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왕위계승의 원리.
스튜어트(Stuart) 왕조 (1603-1714)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가 된 제임스1세(JamesⅠ)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가 헨리7세의 외손들이었기 때문에 튜더 집안의 정통 계승자였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동시에 차지하게 됨으로서 통합 왕국의 군주가 된 제임스1세는 앤(Anne of Denmark)과 혼인하여 두 아들 헨리(Henry Stuart)와 찰스1세(CharlesⅠ) 그리고 딸 엘리자베드(Elizabeth)를 두었다.
제임스1세의 딸인 엘리자베드는 프레데릭5세(FrederickⅤ)와 혼인하여 딸 소피아(Sophia)를 낳았고, 소피아는 하노버 선거후(Elector of Hanover) 어니스트(Ernest Augustus)와 혼인하여 훗날 하노버 왕조가 스튜어트 왕조를 계승하는 기반이 되었다.
<도표 1. 스튜어트 집안의 왕위계승>
제임스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찰스1세(1625-1649)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찰스1세는 프랑스 부르봉 집안의 앙리4세의 딸 앙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와 혼인하여 아들 찰스2세(CharlesⅡ)와 제임스2세(JamesⅡ) 그리고 딸 메어리(Mary)를 두었다.
메어리는 네덜란드의 오렌지(Orange) 집안의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혼인하여 아들 윌리엄3세(WilliamⅢ of Orange)를 낳았다. 찰스1세의 치세인 1649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났고, 찰스1세는 영국 국회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영국 국왕 찰스 스튜어트는 왕국의 법률에 의거하여 법률에 따라 통치하는 제한된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통치하려는 무제한적인 전제정치를 수립하기 위해서 현 국회와 국회가 대표하는 국민들에 대하여 전쟁을 도발하였다. 전쟁으로 발생한 생명과 재산의 모든 손실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찰스1세가 처형된 1649년부터 1660년 스튜어트 왕조가 복귀할 때까지 국왕이 공석인 공위시대가 계속되었다. 1660년 국회의 결정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2세(1660-1685)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찰스2세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왕비의 몸에서 난 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왕위계승권이 없었다. 따라서 왕위계승권은 찰스2세의 동생인 제임스2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제임스2세가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영국 국회는 제임스2세의 즉위를 찬성하는 토리당(Tories)과 즉위를 반대하는 휘그당(Whigamores)으로 나누어졌고, 표결에서 제임스2세의 즉위가 결정되었다. 1685년 찰스2세가 사망하자 동생인 제임스2세(1685- 1689)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도표 2. 스튜어트 집안에서 오렌지 집안으로 왕위계승>
제임스2세는 전처인 앤(Anne Hyde)에게서 두 딸 메어리2세(MaryⅡ)와 앤(Anne) 을 두었고, 후처인 포르투갈 공주 메어리(Mary of Modena)에게서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James Frances Edward Stuart)를 두었다. 맏딸인 메어리2세는 오렌지 집안의 윌리엄3세(WilliamⅢ of Orange)와 혼인했고, 윌리엄3세는 제임스2세의 외조카이면서 동시에 사위가 되었다.
제임스2세는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를 왕위계승자로 선언했다. 그런데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는 카톨릭 신봉자였다. 왕위가 구교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 한 영국 국회는 네덜란드 총독이던 윌리엄3세와 메어리2세를 내세워 명예혁명을 일으켰고, 제임스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명예혁명으로 사위 윌리엄과 딸 메어리가 공동으로 영국 국왕에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국왕은 사위인 윌리엄3세(1689-1702)였다. 따라서 영국의 왕위는 스튜어트 집안에서 오렌지(Orange) 집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윌리엄3세의 왕위계승권은 외가와 처가에 기인한다. 윌리엄3세의 어머니가 찰스1세로부터 윌리엄3세로 왕위계승의 권리를 전달하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아내인 메어리2세가 제임스2세로부터 윌리 3세에게 왕위계승의 권리를 전달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 제임스2세와 윌리엄3세의 관계는 외숙-외조카이면서 동시에 장인-사위 관계이다. 혈족(kin)과 인척(affine)의 지위가 상호작용하며, 혈연(consanguinity)과 혼인결연(marriage alliance)은 상호결합되어 그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
윌리엄3세의 치세 말기인 1701년 영국 국회는 왕위계승의 우선 순위를 정한 왕위계승률(Act of Settlement)을 제정하였다.
"카톨릭 신자는 왕위계승 후보자에서 제외되며 국왕의 가까운 직계가족과 친척 가운데 혈연이 가까운 순서로 한다."
윌리엄3세와 메어리2세는 후사가 없었고, 후계자로 메어리2세의 여동생인 앤 공주를 지명하였다. 앤(1702-1714) 여왕이 즉위함에 따라 영국의 왕위는 오렌지 집안에서 다시 스튜어트 집안으로 넘어왔다.
<도표 3. 스튜어트 집안에서 하노버 집안으로 왕위계승>
덴마크의 조지(George of Denmark)와 혼인한 앤 여왕도 후사가 없었다. 이제 왕위계승의 권리를 가진 자는 제임스2세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James Frances Edward Stuart)였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왕위계승률에 위배되었다. 이에 영국 국회는 왕위계승률에 따라 하노버(Hanover) 집안으로 시집간 제임스1세의 외손녀 소피아와 그의 후손들을 왕위계승권자로 지명했다.
그런데 소피아는 앤 여왕보다 2개월 먼저 사망했다. 따라서 왕위는 소피아의 아들인 조지 하노버(George Hanover)에게 돌아갔다. 조지 하노버가 앤 여왕의 뒤를 이어 조지1세(GeorgeⅠ)로 즉위함으로서 영국의 왕위는 스튜어트 집안에서 하노버 집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노버 집안의 조지1세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근거는 엘리자베드와 소피아로 이어지는 모계혈통 때문이다. 집안의 외손이 즉위함으로서 스튜어트 왕조는 끝이 나고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
<도표 4. 하노버 왕조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