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받아 쓴 원고인데, 어쩌다 보니 성역 30년을 기억하는 글이 되었습니다

[송길똥]

기독교세계(2018. 4월)

세상을 바꾸는 말 한 마디

세상을 바꾸는 말의 힘이라, 지동‘설’(說)만큼 말의 능력을 믿는다면 모를까 인간에게 그런 절대반지는 없다. 다만 말을 둘러싼 힘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말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여론을 압도할 것이고, 만약 진실하다면 설득된 다수를 취하게 될 것이다. 요즘처럼 가짜 뉴스의 등장으로 참말과 거짓말 사이 ‘말의 시비’가 일상화 되고, 늘 ‘좋아요’와 ‘싫어요’의 갈림길에서 ‘말의 인기’를 의식하며, 다중의 검증과 팩트 체크라는 심판대 위에 놓인 ‘말의 처지’를 본다면 말의 엄중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말의 장터에서 이미 퇴물취급을 받는 교회의 언어가 과연 세상을 바꾸는 말의 힘을 지닌 수 있을까? 언감생심 감히 꿈도 꿀 수 없다. ‘스님의 주례사’처럼 말도 안 되는 말의 논리가 출판시장에서 대접을 받고,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말의 반역도 소통을 시도하는 세상에서 교회의 언어가 설 땅을 잃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 마디로 세상의 멘토를 자처해 온 교회의 말은 더 이상 세상에서 목소리를 잃었다.

말의 광장이든, 언어의 시장이든, 여론의 전쟁터가 됐든 말은 항상 다투게 마련이다. 그 결과는 진실과 인기와 권력이다. 최근 평창올림픽을 둘러싼 말싸움은 좋은 실례이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유치를 위해 북한의 참여와 단일팀 구성을 두고 정부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한창 물밑 작업을 진행 중일 때 보수이념을 대변하는 정당에서는 느닷없이 ‘평양’올림픽을 주장하고 나섰다. 남북 대화가 오랜 동안 빗장을 걸고 있고, 핵과 미사일실험 때문에 1년 내내 험한 말을 내지른 후라 북의 참가에 대한 반사적 적대반응이었다.

남과 북 사이 지난 10년 가까이 말의 왕래가 꽉 막혀있었기에 양쪽의 말의 공방은 신뢰를 보장하기에 너무 아득하였다. 이런 말의 투석전 속에서 북의 참가 의사와 남의 참여 권유는 아무도 그 결론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다만 모처럼 휴전선을 넘어 날아온 말의 풍선에 바늘을 찌르는 듯한 ‘말의 공격’은 실낱같은 불씨에 찬물을 붓는 심술처럼 느껴졌다. ‘평창’을 ‘평양’으로 바꾸려는 말의 마술은 늘 북에 대해 마뜩치 않아하던 보수여론에서 꽤 설득력을 얻기도 하였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평창을 평양으로 바꿔 부르며 평화올림픽을 훼방하던 세력은 결과적으로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개회식을 계기로 불타오르던 평화올림픽은 이제 패럴림픽 폐회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갈 전망이다. 평창이 입구(入口)라면, 평양은 출구(出口)이다. 남북 및 북미의 대화와 신뢰마련, 비핵화와 평화정착 과정은 진정한 평화올림픽의 금메달감이 될 것이다. ‘평창과 평양’ 사이 말시비는 뜻밖의 결론을 가져왔다. 지독히 역설적이다.

거창한 이슈를 다룬다고 말의 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뜬구름 같은 거대담론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 것처럼, 교회 역시 정갈한 말 한 모금 보다는 감당하기에 버거운 말의 홍수를 쏟아냈다. 교회의 구호와 슬로건, 캠페인을 살펴보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의 성찬으로 가득하다. 교회의 말 습관이 언어의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을 번번이 겪으면서도 입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오죽하면 ‘설교하다’ 속에 담긴 성스러운 말의 교훈이 ‘진부한 잔소리를 늘어놓다’와 같은 뜻이 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세상을 말로 부리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먼저 겸손히 들을 일이다.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교리적인 말,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 통하는 끼리끼리 말, 현실인식을 상실한 겉치레 말, 과도한 친절로 치장한 느끼한 말의 위선을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외통수의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음을 교회의 언어 생산자들은 무겁게 깨달아야 한다. 탈무드는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 주워 담기 힘들다”며 말을 엄중히 경계하고 있다.

작년에 날마다 ‘2017 귀담아 들은 한 마디’를 메모하였다. 일기의 또 다른 변형된 시도인 셈인데, 남의 말을 통해 내 하루를 성찰한다는 의도였다. 하루 동안 귀 천정을 두드린 말들 중에서 단 한 마디의 말을 엄선한 후 그 말에 담긴 의미와 속생각까지 적어 두었다. 일 년 365일 동안 말의 창고에 보관된 귀담아 들은 말 한 마디들은 천차만별이다.

아버지 1주기 추도식에서 온 식구가 한마디씩 회고담을 하는데 유독 어머니만 “난 할 말 없다”(1.19)며 냉정하게 자르셨다. 그 다중적 의미를 어찌 한 마디 말로 표현할까? 인권센터 주관 ‘양심수 석방촉구 목요기도회’에 참석한 한 구속자 아내는 수년 전의 비극적 상황을 증언하며 그때 들은 설교가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4.13)라고 고마워했다. 상처가 많은 세상에서 어떤 말은 상처로 남고, 어떤 말은 위로가 된다. “정회원은 쇠고기 먹고, 준회원은 돼지고기 먹고”(5.29)는 30년 전 어느 지방 교역자들의 ‘갑질’ 식사풍경인데, 제천에서 들었다. 가족과 송년밥을 먹다가 “아빠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 같아”(12.31)란 핀잔을 들었다. 점점 말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늘고 있다.

365가지 귀에 담아 둔 말들은 결코 큰 아우성이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의 말도, 웅변조의 성토도 아니었다. 매일 반복된 귀담기 훈련은 다만 그냥 지나치기 쉬운 말들을 낚아 올리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섬세히 귀 기울였더니 낮은 소리,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으면 무관심의 그물망 틈으로 수 없이 빠뜨렸던 그런 소홀히 여길 말들이었다.

내가 평생 들은 말들 중에 마음에 새겨둔 역대급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은 무명의 사람들이 내게 던져준 말의 씨앗이었다. 물론 세상을 변화시킬 말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를 변화시킨 말의 사건이었다.

1985년 4월, 문수산성교회를 개척하고 창립예배를 드리기 며칠 전에 친구 부모님이 일부러 찾아오셨다. 중학교 시절 내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셨기에 나를 안쓰럽게 여겨 용기를 주신다고 한 마디 던지셨다. “세상이 얼마나 악하면 너 같은 어린 애가 목회를 다 하니?” 무심코 하신 이 말씀은 적어도 내게 세상의 악과 맞서야 할 소명을 느끼게 하였다. 그 해 성탄을 앞두고 첫 출석한 이래 주일저녁에 대표기도를 할 만큼 믿음이 자라던 한 남자교우가 드린 기도도 내 귀를 붙잡았다. “주님 제가 참 부족합니다.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도편달은 내 목회에서 가장 생생하게 다가온 일상적 깨우침이 되었다.

해마다 송구영신 직전에 3일 동안 걷기도를 한다. 10년이 넘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는데, 2년 째 되던 해에 서울독립공원에서 춘천교도소까지 걷다가 길 선생을 만났다. 남양주 시내를 지나가면서 자주 횡단보도를 만나 멈추었는데 푸른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리다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길을 건너던 한 아주머니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산에 다녀오시냐는 말에 길을 걷는다고 했고, 날이 추우니 어쩌니 인사치레를 나누다가, 헤어지던 참이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가 내게 작별인사를 한다. “아저씨 잘 가, 넘어지지 말고.” 선줄로 여겼다가 넘어지는 불상사는 얼마나 많았던가! 아이의 말은 지금도 길동무처럼 나와 동행하고 있다. 정작 중요한 말은 세상을 향하지 않고 바로 나를 향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한 말씀’해야 한다는 말의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말에 과도하게 힘을 주거나, 상품화해야 한다는 강박함을 느끼고 있다. 말하기에 앞서 귀담아 들어야 함에도, 말의 남대문시장처럼 교회의 언어는 번잡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을 배웠다면, 입을 열기에 앞서 우선 ‘들을 귀’를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독일교회가 제작한 포스터를 보면 우리 시대 개혁의 의미를 한 마디로 말로 함축하고 있었다. 핏빛처럼 선명한 붉은 바탕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라고 적혀있었다. 종교개혁의 대표적 브랜드는 바로 ‘말씀’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시킨 장본인이며, 동시에 그 역시 숱한 말을 남긴 당사자였다. 우리는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했지만, 우리 시대 개혁의 언어를 낳지 못하였다. 말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려고 무모한 시도를 하려다보니, 고작 캠페인 타령에 그쳤다. 과연 세상은 교회로부터 무슨 말을 듣기 원할까? 매번 점잖게 한 마디 해야 한다는 꼰대의식부터 버리라고 충고하지 않을까?

얼마 전에 드라마로 만들어져 숱한 말을 유통시킨 웹툰 ‘송곳’에서 구고신은 말한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 처음 한국교회는 말을 주도하였다. 그때는 옳은 사람이 리더십을 쥐어야 하는 것이 시대적 정언명령이었다. 한글성경은 한글과 우리말의 물꼬를 텄고, 3.1독립선언문에는 그리스도교적 말의 표현과 생기로 가득하였다. 그 때는 교회가 말의 역사를 만들고, 역사적 말을 생산하였다. 성령은 말을 소통시킨 하나님의 사건인데, 바벨의 혼란을 극복하고, 공감을 불러왔던 것이다.

과연 우리 시대의 잠언(箴言)은 무엇일까? 잠언은 침이 아픈 부위에 혈을 통하게 하듯 무딘 우리 마음에 영적 순환을 하는 콕 찌르는 말씀이다.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말 한마디의 존재가 가능할까? 들을 귀가 없는 까닭에 여의주 같이 그런 신통방통한 말을 찾기는 참 어렵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것은 ‘침묵의 언어’이다. 존 번연은 “기도할 때에 마음에 없는 말로 하지 말고 말없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목에 힘주는 성명의 언어가 아닌 비유와 그림말을 통해 ‘상징의 언어’를 즐겨 사용하셨다. 오늘의 교회의 언어는 독선 안에 갇혀있다. 침묵과 상징이 사라진 지금, 우리가 섞어 온 개념화된 언어는 유통기한이 이미 지나버렸다. 말은 하되 주장에 그친 채, 행함이 없다. ‘행동의 언어’ 없이는 말의 유희에 불과하다.

2006년 여름, 서울에서 세계감리교대회(WMC)가 열렸다. 대회 중 임진각 잔디밭에서 외국인참가자들과 함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주일예배를 드렸다. 설교자 선데이 음방 감독은 휴전선을 바라보며 한국사회의 분노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많은데 왜 이 사회는 분노로 가득합니까?” 그의 한 마디를 통해 곰곰이 우리 시대의 화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우리 시대와 화해할 그리스도인의 말은 무엇일까?

문수산성교회 창립을 준비하면서 텅 빈 예배당에서 첫 잠을 자면서 서원하였다. 그곳은 휴전선 남쪽 시오리 밖에 안 되는 분단현장으로 그 밤에도 대남-대북 방송으로 왕왕거렸다. “주님, 통일될 때까지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려니 잠은 오지 않고, 생각만 뒤척거렸다. 언제 통일이 되려나 싶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기약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무릎 꿇고 서원을 수정하였다. “주님, 10년 만 있겠습니다.”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통일의 소망을 듣지 못한다. 다만 화해자의 언어를 잊지 않고자 들을 귀를 열어 두고 있다.

송병구 목사(군포지방 색동교회)

[조금숙]

계속 이어질 그 길에 언제나 주님이 동행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