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의 빛 편집실
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7. 혀에서 나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면 우리가 날마다 하는 말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든지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같은 장 34절에 나와 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아셨던 것이다.
불평이나 어리석은 말, 그리고 과장된 말은 우리의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세미한 성령님의 음성에 의해서 멈추어질 수 있다. 자신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함부로 말하고 경건하지 못한 억양과 말투로 말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 사람에게 사도 야고보의 말씀을 읽어주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 1:26.
우리에게는 다루기 어려운 혀가 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의 혀는 온 세상에 죄와 악을 퍼트려 나가기 위하여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교활한 혀, 다른 사람의 뒤에서 수근거리는 혀, 잡담하는 혀, 가당치 않게 간섭하는 혀, 덫과 같이 교묘한 질문을 던지는 혀, 다른 사람들이 악한 추측이나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슬쩍 유도하는 미끼를 던지는 혀, 험담하는 혀, 감추고 싶은 다른 사람들의 부끄러운 비밀을 공개하기 위하여 열을 올리는 혀,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하여 가혹한 말하기를 좋아하는 혀,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을 숨기기 위하여 젊잖게 움직이는 혀들이 지금도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파괴시키고 있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놓는 혀, 선을 악으로 덮어 씌우는 혀, 순결을 더러움으로 바꾸는 거짓된 혀들이 지금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사단은 이러한 혀들을 좋아한다. 특별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혀를 가지고 있을 때, 사단은 매우 즐거워한다.
자신의 죄와 부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지만,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비평하고 정죄할 틈을 찾기 위하여 살피는 혀들이 있다. 시기와 질투는 혀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서 움직이게 만든다. 질투의 혀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살짝 공개한다. 시기의 혀는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의 꾸러미를 조용히 풀어 놓음으로서 그것을 재미있는 뉴스거리로 삼는다.
어떤 사람은 상상하거나 악한 추측하기를 좋아하는 혀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혀는 친구와 이웃이 피차간에 아무런 생각없이 마음 놓고 했던 말들을 수집하여 악한 소문을 만들어서 퍼트린다. 상대방의 진정한 의도와 감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악한 혀는 마치 자신이 직접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자신있게 이야기 한다. 너무나 하찮아서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말들이 사단의 확대경을 통하여 살펴지고 분석되어서, 결국에는 한 사람의 생애를 암흑 가운데로 밀어넣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바로 이것이 악한 혀가 하는 일이다. 악을 추측하는 혀를 가진 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혀가 무책임하게 내뱉는 말들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혀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등지게 된다.
혀여! 친절을 말하라. 누가 그대에게 형제자매를 비평하고 정죄하라는 권위를 주었는가? 친구의 우정을 가장하여 어떤 사람의 비밀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내고, 그렇게 얻은 비밀을 이용해서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혀가 할 수 있는 일인가? 허공에 떠돌아 다니는 소식을 수집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의 평판과 인격 위에 의심의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미소짓는 것이 그대 혀의 일이란 말인가? 사단은 처음부터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였다(계 12:10).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인의 혀인 네가 사단의 일을 돕는단 말인가?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대의 혀를 주목하고 계신다. 그대의 혀를 올바르고 의롭게 움직이도록 하라. 그대의 혀에 재갈을 물려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혀가 그대의 영생에 덫을 놓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죄와 잘못을 오래 동안 참으시고 동정하셨던 것처럼, 그대의 혀도 다른 사람의 부족에 대하여 인내하고 동정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인의 혀는 다른 사람의 결점과 약점을 폭로하지 않는다. 그대 주변을 떠돌아 다니는 모든 소문과 모략들이 그대의 혀 속에서 잠재움을 당하도록 하라. 그대의 혀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결점에 대하여 가혹한 비평을 말하게 하는 대신에, 그대 자신의 부족에 대하여 비판하고 분석하게 하라! 그대의 혀는 야비한 것들로부터 돌아서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우며 온유한 말을 함으로써, 그대의 분위기와 사상을 하늘로 올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믿는 복음에 합당하게 말해야 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말하라” 빌 1:27. 이 말씀이 우리가 말하는 내용과 말씨에 대한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대의 혀가 말하고자 하는 말들이 복음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거든 그대의 혀를 씹음으로써 악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으라. 설교 단상에서 교인들의 웃음을 얻어내기 위하여 농담하는 목사님, 교회에서 천박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장노님, 교인들의 결점을 과장하여 포장하는 집사님, 무지와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죄로 과장하는 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조심하라.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대표적 의인들의 총체인 14만 4천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그 입에 교활함을 찾아볼 수 없고” 계 14:4~5(한글 킹제임스역). 그대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하루 종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가 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혀는 거듭나야 한다. 그대의 혀는 그대의 마음을 나타내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혀가 거듭나려면 먼저 마음이 거듭나야 한다. 샘이 맑아야 물이 맑듯이, 마음이 깨끗해야 말도 깨끗해 진다. 거듭난 혀는 말을 골라서 한다. 거듭난 혀는 말을 선택해서 하기 때문에 그대 안에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이 가족과 교회와 세상 앞에 나타나게 된다.
정직함이 아무런 희생을 요구하지 않을 때, 혀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한 말이 희생과 손해를 가져올 때, 혀는 정직한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간교한 방법을 좋아하는 혀는 정직한 원칙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사들은 진실한 혀, 정직한 혀, 솔직한 혀를 가진 자들을 위하여 승리의 면류관을 만들고 있다. 그대의 혀가 무엇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말이 하나님의 영광에 어떠한 그늘을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라!
스트레스와 피로가 엄습해 올 때,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짜증스럽거나 귀찮은 태도로 말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는데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험담을 하고 저속한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그 사람은 정말 원만하고 모나지 않은 좋은 사람이야”라는 평판을 얻어내기 위해서, 쓸데없고 무의미한 대화 속에 우리의 혀를 동참시킨다면, 우리는 우리와 구세주와의 살아있는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말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에서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악한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혀를 움직일 때, 유치한 대화 속으로 혀를 넣을 때, 악한 공모를 하는 일에 혀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악한 험담을 하고, 그대가 이룩한 최선의 결과에 대하여 무시하는 말을 할 때, 그대의 혀가 그 사람에 대하여 거친 반격을 가하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대의 혀가 내뱉는 말을 보면서 좌절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의 혀가 하는 말을 통하여 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은 온순함, 인내, 친절함, 부드러움 이상의 것들로 형성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필요하고 선한 것들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용기와 불굴의 노력이 포함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정해주신 길은 좁은 길, 극기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에 들어가서 어려움과 낙망을 뚫고 전진하는데에는 부드럽고 온순한 것 이상의 품성이 요구된다.
힘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순탄해지고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 슬픔과 낙망으로 인하여 맥빠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손을 붙잡아 주고 환한 미소와 함께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을 할만큼 강해진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잘못된 교육과 타고난 천성으로 인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쉽게 기가 꺽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는 일을 추진해 나가는 추진력이 결핍되어 있다.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용기가 있고 적극적이며 희망적이어야 한다. 사단이 그의 대리자를 통하여 시험을 걸어 올 때,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부드러운 대답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악에 대하여 과감하게 저항하는 용기를 소유해야만 영적 생애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사랑과 함께 자신의 감화력을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품성의 힘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환경을 지배할 수 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반대를 당하고 어려운 환경에 봉착하며 방해를 받을 때에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투쟁과 난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발휘하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에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바뀌어지거나 굴복될 수 없는 확고부동함이 있어야 한다. 쉽게 우쭐해지거나, 쉽게 매수되거나, 쉽게 겁을 내지 않을 만큼 자신이 밀고 나가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뚜렷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 있어서 정직과 진실이 풍겨져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진리와 그 분의 사업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고난과 조롱을 받고, 그로 인하여 간혹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기 싫은 봉사를 마지 못해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일을 시간으로 계산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사업 속에 자신의 생애를 투자할 때에 그것을 손해로 여기지 않는 사람, 가장 높은 희생과 헌신을 바친 다음에 자신을 가장 낮고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둘 수 있는 사람, 가장 많은 것을 바쳤지만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낮은 표준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거룩한 표준을 위하여 굳건하게 걸어가는 사람, 실망과 낙담 중에 있을 때에도 입을 굳게 다물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적게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해주실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많이 신뢰하는 사람, 죄의 유혹 속에 빠져 있을 때에 하늘을 향하여 구조의 손을 뻗는 믿음을 가진 사람. 지금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우찌무라 간조
생계를 위한 전도
전도의 정신으로 가장 비열한 것은 전도를 직업으로 여기는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일하는 자는 그 삯을 받음이 마땅하”지만,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도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살 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도에 기울이는 노력과 정열을 다른 사업에 기울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직업으로서의 전도는 가장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다. 몇 해 동안의 신학 연구를 과학이나 공학 분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은 보상을 약속받을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전도는 보수가 적으므로 부적당하고, 보상을 염두에 둔 전도는 이미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부적당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도 사업을 생계의 수단으로 하는 사람은 그의 설교와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전도자의 동기와 목적을 알아차리고 그의 설교를 전혀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실망당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온갖 직업인이 그 나름대로 존경을 받지만, 전도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전도자는 멸시의대상이 될 뿐이다. 신자들은 금전을 요구하지 않는 목사에게는 목사직을 주기 원하지만, 금전을 추구하는 목사에게는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세상이 목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목사가 자신의 유익을 돌보지 않기 때문인데, 목사가 자신의 앞가림을 먼저 요구하면 세상은 그를 목사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전도자는 사람들의 대우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고, 사람들 또한 그러한 목회자에 대하여 실망하게 된다.
이러한 목사는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식이 내일부터 굶주림에 울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양심과 진리의 요구에 따라서 교회를 개혁하고 진리를 세우려고 하면, 그가 반드시 유지해야만 하는 자리가 위태롭게 되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조용히 입을 다문채 불의를 묵인하면, 교회 안의 정의로운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다. 목사는 결국 어느 한쪽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자신의 생계비를 대줄 수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게 되는데, 이로서 정의로운 사람들은 그 목사에게서 등을 돌린다. 또한 자신에게 매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는 사람들 역시 마음 속으로 목사의 비굴함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대하지 않게 된다. 목사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전도도 실패로 돌아가고 생계의 유지도 어렵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면서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실망에 잠기게 된다. 이것이 전도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목사들이 예외없이 걸어가는 길이다.
명예를 위한 전도
어떤 그리스도인은 명예를 위하여 전도를 한다. 인생 50에 공이 없으면 부끄럽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공을 세우고자 한다.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할 힘도 없고, 천하의 관심을 집중시킬만한 재능도 없으며, 재물의 힘으로 재벌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유명한 전도자가 되어 천하를 유세한다면 그러한 성공이야말로 대정치가나 장군에게 비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들 수 있는 전도자!
혼탁한 정치계에 뛰어들어도 분주하기만 했지 얻는 것은 거의 없다. 어쩌다가 우주의 한 귀퉁이를 들여다 보고서 학문가로 자처해도 손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그러나 비록 가난할지라도 선거 시절이 되면, 정치꾼들은 유명한 전도자의 위력을 알아 준다. 대개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부류의 전도자들이었다. 프랑스의 리쉐리아나 마자렝 같은 사람들도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명예를 위하여 종교 개혁의 검을 들었다고. 사실, 전도심과 명예심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매우 구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명예, 사람이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예도 적지 않다. 사람은 반드시 진리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에서 비롯된 전도심과 명예심에서 비롯된 전도심을 구별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사람의 일은 백년이 지나지 않으면 그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분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으며, 양은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의 음성을 구별한다. 성실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으며, 간사한 사람은 어떤 것이 간사함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간사한 자들에게 존경받는 것, 바로 이것이 그가 간사한 인간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어떤 전도자 주변에 간사한 자들이 모여 있는가? 그가 간사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라.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는 사람은 모략과 책략이 빠르고 강하다. 이에 반하여 성실과 곧은 마음은 곧바르게 말하고 곧바르게 행함으로써,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이익을 추구하고,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의를 추구한다. 명예를 원하는 자는 이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곧바른 길을 걷는 자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일편단심이 있다. 명예를 쫓는 자는 어떤 말을 할 때에 먼저 상대방의 지위나 성격을 살핀 후에 말하고, 곧바른 원칙을 따르는 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할 뿐이다.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는 자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날 경우 한마디 조언을 하고는 식사와 잠자리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지만,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가련한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구제되기까지 불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명예를 생각하는 자는 부자를 즐겨 방문하며 허식으로 가난한 자를 찾아보지만, 곧바른 생각을 가진 자는 가난한 자를 즐겨 돌아보고 부자 만나기를 꺼려한다. 명예를 찾는 자는 자신의 경쟁자의 몰락을 기뻐하지만,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원수의 실패에도 눈물을 흘린다. 명예를 위해 사는 자는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자를 좋아하고 강직한 자를 싫어하지만, 곧바른 원칙을 따라 사는 자는 맹종을 미워하고 강직을 존중한다.
명예심은 전도 사업을 요란스럽게 치장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부류의 욕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많은 원수가 생긴다. 교회 안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위대한 무사는 자신보다 강한 적을 존경한다. 우에스 겐신은 자신의 정적인 다케다 싱겐의 죽음을 듣고 금식하며 통곡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은 그렇지 않다. 정적은 원수를 용서하지만, 종적은 결코 자신의 경쟁자가 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 것이 교회의 실상이다. 사회적인 죄인은 용서받아도 종적은 용서받지 못한다. 국사범은 감형될 수 있어도, 종적에게는 오직 중형이 있을 뿐이다. 타교파의 목사에게는 관용을 베풀지만, 같은 교단의 목사에게는 결코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무신론자들은 관용으로 대할지라도, 같은 교회의 종적에게는 결코 압박의 손을 늦추지 않는다. 속좁은 종교인은 자신의 경쟁자인 종적을 땅 끝까지 쫓아가서 그를 치욕의 수렁에 밀어 넣고서야 마음을 누르러 뜨리는 것같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여, 그대의 종적이 그대를 꺼꾸러 뜨리기 전에 명예심을 버리라. 교회 안에 감도는 살기를 피하고 싶은가? 그대의 명예심을 버리라. 비록 명예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라도, 교회는 드러나는 사람을 싫어한다. 마호멧이 메디나로 피난간 것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형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교회의 정신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대종교가는 명예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마틴 루터나 낙스가 세상에 나온 것은 스스로의 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누가 교계의 시끄러운 싸움과 뒤에서 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질투를 감당할 것인가? 명예를 쫓는 자여, 하나님이 그대를 사랑하니 그것으로 만족하는 정신으로 살라. 여러 사람들 앞에 그대의 누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 하라. 이것이 참 전도 정신이다. 교회에서 자신의 명예를 세우려고 하는 자는 아직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다시 말하지만, 명예를 얻고자 하거든 교회 안에서 일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에게 교회 전체의 질투가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를 세우려거든 차라리 의회나 정치계로 가라. 그 곳에선 명예를 세운다고 해도 세상이 그대를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총탄과 폭연 속에서 군인의 명예를 세운다면, 세상은 오히려 그대를 존경할 것이다. 그대, 미련한 자여, 왜 교회에서 명예를 세우려고 하는가? 그대는 지금 미련의 극치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교회를 위한 전도
직업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한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지만, 오직 교회만을 위하여 일하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사람에게는 본성적으로 당파심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당, 나는 그것을 위해 일해야 한다. 나의 당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당을 꺼꾸러 뜨려야 한다. 내 당을 확장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당을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도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정신으로 전도에 임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찬탄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독일의 30년 전쟁도 당파심에서 시작되었고, 유럽 역사의 1천년 갈등도 당파심에서 비롯되었다. 아시아를 복음으로 거머쥐려던 제수잇의 열심과 희생 또한 당파심이다. 당파심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당파심은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냈고, 새로운 국가를 일으켰다. 그러나 당파심은 박해의 정신을 그 속에 품고 있다. 당파심의 원 뜻은 세계를 나의 당에 굴복시키는데에 있다. 그래서 당파심을 품은채 교회를 위하여 전도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정신을 갖고 있다. “세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독교이어야 할 뿐 아니라 내가 믿는 기독교이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교회여야 한다.” 이러한 당파심에 이끌려 하는 전도는 자신이 속한 교회를 위한 전도이다. 자신이 믿는 신조를 거절하는 사람은 핍박하고 외롭게 따돌리는 것이 당파심에 근거한 교회 사랑의 실체이다.
그러나 당파심의 바닥은 욕심이다. “나”의 욕심을 한 단체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전도의 실체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속한 당을 이용해서 “나”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디에 이단이 있다고 하면, 전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연합해서 한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다. 기독교회의 수십여개의 교파가 연합하여 불교나 회교에 맞서는 따위가 바로 이러한 일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내 뜻을 확장하는데 있다.
시인 코울리지는 말했다. “진리보다 기독교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기독교보다 자기 교회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 위에 진리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위하여 전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 위에 자신과 교회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전도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전도이며, 명예를 위한 전도와 일맥 상통한다. 교회를 위한 전도는 전도지 돌리기 경쟁을 야기시키며, 신자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아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물 속에 잠그는 침례를 베푼다. 그 결과, 교회의 질서와 표준은 땅에 떨어지게 되고, 세속과 유행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옴에 따라서, 교회는 한 사람은 심판하고 한 사람은 바로 잡는 비판과 논쟁의 터로 변해 간다. 교회는 그 원래의 목적인 심령의 구원, 선행의 실천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가 없게 된다. 이것이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전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국가를 위한 전도
사리 사욕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또는 교회에 대한 얄팍한 충성 때문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하는 전도가 있다. 여기에 이르면 전도는 사욕을 떠나서 대의와 공익의 성격을 띄게 된다.
애국심은 사람의 본성이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정은 어머니에 대한 정과 같다. 나를 생각하기에 앞서 국가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다. 전도자는 애국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종교는 한 국가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성질 자체가 우주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직접적인 목적은 국가를 안위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사람의 영을 다루는 일이며,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밝혀서 어떻게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애국을 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서 논하는 것일 뿐이지, 종교를 통하여 국정에 간섭하여 종교와 정치를 혼돈시키면 그것보다 더한 재난은 없을 것이다.
중세기 동안에 천주교회와 로마제국이 손을 붙잡음으로써, 천년 동안의 암흑이 유럽을 뒤덮었던 것처럼, 국가와 종교의 연합은 반드시 핍박과 순교를 몰고 온다. 종교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지만, 종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을 사람의 일에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국가를 위해 전도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람의 일에 이용하고 싶은 유혹과 시험에 빠지기 쉽다. 정치인들은 종교 세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고 할 것이며, 종교인들은 정치 세력을 등에 엎고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시키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므로 국교(국가의 종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종교이다. 어떤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종교를 국교로 만들어서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의 본질조차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대개 사회 개혁과 국가 혁신이라는 표어를 내건다. 그들은 종교는 현세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를 개혁하여 부조리와 부패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종교를 통하여 국가를 구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말하는 바가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의 근본인 영의 세계를 버리고 현세에만 집착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위대한 도를 일개 국가에 가두어 놓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영감적 설교 대신에 정치와 시사 연설이 예배 시간을 채우게 되며, 신자들의 제자 훈련은 국가 장래에 대한 토론회로 대체되고, 새벽 기도회는 눈물어린 회개와 간증 대신에 국가개혁을 위한 기도회로 바뀌게 된다. 그들이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은 고작해야 국가의 법률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개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목적한 바가 성취된다고 할지라도 국가의 구성원인 사람의 이기적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국가 사회의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온 우주에서 가장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전도자가 정치가의 흉내를 냄으로써, 전도자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정치 개혁이 목적이라면,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사회 개혁이 목적이라면, 사회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종교를 통하여 사회와 국가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그대의 뜻은 가상하지만, 그대는 목사의 길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의 목적은 길잃은 영혼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지, 국운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
전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때야 비로소 순수한 종교 사업에 접어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말한 “주의 집을 위한 열정이 나를 삼킨다”는 정신이다. 또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는 정신이며, 이것이 “너희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주(진리) 안에서 복종하라”고 권면한 베드로의 정신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외의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헛일이요, 장난이다. 그것은 전도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전도하지 않는 전도자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그렇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전도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만” 하는 전도, 내 평판과 생명을 먼지로 여기고, 내 명예를 분토에 묻어버리는 전도는 많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혈육과 상의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늘의 음성을 믿으며, 다수의 반대를 개의치 않고, 사업의 성공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직 하늘의 명을 쫓는 정신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진짜 전도자의 숫자가 적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만 전도하려면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파심에 기초한 교회를 위한 전도나 애국심에 기초한 국가를 위한 전도에는 아직도 이기심이 섞여 있으며, 자아가 살아 있다. 자기에 죽고 세상에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며, 모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두려움이 없는 자는 심령의 자유와 평안을 얻은 자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전도에는 걱정이나 전략, 수단 등으로 인하여 혼란케 되는 일이 없다. 세상이 전도자를 따라야지 전도자가 세상과 야합하여 안일을 꾀해서는 안된다. 온 세상 모두가 전도자에 맞서서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전도자는 혼자 서서 진리를 지켜야 한다. 이러한 전도자에게는 태산을 움직이는 태연함이 있으며,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는 평안이 있다.
전도는 하나님만을 위해서 해야 비로소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대세의 흐름을 역행하고, 대다수의 위협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만이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유익을 줄 수 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전도한다는 말은 뜬 구름 위에 앉아서 신학을 분석하고 성령의 기적을 기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만을 위하는 전도는 자신의 교리와 맞지 않는 자를 괴롭히고 출교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라는 이름 하에 십자군을 파병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했던 것이 하나님을 위한 전도가 아니다. 정신병자를 마귀의 화신이라고 해서 물 속에 집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실천했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에는 열심이 있는 반면에 동정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성실과 정직과 충성과 겸손과 온유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만을 위한 전도에도 결핍될 수 있는 정신이 있는데, 그것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슬프고 외로운 자들을 껴안아 주며, 자신과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관용하는 정신이다.
사람을 위한 전도
사람을 위한 전도라는 말은 사람들의 요구와 기호에 맞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한 자가 어찌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복음을 조작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종교에 빠져 있는 자들은 감정적인 사랑에 빠져서 공의와 율법을 소홀히 여기며,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악을 다루는데에 있어서 매우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마음에 간직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들을 외면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섬길 수 없다. 인간은 사람과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늘에 걸려 있는 해와 달과 별을 섬기지만, 비록 그러한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라고 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의탁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바칠 하나님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눈 앞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물과 희생을 받을 대리자를 이 세상에 두셨다. 우리가 숭배할 하나님은 전혀 형체가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있는 분명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봉사함으로써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고, 그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의 전부를 거기에 쏟아 부음으로써 우리는 직접 하나님과의 교제를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영안으로 볼 수 있다. 이 우상은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이 허락하는 아름답고 귀한 우상이다. 나의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이 우상이란 무엇일까? 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쳐서 성경이 지정한 이 우상을 섬기리라.
북두칠성이나 북극성이 하나님이 계신 장소 아니다. 천둥이 쳐서 산천초목이 흔들릴 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이 아니다. 갓난아기가 말구유에 누운 곳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장소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신다. 사람을 통하여 우리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사람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다음과 같은 로욜라 공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한가지 의미있는 교훈을 제시해 준다.
“로욜라 공은 중세기 때에 한 성의 군주로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우길 원했는데, 하루는 그의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실 때에 사용했던 금잔,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금잔, 그것을 찾아낸다면 교회를 위하여 매우 의미있는 봉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앉아 용기 백배하여 성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문둥병을 앓는 자가 로욜라 공 앞에 나타나 엎드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동냥을 구했다. 로욜라 공은 성급한 말투로 ‘나는 하늘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구세주의 금잔을 찾으러 가는데 어찌 네가 나를 번거롭게 하느냐!” 문둥병자는 로욜라 공의 소매를 붙잡으면서 애걸하였다. 로욜라 공은 크게 노하며 금화 하나를 땅에 던진 후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로부터 수십년 동안 로욜라 공은 유럽의 전지역을 구석 구석 뒤져서 금잔을 찾았지만 헛수고 였다. 드디어 그에게도 가난이 닥쳐 왔으며, 머리에는 하연 서리가 내리게 되었다. 마침내 로욜라 공은 자신의 뜻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깨닫고 고향 땅에 돌아가 여생을 마치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가 다시 고향의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눈이 내리고 강물은 얼어 있는 추운 겨울이었다. 다 낡은 옷을 걸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다시 문둥병자를 만났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수십년 전에 큰 뜻을 품고 떠날 때에 그의 말 앞에 엎드려고 구걸하던 거지였다. 환난과 고생으로 인하여 꺽어진 그의 마음 속에서 깊은 동정심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돈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베낭 속에 가지고 있던 빵 한 조각을 꺼내어 절반을 잘라 거지에게 주면서 ‘나는 이제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게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쪽박을 꺼내어 강가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 냉수를 떠다가 문둥병자에게 주면서 ‘자비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마시게’라고 말해 주었다. 로욜라 공의 친절을 받은 그 거지 문둥병자는 갑자기 그 모습을 바꾸어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모습으로 로욜라 공의 앞에 섰다.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넋을 잃고 서있는 로욜라 공을 향해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니 두려워 말라. 거룩한 잔을 찾으려고 여러 나라를 헤메어도 소용없다. 보라. 잔은 여기에 있다. 강물을 길어 온 그 쪽박이 바로 금잔이다. 내게 떼어 준 빵 반 조각은 찢어진 나의 살이다. 이 냉수는 십자가 위에서 흘린 나의 피다. 가난한 자와 더불어 나누는 식사야말로 진정한 성찬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로욜라 공은 드디어 깨달았다. 그렇다. 세상의 가난한 자가 그리스도이다.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고를 개방하여 성밖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로 평생 낙을 삼았다. 그 결과 그가 다스리던 모든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였고, 로욜라 공 역시 기쁨과 영혼의 평안을 가지고 일생을 마쳤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신다.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왕자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자의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의 모습에 가깝다.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니라” 마 25:40.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가난한 자에게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된 교회의 부흥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봉사로 증거된다.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사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 질문에는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주십시요” 라는 의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기 위하여 신학적 논리를 사용하는 대신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신 자신의 봉사를 설명하셨다. “눈먼 자가 보며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는다.” 예수께서는 환자들의 치료 봉사와 함께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복음을 듣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거짓 예언자는 가난한 자에게 뜻을 두지 않는다.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고, 은근히 부자 찾기를 즐기며, 귄위를 의지하고 금력을 존중하는 자는 사람을 위한 전도자가 아니다. 그대여, 사람을 위한 전도가가 되기 원하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가라. 가난한 자를 중히 여기고 부자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증거 중의 하나이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이 그대를 사모하고 존경하여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이다. 부자 앞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가난한 자 앞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은 그대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표시이다.
가난한 자란 반드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직접 돌보시는 진짜 가난한 자이다. 그 영혼에 심한 허기를 느껴서 자신의 영혼을 가득 채워줄 수 진리를 사모하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 그러므로 비단 옷과 대궐 같은 집에서 좋은 음식으로 배부른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백만의 재산이 있지만 그 마음이 하늘과 같이 비어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위한 전도란 심령의 가난함을 고쳐주고, 육신의 가난함을 위로하는데 있다. 전도는 심령적 자선 사업이다.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기 때문에 나는 내 심중의 무한한 위로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만일 금과 은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즐겨 하나님께 바쳐 가난한 인생들을 구제하리라. 그러나 내게는 재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받은 나사렛 예수의 구제력으로 가난과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다.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먼저 하늘의 부유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심령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구제의 어려운 점은 항상 나누어 줄 것이 부족한 데서 생긴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왜 나누어 줄 것을 걱정하겠는가? 나누어 줄 것을 잔뜻 쌓아 놓고 나누어 주는 자가 아까워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심령적 자선 사업에 있어서는, 나누어질 은혜가 하늘로부터 무한하게 공급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찾아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삯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는 것이 쾌락인 사람이 왜 삯을 요구하겠는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전도가 어렵게 되는 것은 나누어 줄 영의 결핍에서 온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바울은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전도는 생계를 위한 전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면, 그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 악마를 꾸짖고 분연히 자신의 마음에 붙으려고 하는 야심의 꼬리를 떼어버렸을 것이다. 세계를 전도하고자 하는 그의 분명한 목적은 그로 하여금 바리새당파를 버리도록 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는 대양을 건너 헬라와 유럽으로 전진하였다. 자신의 마음과 생애 속에 부끄러운 것이 없었던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마음 속에 부끄러운 것이 감추어져 있는 자는 감히 복음 전도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워 할 것이 없다는 말과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맹자는 말하였다. “부끄러움은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잔꾀를 부리는 자는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아직 전도자가 됨을 부끄러워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전도가 무엇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전도자에게는 연민의 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전도 사업은 깊은 연민의 정에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전도하시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5~36. 바로 이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연민의 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이 더러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이 기독교회의 시작이며, 이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사람을 위한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전도이다. 여기에는 교회가 발급하는 면허증이 필요 없으며, 교회의 인정도 필요없다. 진리 그 자체가 유일한 조력자이며 증인이다. 내 머리 위에 유명한 목사의 손이 얹혀지고, 내 이름 앞에 목사, 박사와 같은 부담스러운 칭호가 넘치게 붙는다고 해도, 가난한 자가 나로 말미암아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내가 받은 안수는 허식이고 허례이다. 오해하지 말라. 지금 나는 사람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전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며, 진리를 존중하는 전도이다.
어떤 세인은 말하기를 “쓸모없는 인간은 중을 만들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 전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를 버리기로 결정한 자만이 전도자로 설 수 있다. 전도의 직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강권함을 받은 자만이 전도의 직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전도의 직에 부름받지 않은 자가 그 직에 매달리는 것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그 직을 담당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큰 죄를 짓은 것이다.
에가타 뜨레쉬 의사
통풍은 비정상적인 푸린(purine)의 대사작용으로 생기는 관절염의 일종이다. 푸린 화합물의 최종 산물은 요산이므로, 통풍의 치료는 푸린(요산)을 정상적으로 배출시킴으로서 관절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통풍은 대개의 경우 엄지 발가락에 오지만, 발목, 무릎, 팔꿈치, 손이나 손목에 생기는 경우도 있다. 첫번째 통증은 한 밤중에 갑자기 엄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증세로는 염증이 생긴 관절에 심하면서도 계속적인 통증이 있다. 관절이 부어오르고 민감해지며, 관절부위가 빨갛거나 보라색으로 변한다. 관절을 움직이거나 누르면 굉장한 통증이 유발되며, 가장 아픈 고비가 지나서 통증이 가라앉으면 피부가 가렵고 벗어지는 경향이 있다. 통증이 엄습할 때는 일반적으로 고열, 식욕을 잃어버림, 위와 장에 문제가 생김, 소변량의 감소와 같은 증세를 동반한다.
통풍의 발생 빈도는 증가 추세에 있는데, 일반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많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35세 이후에 발병되며, 여자는 폐경기 이후에 발병된다. 또한 통풍은 가족들 간에 유전적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유전적으로 요산을 효율적으로 배출하지 못하는 사람이 푸린(요산)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과다하게 섭취할 경우, 통풍이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진다. 요산의 양이 증가되면, 관절주위의 근섬유, 피부, 콩팥 섬유질에 요산이 고체 상태로 침전되어 쌓이는데, 이 고체 덩어리들을 통풍 결절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천연 치료법
1. 통풍 치료에는 체중 조절이 매우 중요하다. 중년 나이의 통풍 환자들 중 다수가 체중 초과이다. 체중이 늘어감에 따라서 혈중 요산량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풍 환자들은 체중을 정상보다 10~15% 이하로 낮추어야 한다. 체중 감량은 서서히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체중을 갑자기 줄일 경우, 오히려 통증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2. 비록 단기간이라고 할지라도, 통풍 환자는 금식을 하면 안된다. 금식은 혈중 요산염의 양을 현저하게 증가시키는 문제를 가져온다.
3. 수분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좋다. 수분을 많이 섭취하면, 요산의 배출이 원활해지며 신장에 주는 부담도 줄어든다. 통증이 심할 때는 하루에 2리터의 수분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매일 생기는 요산의 2/3는 신장을 통해 배출되고, 나머지 1/3은 분해된다. 통풍 환자의 20%는 신장 결석을 가지고 있는데, 결석의 발생 빈도는 요산의 양에 따라서 증가된다.
4. 정제되지 않은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하고, 저단백질과 저지방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된 음식은 요산이 몸밖으로 배출되는 양을 증가시키며, 이와 반대로 고지방 음식물은 요산의 배출량을 낮출 뿐 아니라, 통증을 유발한다. 일본에서는 단백질의 섭취량이 높아짐에 따라 통풍의 발생 빈도도 높아진다는 통계 결과가 발표되었다. 특히, 동물성 단백질은 통풍 환자에게 매우 해롭다. 유명한 넬슨 제독이 채식요법으로 통풍을 고친 이야기는 유명하다.
5. 요산은 푸린계 염류의 최종 산물이다. 그러므로 푸린이 적은 음식물로 구성된 식이 요법으로 통풍을 치료하는 방법이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왔다.
푸린 함량이 많은 음식물: 동물의 간, 신장, 뇌, 심장, 조개, 멸치, 정어리, 그레이비, 물고기알, 청어
푸린 함량이 보통인 음식물: 위에 언급한 생선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생선류, 해산물, 육류, 조류, 이스트, 렌틸콩, 통밀로 만든 씨리얼, 콩, 완두콩, 아스파라가스, 컬리플라워, 버섯, 시금치, 오트밀
푸린 함량이 적은 음식물: 채소, 과일, 우유, 치즈, 계란
6. 통풍 치료에는 숯가루가 효과적이다. 환부에 숯가루 찜질을 하면 효과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숯가루를 복용해도 인체내의 요산의 양을 줄일 수 있다. 하루에 12~16 알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7. 매 3시간마다 15분 동안 뜨거운 물로 찜질하면 통증을 가라앉힐 수 있다. 어떤 환자들의 경우에는 냉찜질로 효과를 보기도 하므로, 환자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8. 통증이 심할 때에는 환부를 가능한 오래 동안 들어 올려보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환부 위에 침대시트의 무게도 올려 놓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
9. 어떤 종류의 알콜 음료도 삼가해야 한다. 알콜은 체내 요산의 양을 증가시킨다. 어떤 그룹의 환자들에게 푸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시켰더니, 요산의 양이 1.3~3.3 mg/dl로 증가되었는데, 동일한 음식물과 함께 술을 섭취시켰더니 요산의 양이 2~6.1 mg/dl로 배가되었다.
10. 흔히 colchicine 이 통풍의 치료제로 사용되는데, 이 약은 구역질, 구토, 설사, 탈모증, 경련, 빈혈, 백혈구 감소, 간질환과 같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가능하면 어떤 약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화학 약품을 사용할 경우, 문제의 범위는 더욱 확대된다.
11. 과도한 이스트의 사용을 삼가하라. 빵에 사용되거나 조미료로 사용되는 이스트는 혈중 요산의 양을 증가시킨다.
12. 피부에 진흙을 바르는 요법을 써서 많은 양의 요산을 제거할 수 있다. 때때로 땀에 포함된 요산의 양은 혈액 내의 요산의 양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이것은 피부를 통하여 요산이 배출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13. 날마다 파라핀(양초)로 목욕을 하는 것은 좋은 효과를 가져다 준다. 환부의 관절을 완전히 가릴 정도 크기의 냄비에 파라핀을 녹인 다음에 그 곳에 환부를 담그는 요법이다.
먼저 냄비에 파라핀을 2/3정도 채우는데, 이 때 파라핀 5파운드 당 1파인트 정도의 광물성 기름을 섞는다. 파라핀을 화씨 125~135도 가열하여 녹인 다음, 환부인 관절을 파라핀에 담그었다가 재빨리 빼낸다. 매번 담글 때마다 파라핀을 식혀서 굳게 함으로써, 환부에 두꺼운 파라핀 층을 형성시킨 후에, 파라핀 냄비에 환부를 담그고 30분 동안 찜질한다. 환부에 있던 파라핀 층이 녹아서 다시 냄비로 돌아가면, 동일한 방법으로 파라핀 찜질을 되풀이 할 수 있다.
14. 버찌(cherry)를 사용해서 통풍을 치료한 연구 사례가 있다. 12명의 통풍 환자들에게 1/2 파운드의 버찌를 매일 섭취시켰더니, 혈액 내의 요산양이 감소되었으며, 통증도 재발되지 않았다. 버찌 즙을 사용해도 좋다.
15. 어떤 특정 식품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통풍과 유사한 증세를 나타낼 수도 있다. 우유를 많이 마심으로써 통풍성 알러지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우유를 제거함으로써 모든 증세를 제거할 수 있다. 토마도와 오이를 많이 먹은 어떤 여성도 통풍의 증세를 나타내었다.
16. 과식도 통풍을 유발시킬 수 있다. 전쟁 중과 같이 식량이 부족한 때에는 항상 통풍의 발병률이 매우 많이 저하된다.
17. 관절에 직접적인 상처가 생길 경우, 심한 통풍이 생길 우려가 있다. 관절부위에 깊은 외상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18. 캄푸리 뿌리나 잎을 갈아서 환부에 찜질을 하면 통증을 덜 수 있다. 면으로 된 천 위에 갈은 캄푸리를 펴서 환부에 붙인 다음, 밤새 또는 2시간 이상 있으면 된다.
알렌 골드해머 의사
우리의 몸은 일정한 식사와 환경과 운동과 정신적 상태를 요구한다. 이러한 몸의 요구가 충족되면 건강은 유지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거절되거나 무시되면, 몸은 건강을 잃고 파괴되어 가는데, 바로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쇠약해지고 질병에 걸리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몸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 중의 하나가 금식이다. 금식은 모든 부절제와 부적당한 음식물 그리고 잘못된 기호 식품들을 중단시키고, 입으로부터 들어오는 음식물로 인한 인체의 부담을 제거한 상태에서, 인체 기관이 휴식을 취하는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원래의 정상적인 활동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인체의 이러한 기능을 자기 치료 기능(self-healing mechanism) 이라고 한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만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 업무, 걱정, 염려와 같은 스트레스 뿐만 아니라 모든 소음과 공해를 제거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치료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쥬스만을 마시면서 금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금식과 물만 마시면서 하는 완전 금식은 심리적인 면과 생리적인 면에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과일 금식이나 쥬스 금식은 완전 금식(물만 마시는 금식)과는 서로 다른 치료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
금식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주고 싶은 충고는 이것이다. “만일 그대가 금식하기를 원한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금식하라. 그렇지 않으면 금식을 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못하다!”
치료를 위하여 금식을 고려할 수 있는 경우
급성 질병과 금식: 대개의 급성 질병(acute disease)은 식욕이 저하되는 증세를 동반하는 데, 바로 이것이 인체가 금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신호이다. 질병으로 인체가 고통을 당할 때, 온 몸의 면역시스템은 스스로 치료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몸이 이러한 상황에 있을 경우에는 식욕이 회복될 때까지 음식물의 섭취를 중단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있다. 한 끼나 두 끼의 식사를 건너 뛸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여러 끼니의 식사를 건너 뛰어야 할 경우도 있다.
금식은 급성 질병의 증세 즉, 식욕 저하, 고열, 통증, 염증과 같은 증세의 원인을 치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이러한 급성 질병에 있어서는 단기간의 금식으로 매우 놀랄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만성 질병과 금식: 금식은 만성 질병에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금식은 만성적인 상태에 있는 질병에 대하여 몸이 급격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금식 기간 동안, 인체는 각 세포 조직을 청결하게 하며, 불필요한 축적물과 쓰레기들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또한 금식을 통하여 몸은 그 동안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과도하게 일한 조직을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오늘날 현대 의학은 치료하는 수단으로서의 금식에 관한 수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비만, 당뇨, 간질, 혈관성 질병, 심장 질환, 암, 류마치스성 관절염, 정신질환, 그리고 각종 과민 증세와 알러지와 같은 질병들을 치료하는 수단으로서 금식이 권장되고 있다.
금식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다. 금식 기간 동안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정결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며, 불필요하게 쌓인 노폐물을 제거하고,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 보는 귀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돌이킬 수 없는 병으로 인하여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에게 자신의 생애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금식은 사용될 수 있다.
금식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
금식을 해서는 안될 사람들도 있다. 금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금식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에게 금식을 강요할 경우,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칠 수 있다. 근육계 질병으로 인하여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된 사람들에게 무리한 금식은 금물이다. 금식 기간 중에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영양부족증의 환자에게도 금식은 부적합하다. 어떤 특정한 종류의 암 환자에게도 금식은 부적합하다.
금식 기간을 결정하는 방법
금식을 하기 전에 먼저 환자가 금식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종합적으로 건강을 진단하고, 본인이나 가족들이 과거에 어떤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체크해야 한다. 소변 검사나 혈액 검사 또한 필요하다.
검사와 검진이 끝나면, “얼마나 오랫동안 금식을 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금식을 하는 기간은 금식을 하는 기간 중에 나타나는 증세에 따라서 결정된다. 환자에게 필요한 금식 기간이 몇일이라고 예측될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몇일 동안 금식해야만 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먼저, 환자 자신이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인체에서 나타나는 반응을 보면서 금식 기간을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가능하면 짧은 기간 동안 금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인체 스스로 치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간 동안 금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거에는 혀가 깨끗해지고, 배고픔(시장끼)가 돌아오는 것을 금식을 끝내야 할 싸인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싸인들이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이 더 많은 경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몸이 금식을 견딜 수 있는 한계를 훨씬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혀가 깨끗해 지지 않으며,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
금식의 진행 과정에 대한 이해
금식을 생리학적 측면에서 연구한 결과, 3가지 단계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첫번째 단계는 위장인데, 이것은 금식에 들어가기 직전의 식사를 끝마친 후부터 6시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 시간 동안, 인체는 글루코스와 아미노 에씨드를 사용하며 흡수된 지방은 장으로 이동된다.
두번째 단계는, 금식을 시작한지 2일째가 되는 국면인데, 이 시간 동안에 인체는 근육과 간세포에 저장된 글리코겐(당)을 사용한다. 이 저장된 글리코겐은 뇌를 포함한 중앙신경시스템의 에너지원인 글루코스를 공급하기 위하여 활성화되며, 몇 시간 내에 인체는 지방 조직을 지방산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한다.
인체가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연료(글루코스)를 만들어내는 기능이 없고, 글루코스로부터 지방 대사작용으로 전환되는 기능이 없다면, 금식의 중요한 치료 단계인 세번째 단계는 일어날 수 없다. 이 세번째 단계 동안, 인체에 저장된 단백질은 매우 빠른 속도로 소모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나쁜 현상이 아니다. 실제로, 금식을 시작한지 10시간이 되면 근육에서 사용하는 연료의 50%는 지방으로부터 공급된다. 두뇌에서도 지방의 대사 작용이 시작되어 에너지를 충당하게 된다.
인체가 저장하고 있는 지방, 단백질, 글리코겐의 양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마다 질병마다 금식해야 하는 기간이 다른데, 인체 내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금식할 경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금식을 끝마쳐야 할 시점
금식의 3가지 단계를 이해하고 나면, 금식 기간은 각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금식은 환자의 질병과 증세, 금식 중에 나타나는 반응, 검사 결과, 그리고 정신적 상태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금식 기간 동안에 나타나는 호전 반응(healing crisis)이다. 치료를 가져오는 호전 반응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기간 동안에는 금식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금식은 항상 환자의 상태가 평안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끝내는 것이 이상적이다. 금식이 끝난 후에는 소량의 과일이나 야채 또는 즙으로 보식을 시작해야만 한다.
금식 후의 조치
가장 중요한 것은 금식을 끝마치면서 시작하는 식사이다. 환자가 너무 빠른 속도로 정상적인 식사나 활동으로 돌아올 경우,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금식을 끝내는 과정에서는 환자가 올바른 식사 습관과 생활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장 깨끗하고 천연적인 식생활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아무리 금식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할지라도 금식 후의 생활이 올바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금식 자체는 치료가 아니며, 몸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금식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금식은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계에서 건강의 회복과 질병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가장 오래된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에는 금식에 대한 유익을 지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금식을 한 것이 아니라, 생리적 본능에 의해서 금식을 함으로써 유익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금식에 대한 의학적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금식은 금식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올바른 식생활과 연결될 때에는 최종적인 치료와 회복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금식은 그것이 의사와 전문가의 지도 하에서 올바로 이루어질 경우, 인체 스스로에서 치료하는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금식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금식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려보도록 하자. “금식이란 순수한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물의 공급을 중단한 상태에서 신체가 전체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금식은 신체의 전체적인 휴식을 통하여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금식에는 인체의 완전한 휴식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는 하지만, 물만 마시는 완전 금식 이외에 소량의 과일이나 쥬스만을 마시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인체의 건강은 건강한 생활 습관으로부터 형성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금식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할지라도, 건강한 생활 습관이 계속적으로 뒷받침해 주지 않는 한 별다른 의미가 없다. 특히, 올바른 식생활, 쾌적한 환경, 규칙적인 운동, 그리고 마음의 평화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다음에 나열하는 내용은 금식이 주는 여러가지 유익 중에 몇가지를 간추린 것이다.
적극적인 건강 개혁을 위한 금식
지난 7년 동안, 나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찾아오는 수많은 환자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건강의 회복을 위하여 일정 기간 동안의 금식을 하도록 조언하였다. 왜냐하면 건강의 증진을 위하여 먹고, 자고, 입고, 마시고, 운동하는 모든 생활 습관을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금식은 환자들로 하여금 생활의 개혁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생활 습관의 개혁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금식에 참가하였다. 금식을 통하여 환자들은 굉장히 신속한 속도로 자신의 식생활을 개혁할 수 있었다. 건강 연수원과 같은 기관에서 의사의 지도 하에 금식을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식생활 교육을 받고, 여러가지 실제적인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환자들은 자신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체가 회복되어 가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금식 이후에 환자들은 인공적인 화학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차려진 가장 단순한 건강식을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가장 초라하게 차려진 한 끼의 식사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된다.
빠른 회복을 가져오는 금식
금식을 거치지 않고 식생활의 전면적인 개혁을 시도할 경우, 종종 심리적으로 좌절감에 부딪치게 된다. 건강한 식생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환자는 오히려 자신의 건강이 오히려 악화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건강한 생활 습관을 도입하는 초기 단계에서 인체는 체내의 독소와 불필요한 부산물들을 제거해 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피로, 현기증, 구토, 설사, 복통, 위장이 더부룩함, 관절의 통증, 두통, 피부의 예민함, 초조함, 우울증과 같은 여러가지 증세들이 나타나곤 한다.
일정 기간의 금식을 거치지 않고 건강한 식생활을 도입할 경우, 초기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외부적 증세 때문에, 건강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전문가에 의해서 잘 관리되는 금식과 그것에 이어지는 건강 생활을 통하여 인체가 회복의 국면으로 보다 빠르게 들어감으로써, 환자들은 자신감을 얻고 새로운 건강 식생활을 추진하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새로운 생활 습관의 도입으로 인하여 한번 사람이 자신의 건강이 증진되는 것같은 느낌을 얻으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새로운 생활 습관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중독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금식
술, 코케인, 담배, 카페인과 같은 습관성 마약으로 중독되어 있는 사람의 경우, 금식은 이러한 것들을 중단할 경우에 생기는 여러가지 증세(withdrawal symptoms)들을 약화시켜 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금식과 함께 금주와 금연을 실시함으로써 매우 좋은 결과들을 얻고 있다.
자궁 종양의 치료를 위한 금식
자궁의 수술이 요구되는 긴급한 상황에도 금식은 특별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궁의 종양으로 인하여 통증과 과도한 하혈, 그리고 자궁 제거 수술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적당한 금식은 종종 극적으로 치료 효과를 발휘해서 종양의 크기와 상태를 크게 완화시켜 준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수많은 여자 환자들에게 금식요법을 적용시킨 결과 자궁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지 않은 채 종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이외에 자궁과 난소와 관련된 질병에도 금식은 매우 효과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등과 목의 문제를 위한 금식
등과 목의 관절과 디스크에 생긴 문제에도 금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러한 환자들이 내가 일하는 건강 연수원에 찾아왔을 경우, 나는 금식과 휴식, 그리고 운동과 자세 교정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카이로프랙틱(척추신경 전문의술)과 마사지를 겸하여 치료할 경우, 괄목할만한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수술을 받았던 심한 환자들도 금식을 통하여 극적인 치료의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한 젊은 청년이 내게 찾아 왔는데, 그 청년은 4년 전에 당한 심한 자동차 사고 이후로 계속적인 목부위의 통증과 심각한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가끔씩 갑가지 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목부위에 생긴 문제로 인하여 뇌로 흘러들어가는 피의 흐름을 조절하는 신경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금식과 4주간의 카이로프랙틱 치료 끝에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건강 연수원에서 퇴원한 이후로, 모든 통증은 사라졌고, 더 이상 갑자기 기절하지도 않게 되었다.
심장 혈관 질환을 위한 금식
154명의 고혈압 환자들에게 적당한 금식을 시킨 결과, 151명 (98%)의 환자들이 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 혈압을 되찾았다. 협심증도 금식을 할 경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질병인데, 몇 일 또는 몇 주 동안 약을 사용하지 않고도 통증이 없이 지낼 수 있다. 적당한 금식과 건강한 식생활을 통하여 콜레스테롤 수치를 100 이상 저하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장 질환을 위한 금식
식도염, 위염, 대장염, 변비 및 칸디다증으로 불리우는 증세들에 금식은 효과적이다. 최근에 어떤 젊은 여인이 건강 연수원에 찾아 왔는데, 그 여인은 매우 심한 대장염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으며, 직장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피가 나오고 있었다. 그 여인은 말하기를 “지난 8년 동안 온갖 좋다는 약은 다 사용해 보았지만, 대변을 볼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습니다” 라고 고통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건강 연수원에 찾아왔던 것이다.
먼저, 그 여인이 먹던 모든 약을 중단시키고, 일정 기간 동안의 금식을 실시하였다. 1주일이 채되기도 전에 통증은 사라졌으며, 10일 후에는 직장을 통하여 나오던 피와 분비물이 중단되었다. 그 여인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보식이 실시되었고, 그 여인은 더 이상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당뇨병을 위한 금식
대부분의 만성 퇴행성 질병들은 금식과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통하여 치료될 수 있는데, 당뇨병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 의학은 당뇨병을 불치의 병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건강 연수원에서 이루어지는 천연적인 자연 치료법을 통해서는 매우 쉽게 회복될 수 있다. 대부분의 성인 당뇨병은 인슐린 주사나 약의 사용없이, 금식과 식생활 개선, 그리고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통하여 완치될 수 있다. 현대 의학이 멈춘 곳에서 천연치료법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있다.
만성적인 변비를 위한 금식
20년 동안 만성적 변비로 고생해온 여인이 건강 연수원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여인은 자신은 지난 20년 동안 이완제나 숙변제거제 또는 장청소를 하지 않는 한, 단 한번도 자연스럽게 대변을 배설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여인에게 일정 기간 동안의 금식을 추천하였다. 그 여인은 금식 기간 동안에 속이 약간 불편함을 느꼈으며, 등의 아래 쪽(low back)에 약간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 여인은 20년만에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배설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대장의 운동은 정상으로 회복되었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살 수 있었다.
완전한 휴식을 위한 금식
금식은 인체 기관의 휴식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깊은 휴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 바쁘고 무질서하게 돌아가는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올바른 라이프 스타일로의 전환 과정으로서, 금식은 매우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준다. 금식을 통하여 육체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 속에 깊고 완전한 쉼이 가능해질 수 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스트레스와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쉬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회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보다 예민한 양심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금식을 하는 동안에 모든 일들을 떠나서 자신과 생애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되돌아 보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 여정에 대하여 숙고해 봄으로써, 앞 날에 대한 올바른 계획과 목적을 세울 수 있다. 금식은 스스로의 힘으로 멈출 수 없는 악한 습관의 사이클을 가장 강력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예외적인 경우
모든 사람에게 금식을 적용할 수는 없다. 금식이 추천되기 전에 몇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먼저, 환자의 병력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며, 신체 검사와 검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다음에는 금식에 관한 경험적 결과들을 놓고서 각 환자들에게 알맞는 금식 프로그램(금식, 운동, 식사, 등등)을 세워야 한다. 금식은 반드시 전문가나 의사의 지도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금식은 어디서 해야 하는가?
금식은 반드시 천연 치료 전문 기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금식을 하는 기간 동안에 의사와 계속적인 상담을 할 수 있는 것이 건강 연수원의 장점이다. 금식을 통하여 내장 기관을 비우고 청소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 또한 매우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조용한 분위기가 가져다 주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금식은 반드시 모든 외부적 스트레스가 없는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가정에서, 또는 금식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 금식을 할 경우, 금식을 통하여 유익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건강에 치명적인 손해를 끼치는 경우들이 종종 벌어진다.
금식을 언제 끝내며, 어떻게 끝내는가에 대한 문제는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금식을 끝내는 시점을 결정하며, 금식에서 정상적인 식사로 돌아오는 과정인 보식도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
금식에 관한 오해
금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금식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며, 금식을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금식을 하는 기간 동안에 느끼는 여러가지 증세들 때문에 금식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올바른 금식법에 대하여 연구해야 한다. 환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금식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서는 금식을 지도하는 사람이 먼저 금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금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확신을 낳으며, 확신은 믿음을 가져오고, 믿음은 금식을 실행에 옮기는 행동을 낳는다.
5.어떤 것이 진짜 그리스도인 생애인지 아세요?
승리,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승리야말로 그리스도인 삶의 모두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죄와 모든 연약함, 그리고 모든 실패에 대하여 승리하는 신앙은 실제적인 삶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실제적인 승리의 생애를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어떤 설문 조사에 의하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실제적인 승리의 삶이 현대 기독교인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나 역시 오랜 기간 동안 실패와 좌절의 쓰라림 속에서 방황하였다. 나의 실패와 좌절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반복된 것이었다. 죄와의 투쟁에 있어서 실패해온 나의 경험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18살에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침례 받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연약한 점들이 침례를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도덕적 연약함은 계속되었으며, 의심과 불신의 삶을 살았으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죄악적 경향과 삶 속에서 배양해온 악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나의 죄는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범하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만이 죄로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학창 시절 동안의 나의 신앙 생활은 마치 시소 게임과 같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봄과 가을 학기가 시작될 때에 갖는 기도 주일 동안에는 조금 거룩한 생애를 살다가 그것이 마치면 얼마 후에 다시 의심과 실패로 점철된 옛 생애로 되돌아 가곤 하였다.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자, 나는 의무병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영국에서 2년 동안 군복무를 한 후에 다시 대학으로 복학하였다. 나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을 선택하였다. 신학과 학창 시절 동안, 나는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대학과 가까운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으며, 공중 전도회를 개최하여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가르쳤고, 사람들에게 문서를 통하여 전도하기도 하였다.
영적 결핍
매우 활발한 신앙 활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영적 생활에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음을 느꼈다. 외적으로 볼 때, 나는 매우 유망한 목사 지망생이었지만, 내적으로는 시기, 질투, 자존심, 그리고 비그리스도인적인 야망이 불타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신학과 졸업반이 되어도 내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신학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나는 제법 큰 교회에서 부목사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양떼들에게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가르쳤다. 교인들은 나의 논리정연한 설교를 좋아했으며 풍부한 성경 지식에 대하여 칭찬하였지만, 나는 그들의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구세주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서 나는 한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 생활은 모든 남편과 아내의 성품과 사상의 진정한 모습을 폭로시킨다. 더구나 자녀들이 생기면, 그들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모든 면들이 나타나게 된다.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아내와 의논할 때, 우리는 여러번 바람직하지 못한 논쟁을 했다. 나는 주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와 승리를 간구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또 다시 아내와 논쟁을 하는 습관을 되풀이 하였다. 목사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행복과 승리가 없는 비참한 생애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전환점
인도에서 10년 동안의 힘겨운 선교사 생활을 마친 후에 귀국하였을 때, 나와 아내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가 인사차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차례로 방문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이 깊은 진리와 영적인 신앙 속에서 승리의 생애를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십여년 간의 목회 생활과 타국에서의 외로운 선교사 생활을 통해서도 발견하지 못한 신앙의 비결을 평범한 평신도인 여동생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발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였고, 자신이 발견한 깨달음을 나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한 동안 나는 목사인 내게 가르치려고 하는 아내의 태도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반응이 자존심과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정신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점차적으로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도 수많은 영혼들이 “어떻게 해야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슴에 담은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참된 신앙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
협력이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상호간의 동의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은 성취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억지로 구원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죄인이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죄를 회개하고 죄악적인 생애로부터 돌아서기로 결심할 때야 비로서 하나님의 구원은 선물로 죄인에게 주어진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원칙들이 담겨져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성경에 담겨져 있는 원칙들을 신실하게 따라갈 때, 그리스도인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구원과 협력
구원은 죄인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원칙들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협력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협력의 역사는 우연히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타고난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거절하고,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며,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저항하는 한, 구원을 위한 하나님과의 협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늘 도성을 향하여 신실하게 걸어가는 참된 성도들 속에 끼어서 살짝 하늘 도성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적으로 눈먼 자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전혀 없다.
이와 반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과 마귀에 대하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도 확고한 결단과 투쟁없이 이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이 전쟁에서 모든 사람은 악의 세력과 개인적으로 투쟁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의 앞에는 반드시 얻어야 할 위대한 승리가 있고, 또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함으로써 잃어버릴 수 있는 하늘이 있다.
나는 이 글이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잘못 오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내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한 한 한 개인의 경험에서 떠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구원의 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죄와 암
하루는 백혈병으로 고생하는 어떤 환자가 병원 내를 거닐다가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서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을 들어갔다. 그 방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계시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 병동의 환자들은 모두 불치의 암환자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환자들에게 솔직하고도 정직한 병세를 알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글을 읽은 그 환자는 무서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국에는 암으로 죽었다.
우리 모두는 “죄”라는 이름을 가진 치명적인 암에 걸려서 고통당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범죄한 영혼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아무리 우리가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해도,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의사가 암 덩어리를 몸 속에 가진 환자에게 부드럽고 동정적으로 그의 병명을 말해 준다고 할지라도, 환자는 그 소식으로 인하여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영적 암환자인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치료제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위대한 의사이신 구세주께 신실하게 맡기기만 하면 100%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암환자가 치유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병으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위대한 의사만이 줄 수 있는 도움을 받기 위하여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엄숙함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드리고 싶은 말씀
승리의 과정에는 언제나 투쟁이 있다. 승리라는 단어는 투쟁과 분리시킬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나는 최종적인 승리로 이끌어가는 투쟁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투쟁과 전쟁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결코 무시되어서도 안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눅 14:31).
이제부터 첫번째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책임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아마도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승리의 생애가 시작되기 전에 선제되어야 할 조건들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고, 세번째로는 우리와 함께 전쟁을 치룰 동맹군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우리를 돕는 동맹군을 정말로 잘 안다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네번째로,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과 수단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커다란 요구 사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지만, 영광스러운 승리에 대한 보다 큰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회개에서 헌신으로!
회개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고 말씀하셨다. 갈바리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인식하게 된다. 하늘의 영광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양심에 번민을 준다. 이 때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저항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끌리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호소는 때때로 사람들이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일어난다. 때때로 죄인들이 자신의 죄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들의 나쁜 습관을 버리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죄인들에게 옳은 일을 하고 싶은 진실한 욕망을 일으켜 주고, 생활을 변화시켜 주는 것은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께서는 죄인의 양심을 일깨워서 각성시켜주심으로써, 참된 회개의 길로 인도하신다.
헌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고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새로운 소원과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먼저 그분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완전히 바치기 전에는 그분께서 그 일을 하실 수가 없다.
사단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유 없는 맹종을 요구하신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이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는 길을 택하여 그분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그분에 대한 사랑이 모든 행동을 지도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면 우리가 가장 적게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것을 드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특성이다. 사랑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피조물 모두에게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반응을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모든 피조물들의 심금을 울린 다음에 다시 그분께로 되돌아 오기를 열망하신다. 그러나 슬프게도 하나님께서는 6천년간의 지구 역사 동안, 마땅히 받으셔야 할 만큼의 인간의 반응을 받지 못하셨다.
그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당신의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셨다. 그러나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에 올바로 반응하여 자신들의 애정을 그분께 표현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 관심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완전히 뛰어 들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요구 사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쉽고 단순한 요구 조건을 만드셨다. 그러나 요구 조건은 반드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분명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죄와 반역의 정신을 버리기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에서 죄를 제거해 내기 위하여 치룰 수 있는 모든 희생을 치루셨다. 하늘은 죄로 인하여 시작된 인류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보았다. 그러므로 하늘은 죄로 인하여 또 다시 온 우주가 오염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대들과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무엇보다도 너희들이 하늘 왕국에 들어오게 되기를 원한단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당해야 할 죄의 댓가를 대신 치루도록 하였던 것이란다. 나는 하늘 왕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을 만들었다. 이 요구 조건은 반드시 만족되어야만 한단다. 부디 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켜다오! 나는 너희들이 나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되기를 소원한단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셔야만 하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분명한 조건
사랑스러운 태도로 하신 말씀이지만, 구원에 대한 분명한 조건이 담겨져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오직 한가지 조건 곧 “새로 태어남(new birth)”이라는 조건 이외에는 영생을 받고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하나님의 요구 조건은 분명하지만, 한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새로 태어남’이란 어떤 경험을 의미합니까?”이다. 도데체 그것이 어떤 경험이길래 그것이 없이는 하늘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성경은 새로 태어남의 경험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급격한 생애의 변화를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6.
성경은 “새로 태어남”을 경험한 사람을 가리켜서 “새로운 피조물” 곧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새 생명 가운데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된다(롬 6:5, NEB역).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오래 된 나무에 새 가지를 접붙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전혀 새로운 나무가 되는 것을 말한다.
교정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것임
거듭남이란, 술을 끊고 담배 피우기를 삼가하는 것과 같은 삶의 교정이 아니다. 거듭남이란, 분노와 식욕과 쾌락의 습관을 조절하기 위하여 좀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이란, 값비싼 보석 목거리와 팔찌를 하지 않거나, 일주일 중에서 교회가는 날만 조금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뜯어 고쳐 나가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이란, 성경에서 새롭게 깨달은 진리에 맞추어서 오래 동안 사귀어 오던 세상 친구와의 교제가 끊어지고,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이 거룩하게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생 전체의 방향과 목적과 동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의 우선 순위가 바뀌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제일 좋아하고, 그 다음으로 스포츠, 유행을 따라가는 옷, 식도락, 성경 읽기와 같은 순서로 좋아하던 우선 순위가 성경 읽기를 제일 좋아하고, 그 다음으로 돈, 식도락, 스포츠, 유행을 따라가는 옷과 같은 순서로 바뀌는 것이 거듭남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란, 단순히 옛 것을 뜯어 고치거나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과거에 싫어하던 것이 좋아지는 것이 거듭남이다.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정하게 되며, 사랑하던 쾌락이 싫어지고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본성이 변화되는 거듭남이다. 거듭남이란, 자신과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며, 새로운 생애를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새로 태어난 삶은 성령께서 우리들의 삶에 효과적으로 역사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으로 속하게 된다. 어떤 사람도 거듭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이기적이고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을 갖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기만적인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러한 신앙 속에는 자신을 부인하고, 진리에 순종하기 위해서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을 희생시키는 고결한 정신을 찾아 볼 수 없다.
사람이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을 경험할 때, 그의 생애에는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죽는 변화가 일어난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어떤 사람도 거듭남의 경험에 대해서 애매모호해 하거나 혼돈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경험이 극적인 모습으로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게 일어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생애 속에서 너무나 분명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 중요한 경험을 지금 이 순간까지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부터 온 마음을 다하여 그 경험을 주님께 간구하라. 이 경험을 얻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과 지성에 접근하고 계신다.
우리 자신이 참된 거듭남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기준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5장에 있는 팔복의 경험은 오직 거듭난 경험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축복이다. 갈라디아 5장에는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경험과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이 대조적으로 비교되어 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상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은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거듭난 사람의 상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4
바로 이러한 것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생애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인데, 이 열매는 사도 바울이 말한 다음과 같은 경험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맺혀진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24.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사람들, 그들만이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축복을 받을 것이며,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영생에 들어갈 사람들이다.
참된 거듭남의 9가지 증거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 즉, 새로 태어남을 경험한 증거는 무엇인가? 성경은 거듭남의 증거를 다음과 같이 9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소유한다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진실로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원치 않는 죄에 반복해서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하여 양심은 심한 가책으로 고통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 영혼의 평화를 소유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의심과 불확실함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통하여 이런 모든 것들은 변화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나님의 용서)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죄인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죄인의 마음에는 투쟁이 사라지고 고요함이 깃들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심으로써 모든 격정과 불안과 투쟁은 종결되며, 죄는 마음으로부터 추방되고, 이기적인 자아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과 그의 동료 인간들 사이에 화평을 유지하는 사람은 비참해질 수가 없다. 시기하는 정신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지 못할 것이며, 악한 추측을 하는 정신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미워하는 마음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음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여한 사람이며, 온유와 겸손으로 감싸져 있는 아름다운 향기가 늘 주변의 사람들에게 축복의 강처럼 흘러 나가게 될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4.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감정적인 느낌이 아니며, 심지어는 가족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맹목적 애착심도 아니다. 사랑은 존경심이 담겨져 있는 태도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합리적인 관심이고, 다른 사람의 필요와 행복을 위한 사려 깊은 결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친한 친구 뿐만 아니라, 지성적이지 못한 사람이나 고집센 사람이나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이나 변덕이 심한 사람이나, 심지어는 원수에게까지도 한결같이 유지되어야 한다. 사랑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신속하게 도와주는 원칙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사랑은 이러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 결핍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은사와 선행은 무의미하다(고전 13장). 사랑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이러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이러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을 좀도 깊고 세련되게 다듬음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하늘로부터 받는 거룩한 선물이다. 이 사랑은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랑이다. 순결한 사랑은 하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부모로부터 받는 마음에는 이러한 사랑이 없다. 하늘에서 받은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마음에서만 자랄 수 있다.
3. 마음과 정신을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돌린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저절로 마음이 세속적으로 기울어진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대개 세상에 모아진다. 그들이 비록 주님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진짜 흥미는 직업과 돈과 쾌락과 직위와 유행 위주로 흘러 간다. 그들은 스포츠와 유행과 여행과 자동차에 대해서는 열심히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는 흥미있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랑에 대하여 대화할 때, 당황하거나 어색해 하면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친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17:14). 참된 거듭남은 감정과 동기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참된 거듭남은 세속적인 교제와 관심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교정시키며, 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4. 승리의 생애를 산다
자신의 힘으로 죄를 극복하고 승리의 생애를 살려고 하는 사람은 전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self)는 자아(self)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임재가 거하지 않는 사람은 승리할 수 없다.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다. 오직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일치하는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죄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말의 의미가,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애 속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아를 부인하는 일(self-denial)은 매일 매순간마다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이 새롭게 거듭났기 때문에, 소원과 경향과 의지가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므로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5. 자신의 부족에 대하여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서로 그리워하고 대화하기 원하는 강렬한 마음이 있는 것처럼, 기도하기 원하는 소원은 사랑하는 구세주와 교제하기 원하는 간절한 염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심정이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가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시편 42:1,2.
6.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니” 렘 15:16. 과거에는 재미없고 무관심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거듭난 후에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모든 판단과 결정의 근거가 된다.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낸 구원과 영생에 관한 편지라고 여겨진다. 거듭난 사람은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성경에 비추어보고 시험한다. 거듭난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존중한다.
7. 죄에 대한 민감도가 증가된다
“(하나님께서) 허물(disobedience, 불순종)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엡 2:5. 하나님께서는 불순종과 죗된 생애를 통하여 영적으로 죽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감정, 그리고 새로운 동기가 심어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추구하는 새로운 목적이 마음 속에 새겨진다. 마음은 변화되고 양심은 일깨워진다. 마음이 성령의 변화시키는 영향력에 굴복되면, 양심은 매우 민감하게 죄와 불순한 것들을 감지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둔한 양심을 일깨우셔서 새로운 양심을 갖게 되면, “도데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입니까?”라는 말은 사라지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칠흙같이 캄캄한 방에 조그만 구멍을 통하여 한줄기의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이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부족과 잘못들을 이제는 매우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8. 하나님의 말씀에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라는 간증은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시 40:8).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롬 8:7).
새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하여, 마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게 되며 그 분의 법과 일치하게 된다. 죄인의 마음 속에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죄인의 삶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 속에서 거룩함으로, 반역과 불순종에서 충성과 순종으로 옮겨지게 된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옛 생애는 사라지게 되고, 믿음과 사랑으로 꼴지워진 새로운 생애가 시작된다.
죄인이 그의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를 포기할 때, 그는 율법과 일치하게 되며, 완전한 순종의 생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강한 열심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에도 충성을 표시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왜냐하면 순종의 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자아 부정과 희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9.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강한 소원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성령에 대한 약속이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8).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고 새롭게 거듭난 다윗은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라”고 서언하였다(시 51:13).
만일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은 우리에게 참된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고귀한 진리와 행복과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죄로부터 구원받고, 마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게 될 때,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거룩한 페이지를 열어준 진리를 이웃과 친구들에게 말해 주고자 하는 욕망이 마음 속에서 스프링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기심없는 열심으로 인하여, 그는 죄인들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편지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음을 보는 사람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거듭남을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 되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먼저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거듭남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한낱 인위적 노력에 불과하다. 거듭남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는 자들만이 죄와 자신을 정복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power)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니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자녀는 부모가 지니고 있는 어떤 특성들을 갖게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의 마음과 생애 속에 담고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거듭남, 칭의, 성화는 모두 성령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과 8장의 몇 구절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구속하기 때문에 경험되는 처절한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4-20. 율법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가하였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로마서 7:22-23
세 가지 법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법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법은 하나님의 법, 즉 십계명(7절)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 법이 공정하고 선하지만 자신이 그 법의 요구를 행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두 번째 법은 “죄의 법”으로서 육신에 거하는 죄의 힘을 가리킨다. “죄의 법”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며, 또한 후천적으로도 습득되어지는 죄로 쏠리는 인간의 성향을 말한다. 이 성향은 인간이 의를 행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인간의 도덕성을 약하게 만들어 도덕적 능력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7장 24절에서,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보면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마서 8장에 승리의 말씀을 적고 있다. 로마서 8장은 우리에게 곤고한 인간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해결점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 번째 법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법은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와 신앙적 고뇌를 완전히 해결시켜 준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2. 세 번째 법은 바로 우리가 성령께 완전히 굴복한다면 그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성령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승리를 얻도록 할 수 있으며, 이로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승리함으로써,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얻게 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성령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을 높이기 위하여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고상한 선물이었다. 성령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영적으로 소생시켜주는 분으로 주시는 바 되었으며 이 분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악의 세력은 여러 세기 동안 강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단의 속박에 복종 당하게 되었다. 죄는 신성의 제 삼위이신 성령의 강력한 작용을 통하여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셨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며 배양된 악의 성향들을 이기며 당신 자신의 품성을 당신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서 성령을 주셨다.
약속된 선물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기 바로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기로 약속하셨다. 3년 동안 예수께서는 말씀과 비유들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3년 동안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의 근원으로서, 상담자로서, 인도자로서, 친구로서 함께 계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야만 할 때가 이르렀고, 그들을 늑대들 속에서 방황하는 양으로서, 뱀들의 공격을 받는 비둘기로서 홀로 남겨두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어느 때 보다도 더 큰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을 아시고, 그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여러 시험들을 내다보시며 그들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을 준비하셔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려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요한복음 14:16,17
성령을 의미하는 “보혜사”의 헬라어 원어는 “Parakletos” 이다. 이 단어는 다른 성경 번역본들에는 “돕는 자” (N.A.S.B.), “상담자” (R.S.V.), “대변자” (N.E.B), “당신 옆에서 변호해주는 다른 이” (Philips)로 번역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다른 번역을 비교해 볼 때 “보혜사”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William Barclay는 “Parakletos”-보혜사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arakletos의 문자적 의미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실제적 의미는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하는 이유와 연결되어 결정되어진다. 헬라 사람들은 이 단어를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Parakletos’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인 단어로서 이 사람은 고소 당한 사람의 대변자나 증인으로서 고소당한 사람을 변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 단어는 어떤 단체나 군대에 초빙을 받아 그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Parakletos’는 주로 문제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Parakletos’의 현대적 의미는 ‘to cope’ 즉, 견딜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문제점들과 불안함을 없애주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이다. 성령은 패배한 영혼에게 승리를 가능케 한다.”
동반자 되시는 성령
바울은 “Parakletos”-보혜사라는 단어와 함께 또 다른 말을 사용함으로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교제”라는 말이다. (빌립보서 2:1, 고린도후서 13:14)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슬픔과 고통 중에서, 그리고 앞길이 캄캄하고 장래가 암담하게 보일 때에 또한 우리가 무기력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에 믿음의 기도 응답으로써 보혜사가 우리에게로 오신다. 환경은 우리를 모든 지상의 친구로부터 분리시킬는지 모르지만, 어떤 환경도 어떤 먼 거리도 우리들을 하늘의 보혜사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그분은 우리를 지지하고 붙드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오른편에 계신다.
제자들에게 성령 은사의 중요성을 설명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한복음 16:8-10)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거듭나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로부터 떠나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면 성령께서 그의 양심에 역사하사 그들이 어떠한 결과를 갖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신다(요한복음 16:11 참고). 또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깨끗하게 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되며, 의롭게 됨을 얻게 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6:11 참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음과 인생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갈라디아서 5:16-25 참고). 또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에 의를 증가시키며, 이로서 우리가 참된 평안과 즐거움을 얻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며, 연약한 자를 도와 능력을 주시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죄를 끊을 수 있도록 하신다(로마서 14:17, 8:26, 요한복음 14:13, 에베소서 3:16, 고린도후서 3:17, 누가복음 24:49 참고).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의 임재를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죄와 자아와 더불어 싸우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다음 글을 계속해서 읽기 전에 먼저 성령과 도움의 역사를 달라고 기도하도록 하자.
마음의 본질
아기가 탄생할 때 그 아기의 생각은 자아 중심적이다. 아기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 비록 그 방법이 단순하지만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요구를 나타낸다.
아기는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기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너무나도 확실하게 그 뜻을 나타낸다. 만약 그의 생각이나 요구가 거절당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낸다. 이러한 현상은 타락한 인간이 유전적으로 나타내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자아 중심적 반응은 10대 아이들에게도 우울증이나 화를 잘 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서 생각은 점점 더 복잡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어른으로 성장함에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환경에 자신을 맞추기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문화적 환경에 맞추게 된다. 그러나 자아는 계속적인 충족을 요구한다. 자아는 충족되어져야 하며, 보호되어지고, 표현되어져야 한다.
아기들의 반응은 자각이 없는 표현들이다. 단지 생각 없이 나타내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자아 중심적 아이들의 행동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죄는 고의적으로 알면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요단강이 사해로 흐르는 것처럼 죄로 이끌게 된다.
산상 설교 때 예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셨다. 산상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은 의로운 생활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점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심으로 인간의 뿌리가 악함을 표현하셨다. (마태복음 7:11 참고)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도 같은 사상을 언급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3: 6-7)고 하셨다. 다른 말로 말해서, 우리는 초자연적인 어떤 힘에 의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울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함으로 로마서 7장에 그가 언급한 죄에 힘없이 넘어지는 인간의 상태를 다시 제시하고 있다. 다윗은 시편 51장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니”라고 하였고, 욥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기 14:4)고 하였다.
우리는 욕망, 감정, 동기, 흥미, 경향, 자세.. 등 인간의 개성과 성품을 형성하는 것들을 마음 안에 갖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우리는 왜 아기들도 죗된 증상을 나타내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중심에 자기 중심적 자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창세기 3:15)
죄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는 모든 마음은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원수 관계는 선천적으로 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으므로 그의 본성은 악해졌다. 그리하여 인류는 사단과 조화되고 그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종이 되었다. 죄인과 죄의 창시자인 사단과는 본질상으로 원수 관계가 될 수가 없다. 둘 다 반역으로 악해졌다. 만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셨을 것 같으면 사단과 인류는 동맹하여 하늘을 대항하였을 것이다. 인류는 사단과 원수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에 연합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경로는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 안에 이미 세워져있는 기관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들이 말 안 듣고 고집 센 죄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양심은 왜곡되어지고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양심에 호소하심으로써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자아중심적인 우리들의 마음에 예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 중심적인 삶을 고집한다면,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없으며, 죄로부터 온전한 승리을 쟁취할 수 없고, 하늘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아신다. 악을 향한 모든 성향과 함께 자아는 반드시 완전히 굴복되어져야 한다.
불행하게도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무엇을 위하여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다윗 왕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 보내어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였다. 이 죄는 다윗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셔서 한 마리의 작은 양의 이야기를 하게 하심으로써, 다윗의 마음을 찌르셨다(사무엘하 12:1-13 참고). 다윗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은 그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의 시, 시편 51편을 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일이 성공하면, 우리의 양심은 일깨워지고 우리가 그 동안 지어온 구체적인 죄들에 대하여 깊은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죄들은 우리를 쉽게 무너뜨리고 힘없게 만드는 육체의 정욕일 수도 있고, 사람들간에 일어나는 부정직한 거래일수도 있으며, 나쁜 성격일수도 있다. 양심은 우리가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헛되이 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책들, 또는 음악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결심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
양심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일과 하나님께 속하고자 하는 소망을 통하여 우리는 죗된 습관들을 없애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할 수 있다. “나는 이 죄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내가 보기 좋아하는 이러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나는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악한 성미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 저러한 나쁜 죄의 습관들을 먼저 고치기 시작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시도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시작부터 틀린 길을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개혁은 습관의 개혁보다도 먼저 마음의 개혁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을 개혁하고자 하면 이러한 개혁은 오래가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기 때문이다.
구멍난 곳을 떼우는 식의 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전체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어느 조그만 부분이라도 악에 대한 성향이 개발되도록 내버려 두거나 반역의 정신이 싹트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매일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나타내는 일이 허다하다.
억지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자 할 때에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고 단지 순종해야만 하늘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애쓴다면, 결코 우리는 순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러한 행위는 순종이 아니라 억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겉으로만 행하는 외식적 복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순종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원함이 순결한 사랑의 결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자아로 인하여 진실된 순종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이기심에 의지한 특정한 습관의 개혁에 불과하다. 자아가 자아를 개혁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불가능한 시도이다.
죄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어질 수 없다. 죄를 정복하는 것은 악한 영들을 정복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어떤 한계를 설정하여 스스로를 억제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의미한 노력이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승리자로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역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이 어떠한 죄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일 이상의 위대한 사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self)를 포기하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아를 정복할 수 있을까? 자아를 정복하는 법은 바로 거듭남에 있다.
오직 자아가 죽을 때에만,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지며,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고, 사랑의 향기가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며,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사실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아에 집착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를 거절하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다름없다. 죄가 발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소멸의 불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정복되어지기 어렵다. 인간의 여러 형태로 부패된 마음은 쉽게 성령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승리가 있기 전까지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승리는 확실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내려지는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부패된 감정들은 극복되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자아는 높아지려는 감정으로 크게 부풀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뚤어진 자아를 갖고 있다. 그들은 바위에 떨어져 부서뜨려짐을 당한 경험이 없다.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이 없으면, 그들은 계속해서 자아에 의존하여 살 것이며, 영원한 의로 돌아서는 경험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 진주 문을 들어설 자들은 모두 정복자로서 들어갈 것인데, 그들이 정복한 가장 큰 원수는 바로 자아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 하셨다고 할지라도 인간 편에서 그 구원의 역사를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속수 무책이 되어 버리시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능력으로 이루어 진다. 그러나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인 믿음의 역할이란 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행하기 전에 인간이 반응하는 마음의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 속에 있는 그 세 가지 기능이 그 제시된 메시지에 반응하여 분석하고 판단하며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세 가지 기능들이란 다름이 아니라 지성과, 감성과, 의지이다. 지성이란 이해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며, 분별하는 기능이다. 또한 감성이란 소원하며, 느끼며, 충동하는 감수성의 기능을 말한다. 그러나 의지는 그러한 마음의 기능들의 소리와 느낌을 듣고 나서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능을 말한다. 이 마음의 기능들 중에서 의지의 기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의지의 선택이 없이는 그 사람의 생활 방향이 결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A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 드렸는데 그의 마음 가운데서 그가 포기해야 할 한가지 문제 때문에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지성은 그에게 그것은 죄니 반드시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그의 감성은 다르게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마음 속의 소원과 감정은 그 습관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느낌과 충동은 그 죄의 재미와 쾌감을 버릴 마음이 없다고 끝까지 사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재미를 버리면 세상살이에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지성은 계속 말하고 있다. 그 잘못된 습관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장애물이라고. 그 죄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서는 결단코 거듭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죄를 버리지 않고는 하늘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진리를 깨달은 지성은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성도 계속적으로 반박하면서, 이러한 재미있는 것을 포기하면 생활의 만족이 없게 될 것이요, 결국에는 재미있고 좋은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을 사는 의미와 해옥이 전혀 없게 될 것이라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자 이렇게 마음 속의 두 기능인 지성과 감성이 전쟁을 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싸움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해결 방법은 한가지 길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지의 기능이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매일 수 백 번씩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도덕적인 결정이던지 일반적인 생활의 결정이든지 간에 말이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과정이 너무 간단하게 지나가 버린다든지 아니면 너무 자동적이어서 잘 인식하지도 못한 채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결정은 너무 중요하여 결국은 우리의 영생을 결정 짓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죄로 인하여 몹시 약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의지를 사용하여야 하는데, 바로 이 의지가 죄로 인하여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후서 2:26에서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혔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깨어 나올까 함이라”(킹제임스 성경번역)라고 말씀하였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은 그들의 의지가 마귀의 뜻에 사로잡힌바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인간은 죄로 기울어 지는 경향에 내어 맡겨질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롬 7:18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여기에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초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의지의 힘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너무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함께 하셔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나 자신을 굴복하여 의심과 마귀의 올무인 죄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라고. 자기 자신의 과거의 실수들과 좌절되어 버린 결심들을 기억하면서 인간들은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것이 구원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선택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에 놀라운 힘을 주시게 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결심하고 행하려 하면 곧 피곤하여지고 의로운 삶을 살기에 지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육중한 고철들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의 끝에는 강력한 지남철이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지남철에 전류가 흐르지 않으면 원하는 고철들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기중기의 끝을 아무리 무거운 쇠들에 갖다 대어도 전혀 끌어 올려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전기의 전류를 보내면 그 지남철이 힘을 발휘하여 그 무거운 고철들을 번쩍 들어 옮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의 힘도 꼭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의 전류를 받아야 우리의 의지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롬8:2절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에서,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하지 않는데 있다. 죄의 습관들과 세력에서 헤어나오기를 온 마음을 다하여 소원하지 아니한다. 어느 정도 원하거나 희망사항일지는 모르나 전적으로 하나님께 메어 달릴 전도로 심각하게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지를 강제로 꺽으시거나 억지로 힘을 주실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여가에 우리가 협력하는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를 바치며 협력하지 아니하면 그 크신 구원의 역사와 능력도 속수 무책이 되는 것이다. 자녀들이 자기의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부모들이 아무리 도와 주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여기에 내 의지가 있습니다. 죄의 힘으로 연약하여지고 삐뚤어진 나의 의지를 주님께 드립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힘은 없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의지를 굴복하오니 주께서 고쳐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의 마음의 기능 가운데 의지의 힘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러나 이 기능이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항상 충전되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바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