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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몸을 한 번 잃으면 만 겁을 지내도 다시 얻기 어려우니라. 젊은 시절이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은 달음질치는 말과 같고, 사람의 목숨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산위에서 내려 붓는 물보다 빠르니라. 오늘은 비록 살아있다 하지만 내일을 다시 보증하기 어려우니라.~~~
금주의 법어--붓다의 마지막 여정 (열반시현일)
금주의 법사--불광법회 선덕 혜담스님
불광법회 불광사 법등가족 형제 여러분 감사합니다. 또한 오늘의 불광법회를 함께 하고 계시는 사부대중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형제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항상 함께 해서 집안이 편안하고 가족 모두 건강하기를 축원해 마지않습니다. 내일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열반시현일입니다만 오늘 법회에서 열반시현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중 처소에 산 지 오래되어서 요즘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본사에서 스님들이 사시공양할 때는 발우를 들고 불은상기게, 부처님 은혜를 상기하는 게송을 읊습니다. 불생가피라 성도마갈타 설법바라나 입멸쿠시나카라를 하는데 부처님 열반하신 날을 명절이라 하기엔 그렇고 4대 기념일에는 광덕대선사께서 불은상기게를 말씀했습니다. 그에 따라서 열반 시현일을 앞두고 불은상기게를 함께 3번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카필라에서 나시고, 마갈타에서 성도하시고, 바라나시에서 설법하시고, 쿠시나카라에서 열반에 드셨나니. (3회)
사시공양 때 불은상기게를 먼저 읊고 공양게를 할 만큼 불은상기게는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게송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석 달 후에 열반에 드시겠다고 말씀하신 곳이 베살리(바이샬리)입니다. 제가 인도를 한 번 가서 가장 감명 깊은 곳이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사셨던 기원정사와 베살리입니다. 데칸고원은 높은 고지여서 거의 나무가 없이 작은 나무만 있고 큰 나무는 띄엄띄엄 있는데 기원정사는 숲이 무성한 곳이었고 베살리는 읍내가 다 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보면 아름다운 곳이라 부처님께서는 '베살리는 참 아름답다'고 아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야말로 인도가 아열대 지역이어서 항상 꽃이 만발하여 베살리 전체에도 꽃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드신다고 말씀하실 때 아난존자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여래는 원하기만 하면 백 겁을 살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으로 아난존자가 어떤 말을 할 수도 있었는데 악마가 아난의 귀를 막았든지, 아니면 아난이 잠시 다른 생각을 했든지 부처님 말씀을 듣고도 아무 말도 않는 실수를 했습니다.
석 달 동안 쿠시나카라로 향하는 도중에 많은 법문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대목은 법회보에 나와 있는 것처럼 열반사덕으로 부처님은 영원하시며 멸하는 몸이 아니시다(常), 부처님은 항상 기꺼운 기쁨에 머무르시며(樂), 진실한 법으로서 머무르시며(我), 청정으로 머무르신다(淨) 이렇게 상락아정의 열반사덕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볼 것은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가 할 때 보통 삼법인 혹은 사법인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일체개고와 제행무상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불교를 염세적인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고 단정을 합니다. 일반인들은 상락아정이라는 열반사덕이 있다는 것을 다 모릅니다.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열반사덕입니다. 즉 일체 괴로움을 다 벗어던진 상태가 있어서 항상하고, 즐겁고 기쁜 자리며. 나라고 하는 법성이 있는 자리며, 청정으로 머무는 것이 부처님 자리입니다.
제 법호는 혜담이지만 불명은 지상인데 큰스님의 상좌들에게 다다를 지(至)자, 지극할 지자를 써서 당시의 주변 스님들은 다다를 지자를 쓰면 불명이 안 나오는데 묘하게 만들었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지상이고, 같이 계를 받은 지오스님, 일 년 먼저 받은 지환스님은 지락이라 쓸 수 없어서 지환이라 했고, 맏상좌는 지정이라 했는데 왜 저에게 상락아정의 머릿글자인 상(常)자를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요근래의 불광 상황을 보면서 저는 숙명적으로 불광법회를 지키라는 의무를 맡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아플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숙명적으로 불광법회를 지켜야 하는 업을 지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스님께서 상락아정을 넣어 불명을 지으신 것은 불교의 핵심인 상락아정에 이르게 하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불성이란 항상하고, 기쁘고, 환희로운 것이고, 청정한 것임을 모토로 삼고 저희들에게 그런 불명을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상좌들은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 그렇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비관적입니다. 요즘 와서 생각하는 것이 위법망구(爲法忘軀), 부처님 법을 지키기 위해서 내 생명을 내놓는다는 뜻입니다. 요즘 한국불교 조계종 젊은 스님 가운데 이런 정신을 가진 스님이 과연 있는가 생각해보면 절망적입니다. 위법망구라는 말도 모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열반이란 항상 하는 자리로 없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일체개고라는 부정적인 것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바라밀 자리, 저 괴로움이라는 언덕을 건너간 자리입니다. 그 바라밀의 상태에서 보면 삶이란 괴로움이 아니라 환희롭고 살 만하고 가치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법성생명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착안해야 합니다. 깨달음의 자리에 가면 나옵니다. 상락아정에 도달하기 위해 출가했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과연 요즘 스님들이 그런 수행을 하는가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따지고 보면 남의 집 자녀로 태어나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고 절에 들어와 머리 깎고 수행한다고 하면 뭔가 하나를 얻어야 되는데 얻을 생각을 않는 것 같습니다. 10~20대에 부모님 속 썩이고 절에 들어와 뭔가 얻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그럭저럭 보내는 스님이 많은 것 같은데 왜 그러냐 하면 법을 위해서 그만큼 노력하지 않고 그럭저럭 보내는 수행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 가까운 어느 스님이 저에게 불광법회 하지 말라고 해서 나중에 왜 하지 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법문하면서 어떤 특정 스님을 비난하고 있는데 그 말은 나만 옳고 다른 스님은 잘못됐다는 말인데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말을 해서 너무 화가 났습니다. 스님들 생활이 그럭저럭 그렇게 사는 것이라는 데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대장부로 태어나서 승려가 되어 그럭저럭 시줏돈 받아서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안락하게 살겠다면 뭐하러 머리를 깎았습니까? 재가불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면 다른 사람과는 다른 뭔가를 얻어야 합니다.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것이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입니다. 내 생명이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고 이 자리는 상락아정 상태임을 조금이라도 맛을 봐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그럭저럭 세월 보내며 수행자라 하고 불자라 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얻지 못하는 뭣인가 얻어서 환희로운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그런 불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고 그런 스님도 없어지는 것 같아서 굉장히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부처님의 열반 시현일에 다들 마음속에서 기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법문은 자등명 법등명이고 자귀의 법귀의입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고 되어 있기도 한데 인도라는 지역의 특성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도의 데칸고원은 끝없는 평지여서 비가 많이 오면 전체가 다 잠겨서 섬으로 가야 살기 때문에 섬으로 삼으라 했고 중국에서는 법과 등불로 바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류사에 종교를 일으킨 사람은 대부분 불을 의지해라, 물을 의지해라, 신을 의지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부처님께서 대가섭을 제도할 때 가섭 삼형제를 이끈 사상은 바로 불을 숭배하는 겁니다. 종교를 일으킨 사람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이렇게 솔직하게 진리인 법과 자신에 의지하라고 하신 분은 아마 없을 겁니다. 내가 신이며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란 부처님 자체인데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을 등불로 삼고 너의 생명으로 삼아라는 말입니다.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는 말에서 광덕대선사께서는 획기적인 말씀으로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을 내놓습니다. 바로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임을 믿고 그 진리에 의지하라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입니다. 세상은 비관적이고 지저분하고 형편없고 곧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는데 세속인 뿐만 아니라 소위 종교인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사기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법을 바로 봐야됩니다.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이라는 진리를 새겨야 하는데 다른 곳에 의지하다 보니 삿된 사상에 현혹되어서 재산을 탕진하고 집안을 망치게 됩니다. 부처님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 속에 있고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인데 그 공덕생명이란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처럼 집안이 평안하고, 가족이 화목하고, 국가가 잘 되고 평화로운,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힘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일체유심조라,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듭니다. 마음이란 유식학에 나오는 제7말나식입니다. 일체유심조를 어떤 사람이 불행한데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해석합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내가 마음 먹은 대로, 제7말나식에 이루었다고 확신하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확신을 못합니다. 우리는 불광 정상화 발원을 하는데 불광법회 정상화는 이미 되었음을 확신하고 여러분의 힘으로, 회장단 힘으로, 정수위 형제들 힘으로 정상화가 되었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원도 문을 열고 후원도 원상복귀했음을 느끼는 겁니다. 이건 요즘 나온 기도법이 아니고 옛날 인디언과 티벳스님의 기도입니다. 사분정근, 하루에 네 번 기도하는 이유는 내 마음 자체가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제7말나식, 잠재의식에서 이루었음을 상상하고 느껴야 됩니다. 이룰 수 있는 능력은 부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꺼내쓰는 겁니다. 그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됩니다.
열반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은 우리에게 해태심을 없애고 분발심을 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 출가하면 한량없는 복을 받는데 부처님께서 원래 100년을 사셔야 되는데 80년만 살고 20년은 후대의 수행자와 불자들을 위해서 남겨뒀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가하면 부처님께서 남겨둔 20년의 공덕을 누릴 수 있다고 스님들의 사회에서는 말합니다. 세상이 많이 가물어서 풀도 없고 나무도 없어서 산의 개미조차 굶어 죽을 때 사는 것이 스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복덕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내 생명 속에 그 복덕을 타고났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이미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받아서 태어났는데 이것을 부정하고 나는 박복하다는 것은 불교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큰스님께서 대각사에서 불광법회를 처음 열면서 하신 말씀도 지금까지 없던 사상입니다. 모두가 업보중생이라 말할 때 그것은 아니고 우리의 생명이란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불광법회가 우연히 말 잘하는 스님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큰스님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너의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고 법문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성철큰스님도 고암노스님도 사상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서 그야말로 군계일학으로 뛰어나신 분이 광덕큰스님이시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생명이란 겁니다. 이것을 믿고 의지하여 내어 쓰라는 것이 자귀의 법귀의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는 것이 열반시현일에 하는 말입니다. 불광법회의 창립취지도 여기에 있고, 우리가 불광법회를 지켜야 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에게 불행이 오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 100% 믿으면 실현되고 현현됩니다. 실현해본 사람은 확실히 알게 되고 그럴 때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더 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이 법문을 알려주려고 노력하는 전법의 정신이 생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지도하는 사람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스님이 기도하면 효험을 더 보는 것은 있겠지만 기도는 자신이 해야 되고 이루는 건 당사자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밝아지고 불교를 믿는 데 '부처님 감사합니다'란 말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진리의 당체임을 믿고 이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시간 지켜서 반야바라밀 염송을 하여 의식에 심게 되는 겁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부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게 되고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열반시현이란 말은 큰스님께서 지으신 것이라 다른 절에서는 열반재일이라 말합니다. 단순한 열반이 아니라 열반을 보여준 날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베푼 은혜라 인도에 가면 열반성지인 쿠시나카라에 가게 됩니다. 내가 수행을 잘하고 있는가 알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에서 부처님께 얼마나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느냐를 보면 됩니다. 감사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 내 삶이 밝아지고 이것은 부처님 열반시현일에 다짐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불광인의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최상의 보은을 삼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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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사진 찍으신 지일심 보살님, 감사합니다
곳곳의 귀한 사진을 모아 올려주시는 송지 보살님, 명원행 보살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불광법회 일지는 풍성하게 작성하고 있습니다. ...()()()....
바라밀 보살님, 법회일지 작성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의 궤적을 보여 주는 소중한 불광 법회.
법회를 이끌어 주시는 혜담 스님과 모든 불광 형제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