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찍기 로봇' 만드는 한국 시험] [上] 객관식만 가득…
창의력이 죽어간다김연주 기자 caro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박상기 인턴기자 고려대 역사교육학 3년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 100자평(20) 입력 : 2010.02.20 03:05
주관식도 단답형으로 출제 학생들, 무조건 외우기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춰 공부할 수밖에"
# 지난 10일, 서울 신길동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지연이(11)가 방에서 사회 공부를 하고 있었다.
5학년에 올라가는 지연이는
먼저 문제집의 '교과서 요약'을 외우고 나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모두 '불쾌지수가 가장 높은 달(月)은?' 같은 단답식 문제들이다.
막힘 없이 문제를 풀던 지연이가 '농촌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서술형 문제가 나오자 그냥 넘어갔다.
"시험에 이런 문제는 안 나와요. 안 나오는 걸 왜 풀어요?"
지연이는 평소 이런 식으로 공부한다.
시험 문제가 모두 선택형(객관식)이거나 단답식이기 때문에
최대한 열심히 외우고 문제를 많이 풀어본다.
# 오는 21일 공개채용 서류접수를 마감하는 게임업체 한빛소프트는
올해 처음 '창의력 면접'을 도입했다.
서류 항목에 학력·성적·나이 등 '스펙'(객관적인 조건)을 볼 수 있는 항목은 모두 없애는 대신
자신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도록 형식과 분량에 제한 없는
'포트폴리오'를 추가한 것이다.
면접에서도 '문제 해결 능력'을 주로 테스트한다.
서술 논술형 평가.hwp
한빛소프트가 이런 채용방식을 도입한 것은,
학업 성적이 훌륭해도 실전에서
자기주도적으로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면접에서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만 달달 외워 읊는 구직자도 많았다.
한빛소프트 윤복근 홍보팀장은
"학업 성적이 좋은 것과 창의력이 일치하지 않는 적이 많더라"고 밝혔다.
◆선택과 단답형만 있는 시험
기업과 대학은 '창의력'을 21세기 인재(人材)의 필수 조건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암기 위주의 기계적인 학습만 반복한 학생들은
'창의력 고갈'을 겪고,
기업은 창의력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학교 시험 문항이 대부분 선택형이나 단답식이다 보니
지연이처럼 '정답 찍기'나 '외우기' 실력만 연마하는 것이다.
취재팀이 서울과 경기도 지역 중학교 16곳을 무작위로 골라
작년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국어 문항을 분석한 결과,
서술형 비중이 전체의 30%를 넘는 곳은 3곳(19%)뿐이었고,
서술형 문제가 아예 하나도 없는 곳이 4곳(25%)에 달했다.
사회 과목 역시 서술형을 아예 출제하지 않은 곳이 5곳(31%)이었고,
나머지 학교는 대부분 서술형 비중이 30% 미만이었다.
대부분 학교는 주관식 시험도 '단답형'으로 출제하고 있었다.
'진시황제 때 전국에 황제가 직접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게 한 통치제도는?'
(서울 K중학교) 같은 식이다.
'무늬만 서술형'인 문제도 많다.
'훈민정음이 한문보다 익히기 쉬운 이유를 윗글 (가)에서 찾아 쓰시오'
(서울 Y중학교)처럼, 규칙을 제시하는 식이다.
◆숫자만 외우고 원리는 몰라
전문가들은 선택형·단답형 위주 시험에 익숙한 청소년들이
사고력·창의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의견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 M고 최모 교감은 "수업 시간에 질문하거나
의견을 말하는 학생은 거의 없고,
반성문조차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써놓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아이에게 '하루 중 오후 2시가 가장 더운 이유는 뭐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대답하기에,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시간은 몇 시냐'고
물었더니 '2시'라고 대답하더라"며 "
시험에 나온다고 무작정 '2시'라는 숫자만 외우니까
정작 원리는 이해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 신뢰하는 문화 이뤄져야
교사들은 선택형·단답형 문제를 주로 내는 데 대해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항변한다.
서술형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알지만,
학생·학부모로부터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경기도 한 중학교 사회교사 김모(26)씨는
"주관식 문제를 내면 꼭 항의하는 학생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아예 안 내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 김창환 선임연구위원은
"교사의 평가를 학부모·학생이 믿고 받아들이는 신뢰 관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답 찍기 로봇' 만드는 한국 시험] [下] 서술형 문제내면 당황,
직장에선 시킨 일만…김연주 기자 caro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박상기 인턴기자·고려대 역사교육학과 3년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 100자평(15) 입력 : 2010.02.22 03:09
정답 맞히기식 시험 익숙, 기출문제 답 암기해 적어…
문제유형 과감히 바꿔 자기 의견 쓰도록 해야
수도권의 한 대학에 다니는 남모(20)씨는
지난해 대학 입학 후 치른 첫 시험인
'법과 사회' 중간고사 시험지를 받자마자 '헉' 소리부터 나왔다.
7문제 중 5문제가 '서술형'이었기 때문이 다.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선택형(객관식)·단답형 문제만 보아온 남씨에게,
이날 시험은 날벼락처럼 느껴졌다.
답안용으로 B4 크기의 백지 3장을 받은
남씨는 결국 한장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남씨 같은 '벽'에 부딪힌다.
창의력 있는 시험 답안을 써내기는커녕
정해진 분량을 채우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것이다.
◆대학에선 '시키는 것만'
중앙대 교육학과 설현수 교수는
지난해 2학기 학생들이 제출한 기말고사
답안지를 보고 한숨이 나왔다.
계산 위주인 3~4번 문제는 대부분 그럭저럭 풀었지만,
'고전검사 이론에 비해서 라시(Rasch) 모형이 가지는
장점에 대해 서술하라'는 1번 서술형 문항이 문제였다.
수강생 51명 중 63%(32명)가
수업시간에 설 교수가 내준 자료만 단순 요약하는 데 그쳤다.
11명(21%)은 주어진 자료를 인용하고
자기 생각을 간단히 덧붙였으며,
기존 자료 외 새로운 내용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곁들인 학생은 7명(14%)에 불과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주어진 자료만 '모범 답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설 교수는 "중·고교 때 답이 주어지는
선택형 문제에만 익숙해서 그런지,
정형화된 모범 답안만 찾는 경향이 매 학기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상황에 닥쳤을 때 당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임지순 석좌교수는
"수업 시간에 다뤄준 유형에서 조금만 벗어난 문제를 내면
더 쉬운 문제도 당황해서 풀지 못하더라"며
"패턴을 외워서 푸는 데만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학생들은 대학에 와서도 '족보(기출문제)'를 찾기도 한다.
서울 소재 사립대 생명공학과 4학년 박모(26)씨는
"어렸을 때부터 문제를 반복해 풀던 습관이 들어 그런지,
족보를 보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
한 구인 포털사이트가 지난해 대학생 68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1%가 족보에 의존해 공부한다고 답했다.
◆기업 면접도 '암기로'
기업체의 채용 현장에서도 '로봇' 같은
구직자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D제조업체 김모 이사는 "면접에서
'우리 회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홈페이지에 있는 정보만 달달 외워서 말하는
구직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 전경련이 지난 2008년 국내 기업 159곳을 대상으로
신입 사원의 창의력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41%는 '그저 그렇다', 8%는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답이 주어지는 상황에 익숙하다 보니,
스스로 자신만의 '정답'을 찾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신세계 백화점 인사팀 임승배 부장은
최근 입사한 A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어 실력과 높은 학점 등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A씨는
시키는 일은 곧잘 해냈지만,
'부서 개선 방안을 내라'는 조금 색다른 주문을 하자 당황스러워했다.
임 부장은 "외국어나 컴퓨터 같은 '기술'이 뛰어난 사원들도
자기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시험문제를 바꿔야"
교수들은 "시험을 바꾸면 창의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고려대 국문학과 이상우 교수는
이런 '시험 효과'를 직접 경험했다.
연극사(史)에 대한 지식을 묻는 문제를 낼 때
성적이 좋았던 학생들이, "한국 연극이 나아갈 길을 논하라"는
서술형 문제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반대로, 평소 발표나 토론에서 창의력을 보여준 학생들은
서술형 문제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 교수는 "선택형·단답형에 익숙해진 학생들을 변화시키려면
문제 유형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초·중·고 시험 '단답형→논술형' 바뀐다
[중앙일보 2010-01-20 04:29] [박수련]
논술시험 도입되면 교사 1명이 200~300명 채점
서울지역 초등학교(5~6학년)와 중·고교 내신 시험의 주관식 문제가
단답형 위주에서 논술형으로 바뀐다.
이르면 올 4~5월 치르는
1학기 중간고사부터 도입될 예정이다.
국어·사회 과목에 우선 적용하고
단계적으로 대상 과목을 확대할 방침이다.
서울시교육청 김경회(부교육감) 교육감 권한대행은
19일 “창의력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학교 시험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이 같은 내용의 논술형 시험 도입 방안을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그는 “평가TF팀이 세부안을 만들고 있다”며
“다음 달까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초·중·고교에 보내
1학기부터 시행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교육청은 학교별 중간·기말고사에서
답안 분량이 300~500자 이상으로
긴 논술형 문제를 일정 비율 이상 출제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고교 ‘작문’ 같은 과목은
논술형 시험만으로 평가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서울의 초·중·고교가 내신 논술형 시험을 도입하면
다른 15개 시·도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암기 위주의 학원 수업보다 학교 공부에 충실하고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 고입·대입 입학사정관제 전형에서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경회 권한대행은
“논술형 문제에 대한 채점 공정성 시비를 예방하기 위해
과목별 출제·평가 기준을 만들고 교사 연수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2005년부터
중·고교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의 내신 시험 문항 중
30%는 서술형으로 평가하도록 했다.
2007년에는 비중을 50%로 높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가 단답형 문제를 내
학생의 사고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