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 한석봉의 어머니는 너무 잘 알려 졌지만
양사언의 어머니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이 글을 써 본다오 ![](http://i1.daumcdn.net/deco/contents/emoticon/etc_07.gif?rv=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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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사언 ※
<1517 년,중종 12년 ~~ 1584년 선조17년>
號 : 蓬萊.
石峯 韓濩, 秋史 金正喜와 함께 朝鮮 三大名筆 로 꼽힌다.
泰山雖高是赤山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登登不已有何難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것마는
世人不肯勞身力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
뫼만 높다 하더라.
===<楊士彦>===
시골 마을에 귀하신 분의 행차가 당도했다. 말도 여물을 먹여야하고
사람도 무엇을 먹어야 했기에 한적한 어느집을 찿게 되였는데....
어른은 외출을 하고 13세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상냥하게
우선 말의 여물을 내어주고 나서는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하며 부억으로
들어가 정성 스럽게 밥상을 차려 내왔다.
시장한터에 허기를 채운 그 일행은 얻어만먹고 그냥 갈수가 없어서
그 소녀를 부른다... 그리고는 부채 두개(靑扇.紅扇)를 건네주면서
농담삼아 이것은 채단(綵緞)으로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소녀는 예를 갖춘다고 붉은 홍보를깔고 정성 스럽게 받아서
간직하게된다.
세월이 흘러 어느날 한 노인이 楊希洙(성종때 승지를지냄) 를 찿아온다.
그 노인은 양희수에게 어느날 시골에서 식사를 하신후에 어느 소녀에게
채단이라며 부채 두자루를 건네 주신것을 기억 하는지요? 라고 물은즉
성희수는 한참 기억을 더듬더니 내 그러한일이 있었다고 말을했다.
그 노인은 그 아이가 내 여식인데 ~그 예단인 부채 두 자루를 간직한채
출가할 생각을 아니하고 아직도 홀로 지내고 있나이다........
이에 양희수는 내가 한 말에 내 책임이 있으니 ~나의 부인으로 맞아 들이겠오
라며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 들이는데 그 여인이 양사언의 어머니인것이다.
그때는 양희수에게는 본 부인이 있었으며 본처의 아들인 "양사준"이 있었다
그녀는 후처로서 자신의 몸에서 사언 과 사기 두 아들을 두었다.
세월은 흐르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고 전실 아들인 사준과 사언,사기 삼형제를
정성 스럽게 키웠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에는 班.常의 차별이 심했던터라 자신의 아들이
庶자 꼬리를 달고는 출세의 길은 물론 앞길이 캄캄한거라......
한날은 적자 소생의 큰 아들을 찿아가 나야 서모(庶母)로서의 삶이 운명
이였지마는 사언과 사기는 庶자의 꼬리를 떼아 내야겠는데.....
내가 죽으면 서모이기 때문에 큰 아드님이 6개월만 복을 입을것이니
영원히 서모 서자로 굳어질것이 아니겠오.
내가 아버님 돌아 가실때 같이 죽음을
맞는다면 아버님과 똑같이 복을 입게 될것이니 그 누가 뭐라 하겠오
그러니 내가 죽거든 부디 내 자식의 서자 꼬리를 떼어주시요.
그말을 남기고 과연 영감이 황천으로 떠나는날 은장도로 죽음을 같이 하여
세상을 하직하면서 두 자식의 서자의 멍에를 벗겨 주었다한다.
그 어머니의 고귀한 희생으로 두아들은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율곡의 어머니나 한석봉의 어머니에 비견될만큼 훌륭한 어머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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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士彦의 詩碑와 親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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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士彦 의 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