을 지어다.
(94) 그리스도인들은 저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고통과 죽음과 지옥을 통과해서라도 따를 것이다.
(95) 그럼으로 많은 고난을 겪거 천국에 들어갈 생각을 하며 안전하게 갈 생각을 말아라.
2) 기독교 강요(라틴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는 개신교 신학에 관한 장 칼뱅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기독교 세계에 파란을 가져왔던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의 개신교계에서도 그 영향력이 상당히 남아있다. 1536년에 6장으로 구성된 라틴어 초판을 시작으로, 1539년에 17장으로 늘어난 증보판을 라틴어로, 1541년에는 다시 칼뱅의 모어인 프랑스어로 출판하였으며, 1543년에는 다시 21장으로 늘어난 증보판을 출판했으며, 1550년에는 약간의 내용을 보충하는 정도의 증보판을 출판하였고, 최종판은 1559년판(라틴어)과 1560년판(프랑스어)이다. 영어판은 1561년 나왔고, 독일어판 1572년, 에스파냐어판이 1597년 나왔다. 이 기독교강요는 장 칼뱅의 신학을 명료하고 논리적이며 학문적으로 보여주는 기독교의 명저이다.
3) 루터는 당시의 카톨릭의 미사를 악습 혹은 폐해라고 말하였는데 종교개혁 당시의 회중들은 미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던바 이것은 미사가 중재자인 사제를 통하여 대신 드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회중들은 미사를 통해 많은 은혜와 유익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육신적 질병의 치유와 연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얻고 때에 따라 주술적인 결과들도 얻기를 기대하는 것 등이었다.
4) 루터교회 예배의식 / 루터교회 예배정신 : 루터교회의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준비의 단계. ① 찬송.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정신으로 부른다. ② 죄의 고백.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들만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죄를 고백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 귀한 직무를 교회에 위탁하셨다(마 16:19). ③ 사죄 선언.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는 성도들에게 죄에서 해방된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다. 2) 기도와 찬양의 단계. ① 키리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일이다. 우리가 ‘키리에’를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절대로 필요로 하는 우리 자신들임을 일깨워야 한다. ② 대 영광송. 이 영창은 모든 예배자들이 예배 중 내내 하나님을 향할 때마다 가질 마음이기도 하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위에는 그의 기뻐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이 노래는 우리가 사는 일생동안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신앙고백적인 장엄한 주제를 가진 노래이다. ③ 인사. 하나님의 백성들 상호간에 나누는 가장 오래된 인사말이다(삿 6:12, 눅 1:28). ④ 오늘의 기도. 교회력에 따른 성문 기도인데, 교회력의 정신을 장 반영하고 있는 짧으면서도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예배 기도문이다. 3)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는 단계. ① 첫째 성서봉독, 오늘의 시편, 둘째 성서봉독, 복음서 봉독. 예배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오래된 기독교 예배의 전통이었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예배 가운데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 세 성경본문들은 교회력의 정신에 따라 서로를 조명하는 말씀들로 연관되어 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과 삶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예언된 말씀이기에, 구약성경의 조명이 없이는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사도서신들은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고 살았는지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들이다. 이렇듯 세 성경 말씀들은 서로 통일성이 있는 말씀들이다. ② 찬양, 신앙고백. 귀한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예배자들의 화답이다. ③ 설교.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예배자들이 이해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해석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결단하게 한다. 4) 생명의 양식으로 먹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 응답의 단계. ① 헌금 봉헌, 봉헌 영가. 모든 기독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는 순서를 두고 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총아래서 살아온 것임을 확인하며 표현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은 단순히 제단 앞에 드리는 물질만이 아니다. 예배자들의 몸과 마음을 함께 드리는 일이다. ② 목회 기도. 드려진 물질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말씀과 성례전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비롯해서, 나라와 민족, 병든 자와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믿음의 가정들과 젊은이들,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5) 찬양과 기도의 단계. ① 성찬 제정의 말씀. 단순히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해 주셨던 역사적 사실을 회상할 뿐만 아니라, 물질을 성별하는 중요한 순서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② 주기도. 가장 완전하고 모범적인 기도문이다. 성찬에 참예하기 전에 드릴 가장 적절한 기도이다. ③ 평화의 인사. 성찬에 참예하기 전에 성도들 사이에 화해하는 의식으로, 성찬 안에서 하나가 될 성도들이 먼저 화해의 인사를 나누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④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성찬에서 만나게 될 것을 고백하며 감사드리는 찬양이다.. 6) 하나님께 성찬으로 우리를 만나시는 단계. ① 성찬 분배. 우리는 성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설교를 귀로 듣는 말씀 혹은 선포된 말씀이라고 한다면, 성찬은 입으로 먹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주님의 몸이라.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주님의 피라.”는 말씀과 함께 떼어 주는 떡과 잔을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먹는다. 성찬을 받을 때, 손을 겹쳐서 앞으로 내밀고 인도자가 주는 떡이 손에 올라올 때까지 떡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7) 파송의 단계. ① 시므온의 노래. 성찬을 받은 사람들은(수찬자)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일평생 기다렸다가 만난 시므온의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한다. 아마도 모든 수찬자들은 시므온과 같은 심정을 노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② 축복 선언(축도). ‘아론의 축도’인데, 민수기 6:22-27에 분명하게 명시된 가장 대표적인 축복 선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만난다. 말씀과 성례전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경험하며, 함께 감사와 찬송의 제사를 드린다. 이것은 단절된 주례적인 의식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계속해서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이 된다. 루터교회 예배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거행되는 곳에,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실제적으로 재현된다.”
*본 글은 이남규교수(합신, 조직신학, 시은교회 협동목사)의 “개혁교회 예배모범을 통해 본 예배순서와 요소”(https://repress.kr/9365/)와 서창원목사(삼양교회)의 “스코틀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와 성찬”(http://ktyhbg.tistory.com/13757791), 이승구교수(합신, 조직신학, 언약교회)의 “장로교회의 예배 이해와 장로교 예배 모범의 전통”(http://ceo153.tistory.com/13760175), 김재성박사(한국개혁신학회 전 회장,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의 “칼빈의 예배신학과 목회적 적용”(https://blog.naver.com/shkim181/222925941921), 성약출판사의 “ ‘칼빈의 예배개혁과 직분개혁’ 소개글”(https://blog.naver.com/davidprpc/222277456911)을 비롯하여 인터넷 정보의 여러 자료의 도움을 받아 편집한 것으로, 일부 내용은 임의로 기술(記述)하여 보충, 보완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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