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지는 공(空)하고 고요했다. 봉림산문 대가람이 흔적도 없이 온갖 잡풀 서식지로 돌변하고, 부도와 비를 옮겨갔다는 이건비만이 홀로 남아 옛 영화를 대변해 주고 있을 뿐. 경남 창원 봉림사지를 거쳐 사굴산문의 개창지인 강원도 강릉 굴산사지 등지를 지난 12월21~22일 돌아보았다.
잡초 무성한 寺址 복원돼야
<사굴산파 굴산사지의 당간지주에는 1200년 전 당당한 기백이 여전히 살아있다. >
“봉림사우나는 저쪽인데, 봉림사지는 몰라요. 너는 들어봤어?” “아니 나도 첨 들어.” 창원시 봉림동 봉림산 입구에서 만난 여고생들은 봉림사지 방향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마침 봉림산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듯한 중년부부가 지나갔다. “봉림사지요? 아…거기 지금 못들어가요. 길이 없을 터인데…” 길이 없다니 무슨 소리인가. 원감국사와 진경대사가 선문을 개산하여 신라 말 선풍종지를 크게 떨쳐 500여명의 납자들이 주석하면서 선기(禪機)를 드날린 대가람이 이제는 길이 없어 들어갈 수 없다니, 귀를 의심했다.
30여분간 산줄기를 따라 정상을 향해 오르자 ‘봉림사지’라고 적힌 표지판이 꽂혀 있다. 화살표 방향대로 눈길을 돌리면 진짜 길이 없다. 막막하다. 이 일대가 전부 봉림사 절터라는 말인가. 우선 걸어갈 만한 공간이 있는 곳으로 더듬더듬 기어들어갔다. 또다시 표지판이 나온다. 사람 키보다 높은 갈대숲을 두 팔로 헤치듯 빠져나와서 온갖 잡초들을 쥐고 밟으면서 가다보니 봉림사지가 나왔다.
봉림사지에 대한 역사상 문헌의 실마리는 이곳에 있던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의 비문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진경스님은 868년에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하고 있던 원감대사에게 법맥을 전수받고, 김해의 서쪽에 복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봉림산으로 왔다고 한다. 스님은 이곳 호족의 도움으로 옛터를 보수하고 봉림산문의 선풍을 일으켰다. 봉림사지의 전신은 한국 불교가 처음 전해진 가야불교의 터전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봉림사지에는 건물지와 연못지, 탑지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나, 지금은 무성한 잡초와 잡풀로 사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봉림사의 유적은 일제강점기 때 반출되는 바람에 본래 자리를 잃고 훼손된 상태로 외부에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경복궁 내에 있는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그나마 무사하지만 창원 상북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세워진 봉림사삼층석탑은 그 역사와 연원을 잃어버린 채 나날이 훼손도가 더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다 스러져가는 이건비 하나만이 이 곳이 구산선문 봉림사지의 옛터라는 사실을 말해줄 뿐, 풀더미에 파묻혀 사라져가는 이 절터를 마냥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 봉림사지를 바라보며 들었던 황망한 마음은 고속도로길 400km를 내달려 도착한 강원도 강릉 굴산사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평온해졌다.
<무성한 잡초와 풀숲 속에 봉림사지임을 알리는 비석과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윗골마을에 있는 굴산사지에 이르면 우선 너른 벌판에 우뚝 솟은 당간지주(보물 제 86호)가 장관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이 지주는 높이만도 5.4m에 달한다.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13년(851)에 범일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사굴산문의 중심 사찰이었다.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굴산사지부도(보물 제 85호)와 강릉굴산사지석불좌상 등이 당간지주와 함께 멀찌감치 동떨어져 있어 당시 굴산사의 가람규모를 짐작케 한다.
굴산사가 있는 학산마을에는 범일스님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스님의 어머니가 우물에서 물을 떠마시다 스님을 잉태했다고 전하는 ‘석천’이란 우물이 있다. 이는 범일스님이 어려서 불가에 입문하여 젊어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굴산사에서 40년을 보내는 동안 신라의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으로부터 차례로 국사가 되어주기를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오로지 불법과 종풍선양에만 힘쓰다 입적한 스님의 삶과 이어진다.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에도 낭공스님이 “굴산에 가서 범일대사를 뵙고 스스로 오체투지의 예를 정성껏 올리고서 깊이 품은 생각을 아뢰고 마침내 제자가 되었다”고 쓰여져 있다. 낭원스님은 범일대사가 열반에 들자 “배움 끊어진 슬픔이 훨씬 더했고 스승 잃은 한스러움에 뼈가 저렸다”(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고 한탄했다.
굴산사지에 깃든 선기(禪氣)는 위풍당당한 당간지주의 기백으로 1200년간 꺼지지 않은 법등으로 오늘도 빛을 발한다.
● 구산선문은… 唐에서 귀국한 선사들이 연 아홉 禪門
<강릉굴산사지 석불 좌상>
신라 하대는 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호족과 6두품 계층이 성장했다. 이에 따라 사상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왕실의 이데올로기로서의 교종이 쇠퇴하고 지방 호족세력의 사상적 기반으로 선종이 대두된 것. 중국의 선종이 신라에 최초로 전해진 것은 법랑스님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법랑스님으로부터 계통을 이어받은 신행스님은 당에 들어가 지공스님으로부터 북종선을 배워 신라 혜공왕 때 들여온다. 그러나 신라말에 형성되기 시작한 구산선문은 그보다 뒤에 전래된 남종선의 계통이었다. 이 남종선은 신라 제41대 헌덕왕 13년(821) 무렵에 귀국한 도의선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전해졌고 당에서 남종선의 법문을 깨치고 귀국한 선사들이 각각의 산사(山寺)에 자리를 잡고 선문(禪門)을 열기에 이르렀다.
이같이 나말여초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선문이 아홉산에 이르렀으므로 이를 일컬어 구산선문(九山禪門) 또는 구산선파(九山禪派)라고 한다. 가지산문을 비롯, 실상산문(남원 실상사), 사굴산문(강릉 굴산사), 동리산문(곡성 태안사), 성주산문(보령 성주사), 사자산문(영월 흥녕사), 희양산문(문경 봉암사), 봉림산문(창원 봉림사), 수미산문(해주 광조사)까지 구산선문은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강릉 굴산사와 보령 성주사, 창원 봉림사, 해주 광조사 등 네 곳은 터만 남았고 나머지 다섯 산문이 현존한다.
[불교신문 2291호/ 1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