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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앤 로지즈(Guns N' Roses), 그린 데이(Green Day), 뮤즈(Muse), 휘트니 휴스턴(Houston)…. 최근 한국을 찾았거나 방문 예정인 해외 유명 뮤지션들이다. 음악적 스타일이나 팬들의 성향이 제각각이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똑같은 무대에 오른다. 바로 서울 송파구의 올림픽 공원 체조 경기장이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한민국에서 1만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실내 공연장은 이곳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24년 전 체조 경기를 위해 건립된 이 시설이 콘서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규모의 해외 공연장에서는 한나절이면 끝날 무대 설치 작업이 이곳에서는 3박 4일씩 걸린다. 지면에서 2m쯤 떠 있는 마룻바닥은 열광한 관객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흥분하면 위아래로 흔들려 불안감을 준다. 낡은 플라스틱 좌석은 수시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 때로 조용한 감상이 필요한 공연의 분위기를 깬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곳을 찾는 공연기획자들은 "해외 뮤지션들이 한국에서는 공연장의 한계 때문에 원래 무대의 50% 수준만 보여주고 간다"고 한다.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공연장 숫자는 서울부터 제주까지 총 619개. 엄청난 숫자다. 지금도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거창한 이름을 붙여가며 공연 시설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공연기획자들은 끊임없이 "도대체 콘서트를 할 곳이 없다"고 한다. 왜일까? 고만고만한 객석 숫자 때문이다. 1000석 이하의 좌석을 가진 공연장에서는 유명 뮤지션의 콘서트를 벌여봤자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다. 집 앞에 아트센터가 있어도 정작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는 체조 경기장으로 가야 하는 이유다. 각 자치단체장들이 경쟁적으로 세운 비슷한 규모의 공연장들이 실제로 한국 대중음악시장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시행정의 일종이다.
음악시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1만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공연장이 필수다. 미국에는 대도시에 3~4개, 중소도시에 1개 안팎의 그런 시설이 있다. 일본의 경우 전국적으로 20여개의 대형 공연장이 있다. 이런 곳들은 콘서트, 스포츠, 이벤트 등 다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한국에 와서는 서울 체조 경기장에서 1~2회 공연을 하고 홀연히 떠나버리는 팝스타들이 일본에서는 한달씩 전국을 돌며 콘서트를 벌이는 것은 그런 탄탄한 인프라 때문이다. 공연 횟수가 늘면 입장권 가격도 더 내려간다. 홍콩·인도네시아·태국·싱가포르 등에도 1만명 이상 관객을 모을 수 있고 시설도 제대로 갖춰진 대형 공연장이 최소 1개씩은 있다. 그래서 팝스타들은 한국보다 동남아시아를 더 자주 찾는다. 이래저래 한국 관객들만 억울하다.
동방신기, 빅뱅, 비, 소녀시대 등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 가수들은 몇 분 만에 수만장의 콘서트 티켓을 매진시킬 수 있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대목인 연말연시에 대형 공연을 펼칠 수 있는 곳도 체조 경기장뿐이다. 지방에서는 이들의 스케일 큰 무대에 접근하는 길이 아예 봉쇄돼 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한국 음악의 위상을 감안하면 변변한 대형 공연장 하나 없는 현실은 참담하다. 세계 13위 경제 국가라면 이제 체육관 콘서트 수준은 벗어날 때가 됐다.
최승현 엔터테인먼트부 대중음악팀장 vaidal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