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글사랑에서의 내 필명(?)을 보고 '자신도 레종 데트
르(존재이유)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으며 나의 생각
은 어떠한지 궁금하다'는 짧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러나 실제 나의 레종데트르와 내가 생각하는 레종데트르
사이에는 해저 3만리와 달착륙의 관계만큼이나 동떨어져 있
는 무관한 것이란 생각에 답메일을 보낼 수 없었다. 그리
고 그에 관한 고민은 요 며칠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오
늘 난 그 중년이 요리하는 바쁜 손놀림속에 있는 중국집특
유의 움푹파인 시커먼 요리기구를 보며 레종 데트르를 다시
금 떠올렸다.
그 중년 주방장의 레종 데트르는 무엇일까. 새벽녘에 일어
나 중국음식을 요리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대주는 중간 재
료상들에게서 오징어며 새우며 각종 야채등을 사들이고 그
것들이 신선한지 일일이 체크하고 또한 매달 가격협상을 해
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서는 학교가는 자식들의 준비
물이며 용돈을 챙겨줘야 하고 매학기 혹은 내년 등록금을
준비하거나 내년에 시집가는 딸의 혼수비용을 마련해야 한
다. 늙으신 어머니의 병치레로 잔뜩 쌓인 진료비청구서때문
에 담배 반갑을 한자리에 앉아 피워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중년주방장은 하루종일 기름튀는 주방에서 예의 그 후라
이팬에다가 아침에 사들인 야채며 온갖 해산물을 볶고 튀기
는 것이다. 춘장이 떨어지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들어간 배
합비율로 재주좋게 보충해주어야 하고 국수도 알맞게 삶아
야 한다.
그의 레종데트르는 우리가 폄하시켜 부르는 "짱개이"를 만
들어 팔아 '돈을 버는것'이다.
어쩌면 레종 데트르란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의 인생을 준비
해주고 누군가의 남은 인생을 정리해 주어야만 하는 시기
가 오기전에 누릴 수 있는 청춘의 마지막 지적 사치에 불과
할 지도 모른다.
몇십년이 흘러 그 중년의 주방장이 늙고 병들어 인생의 마
지막순간을 앞두고 있을때 누군가 당신인생에 있어서 "당신
의 레종 데트르는 무엇이었소" 하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수
십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어디에 있었는
가를 생각하며 응축된 허무를 한줄기 눈물로 흘려버릴 지
도 모른다.
"아 과연 나의 레종 데트르는 무엇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