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제목 : 고통(The Pain)
(이 글은 인도에서 주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 노상렬 ㅅㄳ의 글을 허락을 받고 올린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
부처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해석했고 예수는 생명이 결핍된 곳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 원인과 해결책에 있어서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부처에게 있어서 고통은 무지와 집착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끊어내거나 회피해야 할 주관적 감정이다.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를 포함한 현상 세계의 모든 것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결국 나라고 할 수 있는 것 혹은 이것이 저것과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허상(Maya)이므로 실상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감정도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Ego)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면, 선업과 악업이 만들어내는 끝없이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아무런 고통과 감정의 동요가 없는 열반(Nirvana:불이 꺼진 상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윤회의 고리가 될만한 모든 인연을 끊고 쌓여있는 악업을 씻어내기 위한 엄격한 수행(4성제와 8정도) 의 길을 무소(코뿔소)의 뿔처럼 혼자 가야 한다.
여기서 부처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목적지를 가리키는 도로 위의 안내 표지판 혹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고통은 주관적인 감정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풍성한 생명이 결핍된 상태에서 오는, 객관적 실체이다.
예수는 그렇게 육신뿐만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메말라 죽어가는 인간을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인간의 역사 속으로 성육신한 예수는 인간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어 인류가 만들어 내는 죽음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바꾸었다.
이제 예수를 주와 구원자로 따르는 자들이 현실 세계에서 경험하는 인생의 고통은 결코 생명의 결핍 때문 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서 예수의 성숙으로 이끌어 가며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와 구주로 영접한 이들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
그가 누구이든 혹은 어떤 가르침과 방법이 되었든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유한한 인생에게 필요불가결한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면, 가변적인 철학과 종교 그리고 지적이며 심리적인 만족을 주는 가르침 혹은 심신의 건강을 위한 수양법 등이 이 땅을 사는 동안 인간이 직면하는 고통과 슬픔을 잠시 잊게하는 임시 처방은 될 수 있어도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과부에게, 고통의 바다와 같은 인생에서,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아들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버리고 인생의 무상함에 순응할 것을 권면하고 자신의 길을 간 부처의 일화는 인간 위에 왕노릇하는 사망의 실재를 불가항력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 부처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나 죽은 아들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는 과부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죽음이라는 실재 앞에서 분노하는 예수가 그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낸 일화는,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며 끝없이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결코 인간이 순응해야 할 인생의 일부가 아니라 허락없이 인간의 삶에 들어온 불청객이며,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예수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진지하게 질문하는 사건이다.
결론적으로, 인간 부처는 고통에 초연한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인성을 벗고 신성을 입으려 하였고, 이를 위해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일체를 부정하고 적멸(Nirvana:욕망이 꺼진 상태)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다.
즉 부처는 초월자 되기 위해 타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인간의 감정을 죽이는 비인간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이 격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므로 부처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완성되지 못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결핍된 상태에서 오는 자기애적(Narcism) 고통이다.
성자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스스로 자신을 낮춰 인간과 같이 되셨고 전인격적으로 인간과 동일시 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자신의 고통과 죽음으로 승화시키셨고 위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인간 그리고 아래로는 피조세계를 십자가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연결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하나됨(샬롬)이 깨진 상태에서 오는 관계적 고통이다.
어느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 총독이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성전 안에서 죽인 사건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죽임당한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발 더 나아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한 순간에 압사당한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경고 하셨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는 겸손이고 자기 성찰이어야 한다.
인간의 죄로 인해 비정상이 마치 정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행이 이 슬픔 많고 고통 많은 세상에 우리를 찾아 예수님이 오셨다.
그 분은 자신의 어깨위에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셨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다.
이제 그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는 관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슬픔을 당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으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다 길 잃은 양처럼 제각기 잘못된 길로 갔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이사야 53:3-6 KL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