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으로 흐르는 세금천에는 붉은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천년 역사의 돌다리가 남아있는데, 이 다리는 역학의 원리와 토목공학 이치를 그대로 적용한 선조들의 뛰어난 축조기술의 비밀이 담겨 있다.
중부고속도로를 통하여 진천을 지나다 보면 아주 희귀한 돌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지나는 이는 누구나 언젠가는 한 번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바로 진천의 농다리(籠僑)가 있는 곳이다.
다리는 강물이 가로질러 흐르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어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이 삶을 함께 엮어가게 하는 연결통로이다. 우리나라 냇물에는 징검다리, 외나무다리, 섶다리, 방축다리, 살래다리 등 다양한 형태의 다리가 있었으나 콘크리트 다리가 들어서면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는 징검다리를 배경으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그려 우리의 가슴에 순수를 향한 영원한 설렘을 아로새겨 놓기도 하였다. 편평한 돌로 한 보(步) 거리만큼 개울을 가로질러 돌을 놓은 징검다리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징검다리를 건너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학교를 오갔고, 어른들은 오일장을 가거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갔다. 아낙네들은 징검다리 부근에서 빨래를 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리의 애환과 함께 가교의 역할을 천년 동안 아니 영원히 앞으로도 이어갈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농다리는 국내에서 축조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긴 자연석 다리이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지나는 길손들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보기 드문 문화재로 1976년 12월 21일 충북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잘 보존 관리되고 있다.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중리)마을은 상산 임씨의 세거지로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의 뒤를 이어 권세를 잡았던 무신 임연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 세금천이고 여기에 놓인 붉은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다리는 전체 길이가 100m를 넘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93m가 남아 있다.
처음에는 28간의 교각으로 축조되었으나 현재는 24간만중부고속도로를 통하여 진천을 지나다 보면 아주 희귀한 돌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지나는 이는 누구나 언젠가는 한 번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바로 진천의 농다리(籠僑)가 있는 곳이다.
다리는 강물이 가로질러 흐르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어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이 삶을 함께 엮어가게 하는 연결통로이다. 우리나라 냇물에는 징검다리, 외나무다리, 섶다리, 방축다리, 살래다리 등 다양한 형태의 다리가 있었으나 콘크리트 다리가 들어서면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는 징검다리를 배경으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그려 우리의 가슴에 순수를 향한 영원한 설렘을 아로새겨 놓기도 하였다. 편평한 돌로 한 보(步) 거리만큼 개울을 가로질러 돌을 놓은 징검다리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징검다리를 건너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학교를 오갔고, 어른들은 오일장을 가거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갔다. 아낙네들은 징검다리 부근에서 빨래를 하면서 새로운 남아 있고, 축조될 때의 모습 그대로 강바닥에 버티어 선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고 대견하다. 이 돌다리의 폭은 3.6m, 교각 높이는 1.2m, 교각 사이의 폭은 80cm, 교각 사이를 연결한 장대석은 한 개 혹은 두 개를 겹쳐 연결해 놓았다.
농다리가 오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게 된 비밀은 바로 교각의 축조기술 때문인 것 같다. 다리 전체는 일직선으로 연결하지 않고 마치 지네가 이동하는 모습과 같이 구불구불한 형태로 하였다. 그리고 교각 하나하나의 형태도 상하류 방향으로 고기비늘과 같이 물 흐름을 좋게 하기 위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상류 쪽으로 약간 기울게 하여 물 흐름과 역방향으로 힘을 유지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은 현대역학의 원리를 이미 그대로 적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토목공학의 이치를 잘 살려 음양석으로 쌓았다. 교각의 상부와 하부에는 큰 돌을 놓아 강한 물살을 견디게 했고, 아래쪽 교각에서도 강한 힘으로 받쳐줄 수 있도록 하였다. 물살의 힘을 가장 많이 받는 교각의 상부 선단부는 뾰족한 돌로 마감하여 놓은 모습은 당시 돌다리 축조기술의 뛰어난 지혜라 여겨진다.
이 다리의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화재 전문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진천의 도당산성과 청원군의 낭비성에 이르는 군사 요로상에 놓은 다리라 한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임연 장군이 그의 전성기에 자신의 고향인 구곡리 앞 세금천에 놓은 다리라고도 한다.
농다리 축조에 따른 아름다운 전설도 참 재미있다. 전설에 의하면, “임연 장군이 날마다 세금천에 세수를 하러 나갔는데,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강가에 나갔더니 건너편에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때 내를 건너야 하는 이유를 묻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으로 급히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정을 딱하게 여긴 임연 장군은 당장에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때 일을 마친 용마는 기운이 다하여 죽었는데 용마에 실었던 마지막 돌이 떨어져 그대로 둔 것이 마을 어귀에 남아 있는 용바위라 전해진다.”
진천 농교의 축조 시기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1932년에 간행된 『상산지』와 1936년에 발행된 『조선환여승람』이 남아 있다. 이 두 기록에 의하면 고려 초에 지어진 다리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존하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역사 깊은 다리로 오늘날 그 축조의 비법을 연구하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매년 홍수 때가 되면 전국 산야에서 큰 산사태가 일어나고, 애써 황폐지를 복구한 사방사업지나 야계사방지가 훼손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한 번 시공한 사방지가 진천 농다리처럼 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잘 견뎌낼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진천 농다리 탐방을 통하여 새롭게 새긴 교훈은 흐르는 물속에서 조금도 변치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자연에 순응한 선조들의 지혜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