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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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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은 1868년 당시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부친 권문영(權文永)과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윤좌(潤佐)이며, 호는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을 사용하였다. 그의 선대는 경북에서 살았는데, 문경 호계면에 증조부모와 조모의 묘소가 있고, 조부의 묘소는 상주 화서에 있다.
그가 청주에서 태어난 것은 모친 신문화(申文嬅)가 청주 일원에 세거하던 고령 신씨의 후예로서, 외가에서 출생하던 관례 때문으로 이해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선대의 고향인 경북 상주로 이사하였다. 당시 한 신문이 그를 상주 출생이라고 잘못 보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주에서 그는 종숙으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우다가, 9세 때인 1876년 다시 청주 양곡리로 이사하였다. 양곡리(양골)는 지금의 미원면 용곡리인데, 이곳은 그의 외가로서 현재도 고령 신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외가 형 신철모와 인근에 사는 유학자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6세 때인 1883년에는 원주에 사는 원세화의 장녀와 혼인하였다.
◇동학에 입도하고 2차 봉기를 주도하다
18세인 1885년, 그는 자신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있던 임약호(任弱鎬)로부터 동학 입도를 권유받고 입도하였다. 이듬해 봄, 그는 상주군 화서면에 있던 최시형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이 때 최시형은 수도 정진하는 방법을 일일이 설명해 주며, 영부(靈符, 동학의 부적)를 친히 써주었다. 이후 그는 밤낮으로 동학의 경전 연구와 주문 외기에 몰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시 누워 있는데, 갑자기 집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놀라 일어나 보니 분명히 그의 집에 불이 난 것이었다. 이 때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천사(天師)에게 고하니 불이 스스로 사그라졌다고 한다. 동학에 입교한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신비한 일이었다.
권병덕은 20세이던 1887년,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이해 그는 최시형의 명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49일 기도식을 거행하였고, 보은 장내리에 동학의 중앙본부 역할을 한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될 때 중정(中正)의 중책을 맡았다.
동학혁명 발발 1년 전인 1893년, 최시형이 그의 미원 용곡리 집에 머물며 복합 상소를 준비하였다. 교주가 그의 집에 머물며 동학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고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일시나마 그의 집은 동학의 본부 역할을 한 셈이다. 드디어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였다.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동학(북접)은 전라도 동학(남접)과 달리 무장봉기에 반대하여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접도 남접에 호응하여 공동전선을 펼치기 위해 봉기하여 청산에 집결하였다. 권병덕은 김연국(金演局), 황하일(黃河一)과 보은의 대표로서 동참하였다. 이 때 그는 최시형의 명을 받아 각지의 교도들이 기포케 하였는데, 자신은 충경포(忠慶包) 차접주(次接主)로서 충경포와 문청포(文淸包) 교도 3만여 명을 인솔하였다.
그는 관군과 수차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투에 패배하고 피신하던 중, 영동과 논산에서 관군과 맞닥뜨려 검문을 받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기도 하였다. 1896년, 그는 충주 외서촌으로 옮겨온 최시형을 만났는데, 이 때 최시형이 그에게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세를 회복하도록 지시하였다. 요컨대 동학혁명을 전후한 시기, 권병덕은 최시형의 측근으로서 교단의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시천교의 중심인물이 되다
1907년 이용구 등이 시천교를 창건하였다. 손병희가 친일화한 일진회 간부를 축출한 데 따른 반발이었다. 이때 천도교 보수파인 김연국이 시천교로 이적하여 교주에 추대되었다. 권병덕도 시천교로 옮겨 육임 중 교수(敎授)에 올랐다. 시천교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며 천도교와 종통(宗統) 투쟁을 벌였다.
시천교는 1911년의 임원 개선에서 이용구계가 육임의 자리를 차지하며 교권을 장악했는데, 그는 교화를 담당하는 관도사(觀道師)로 밀려났다. 이듬해, 시천교가 교역자 양성을 위한 종학관(宗學館)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권병덕은 《시천교월보》에 〈시천역사〉를 기고하고, 시천교 경전인 《시의경교(時儀經敎)》를 펴내는 등 교리에 정통하였다. 1912년 초의 임원 개선에서 그는 요직인 종무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13년 초, 권병덕은 간부직을 사임하고 낙향해 버렸다. 송병준의 교권 장악과 독단적 운영에 반발한 때문이다. 결국 이해 3월, 김연국계가 시천교총부를 설립하여 시천교본부와 결별하였다. 물론 친일적 성향이 농후하였던 것은 두 단체가 유사하다.
김연국 계열이었던 권병덕은 1915년 중앙시천교회본부를 개교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제 권병덕은 천종사장(天宗師長)으로서 시천교 한 지파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 단체 또한 친일적 성향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해 일본으로 건너가 대정(大正)의 즉위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6년 참회식을 거친 후 천도교로 다시 귀의하였다.
◇천도교 도사로서 민족대표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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