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할인(早朝割引)>/구연식
밤새도록 쉬지 않고 비를 퍼붓더니 아침이 되어서야 지쳤는지 소강상태이다. 씩씩거리며 퍼부어서인지 그 열기는 온천지를 후덥지근하게 하여 뜬 눈으로 보낸 지친 몸을 더욱 피곤하게 한다. 오늘은 장마전선으로 비가 자주 오고 더위가 극에 도달한다는 대서(大暑)로 어쩌면 그리도 일치하는지, 태양의 위치를 이용한 24 절기를 표현한 옛 선인들의 예지에 경의를 표한다. 우주를 지배하는 인간 시대라 할지라도 자연의 질서와 그 위력에는 겸손해진다.
이렇게 찌뿌둥하고 끈적끈적한 이른 아침에 전화벨이 울린다. 받아보니 아들의 전화다.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아침 일찍 전화할 일이 없을 텐데 괜한 걱정이 앞선다. 뜬금없이 일요일이고 장마가 더 깊어지기 전에 햇과일을 사러 송천동 경매시장에 갔다 오자는 내용이다. 걱정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우선 안심이 된다. 나와 아내는 부랴부랴 시장 나들이 준비하고 셋이 함께 청과물 시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자동차 방향이 송천동 청과물 시장 쪽이 아니다. 아들에게 물었다. “ 예야! 송천동 청과물 시장은 이쪽 방향 아니잖아?”라고 물으니, 이곳으로 가면 큰 시장은 아니어도 싱싱한 청과물로 유명한 새로 생긴 작은 시장이 있다고 한다. 젊은 아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하면서 또 다른 시장을 기대하면서 가고 있다. 조금 후에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 아침 일찍이 조조할인(早朝割引) 시간 영화감상 하러 가자고 하면 안 가실 것 같아 거짓말했습니다.”라고 한다. 아내는 바로 반격한다. “ 야? 답답하게 이른 아침부터 극장에서 조조할인 영화 보고 쪼그리고 앉아 있어, 그 돈으로 고기 사다 집에서 구워 먹자,”라고 우긴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극장 지하 주차장에 내려서 극장 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아내는 매사가 가정과 경제에 초점을 맞춘 실용주의다. 나는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문화 예술 쪽에는 무조건 참여적이고 진취적이다. 다행히 나의 속내 쪽으로 기울어져 기분이 좋았다. 1960년대에는 T·V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유일한 문화와 예술의 향유는 극장의 영화에서 누렸다. 그래서 중앙지 신문 하단에는 어김없이 서울의 유명 극장 영화프로그램 광고가 나왔고 ‘조조할인(早朝割引)’ 문구도 빼놓지 않았다. 그 조조할인(早朝割引)의 실천을 70여 년 만에 처음 참여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영화광(狂)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금마 읍내에 심심치 않게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그때마다 어머니를 졸라서 기어이 영화를 보고 와서 어머니에게 영화 줄거리를 꼭 들려주면 그리도 좋아하셨다. 고등학교 때에도 단체 관람 영화는 수업료는 늦게 납부해도 영화 관람은 빠지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에도 아르바이트로 벌은 약간의 용돈으로 외화(外畵) 개봉관은 단골 마니아였다.
모든 취미도 나이 따라서 간다고, 그렇게 영화 감상을 좋아했던 취미도 그 뒤로는 극장에서 영화 감상은 선뜻 실행에 옮겨 보지 못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극장에 왔다. 휴게실에서 조조할인(早朝割引)을 대기하고 있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은 없었다. 조금은 소외감과 늦은 감이 동시에 엄습한다. 오늘 감상할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7>이다.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가 지난 6월 29일 오후 서울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미션 임파서블 7' 감독과 배우가 동행하여 팬 서비스 차 11번째 방한한 화제작으로 새로운 무기가 잘못된 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추적, 운명과 임무 사이 위태로운 대결을 펼치는 액션 블록버스터 작품이다.
극장 안에 들어서니 꼰대 세대의 선입감이 여기저기서 동시에 상기시킨다. 옛날에는 극장에 입장하면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아, 지정 좌석까지 찾아 갈 때 한 손은 의자를 더듬거리다가 이미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만지는 실례를 범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찾아가는 불안감을 지워주는 바닥의 촘촘하고 친절한 조명등이 씻어준다. 행여 앞 좌석에 키가 큰 사람이 앉아 있으면 화면이 가려져 요리 조리로 고개를 돌려가며 보았던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널찍한 급경사로 띄워 마음 놓고 볼 수 있게 좌석을 만들었다. 화면도 대형 멀티비전이고, 음향도 돌비사운드 입체음향으로 어느 하나 그 옛날 극장 분위기는 없었다.
그렇게 긴장과 흥분 속에서 영화 관람이 끝났다. 오늘 아침 아들의 <조조할인(早朝割引)> 전화 한 통화는 신선한 문화충격(Culture shock) 경험으로 우물 안 개구리를 밖으로 끌어올려 베이컨의 우상론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이제는 현대식 극장 문화를 어설프게 아는 체에서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돈이 있어도 마음이 있어도 주위를 의식하거나 타고난 천성 때문에 쉽게 실천 못 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아들의 권유로 조조할인(早朝割引) 경우는 고맙고 또 고맙게 생각한다.
(2023.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