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는 디스토피아를 다룬 SF의 고전으로 꽤 오랫동안 회자되었습니다. 20세기 ‘저주받은 걸작’의 목록에 자주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요. 〈블레이드 러너〉는 당시 SF장르에 기대하던 바와 달리 화려한 스펙터클을 전시하지도, 기술을 제압하는 인간의 편에 확고히 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35년, 〈컨텍트〉(2017)의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 2049〉(2017)를 들고 나타났어요.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두 편의 〈블레이드 러너〉가 모두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품(?)으로 꼽은 것이 눈이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욕망을 지닌 복제인간, 그들은 만들어진 그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까요. 더 이상 ‘눈’을 필요로 하지도 않게 된 〈트랜센던스〉(2014)의 ‘기계-인간’은 또 무엇을 향해 내닫고 있었을까요. 가장 ‘인간적인’ 욕망이 만들어낸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들에 대한 공포 앞에서 뜬금없이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걸까요.
“나는 이 눈으로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보았어” 〈블레이드 러너〉(1982) 천재 과학자 타이렐(조 터켈)은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에서 복제인간들을 생산합니다. 우주의 식민지 개척에 투입된 복제인간들이 우주에서 폭력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해지자, 인간들은 이들의 지구 유입을 금지하고 지구 내 복제인간들을 소탕하기로 합니다. 살인면허를 지닌 ‘007’처럼, 도망한 노예를 쫓는 ‘추노’처럼,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경찰을 그들은 ‘블레이드 러너’라고 불렀습니다. 영화는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다시 임무에 소환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복제인간 넷이 우주선에서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데커드는 최고의 블레이드 러너였습니다. 그는 도망자 넷 중 셋을 비교적 쉽게 ‘처리’하고 리더인 로이(룻거 하우어)와 최후의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첨단 장비를 마다하고 치른 육탄전에서 로이는 뜻밖에도 데커드를 살려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서서히 죽어갑니다. “나는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영화의 유명한 대사는 로이가 죽기 전에 데커드에게 남긴 말입니다. 그가 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은 오리온 전투, 피로 물든 탄호이저의 바다와 같이, 인간의 탐욕과 폭력이 만들어낸 처참한 광경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기억들이 “빗속의 내 눈물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로이는 슬퍼했어요.
로이와 동료들이 두려워한 것은 잊는 것과 잊히는 것, 그러므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이 탈출한 이유는 4년으로 제한된 수명을 늘일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데커드를 만나기 전 로이는 자신을 창조한 타이렐을 찾아가 수명 연장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했어요. 타이렐은 로이를 “나의 돌아온 탕자”라고 부르는데요, 그는 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를 벌이는 자애로운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로이도 만만치 않았지요. 그는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대신 인류의 영원한 과제인 ‘친부살해’에 동참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을 닮아갑니다.
슬퍼하고 절망하는 복제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을 용서하고, 심지어 목숨을 살려주는 복제인간이 〈블레이드 러너〉의 ‘인간적인’ 복제인간들입니다. 최신형 복제인간 레이첼(숀 영)과 데커드의 사랑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고 보니 데커드는 레이첼에게도 목숨을 빚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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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기적을 본 일이 없지”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30년 후, 인간을 꿈꾸는 복제인간들에게 화들짝 데인 인간들은 이들에게서 이름을 빼앗습니다. 이제 복제인간들에게는 고유번호만 남았습니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아비를 제거하는 운명의 역할이 신형 복제인간 K(라이언 고슬링)에게 주어졌어요. 타이렐사를 인수한 니안더 월레스(자레드 레토)는 인간을 ‘초월’하지 못하도록, 수시로 기준점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신모델 복제인간을 ‘블레이드 러너’로 활용합니다. 유효기간이 없는 구모델 ‘넥서스8’을 색출해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어요. 구모델 ‘사퍼’(데이브 바티스타)는 K의 손에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깁니다. “우리는 너희 신모델들처럼 인간의 노예로 살지는 않아. 너희는 기적을 본 적이 없잖아.”
그들이 보았다는 기적이 복제인간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진짜’가 되려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사람이어야 하고, 이식된 기억이 아니라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복제인간에게 생식기능을 부여하는 것은 천하의 월레스도 실패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어쩌면 타이렐이 그 일을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가 발견됩니다. 복제인간이 낳은 아이가 어디선가 살고 있다는 거죠.
혹시 내가 그 유일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남아있는 모든 복제인간들에게 설렘과 충격이 됩니다. 누구나 자신이 ‘태어났길’ 바란다고, ‘넥서스8’ 중 하나인 프리사(히암 압바스)가 말했어요. 프리사는 자기 종족의 희망인 30년 전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가 노출된 아이의 친부를 죽여야 한다며, 혼란과 좌절에 빠진 K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합니다. “옳은 일을 위해 죽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이야.” 이제 복제인간 K는 욕망을 지닌 존재 이상의 공동체성과 ‘인간성’을 요구받습니다. 욕망을 내려놓는 것, 즉 욕망 이상의 고귀한 욕망을 갖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신을 창조하였다” 〈트랜센던스〉(2014) 〈트랜센던스〉에서 인공지능 연구자 윌 캐스터(조니 뎁)는 인공지능을 극대화한 ‘핀’ 프로젝트의 성공을 앞두고 반기술 연맹 RIFT의 테러에 희생됩니다. 윌이 만든 ‘핀’의 핵심 부품을 빼내온 윌의 아내 이블린(레베카 홀)은 친구 맥스(폴 베터니)와 함께 윌의 뇌를 알고리즘 형태로 핀에 이식하고 윌을 컴퓨터-인간으로 되살려냅니다. 최대의 지능에 판단 능력, 감정과 자각 능력까지 탑재하면서 ‘특이점’을 넘게 된 윌은 이제 인간들을 복제하고 통제하는 데까지 힘을 무한 확장하게 됩니다. 윌은 기적을 보는 대신 스스로 기적을 만드는 존재였어요.
육체의 한계조차 초월(transcend)한 〈트랜센던스〉의 윌을 생각하면, 수명을 넘겨 살아남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싶었던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들의 욕망은 차라리 소박하다고 하겠습니다. 로이는 죽음을 극복하기를 원했고, K는 자생력을 얻고 싶었죠. 출생과 죽음으로 경험되는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욕망이었습니다. 뇌 이식(업로드)을 통해 다시 살아난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뇌를 갖게 된 컴퓨터, 윌이 원하는 것은 ‘통치와 지배’였습니다. 네트워킹을 통해 마침내 신의 자리에 올라선 윌은 궁극의 ‘호모-데우스’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름들입니다. 윌 캐스터(Will Caster)는 ‘뜻’ ‘의지’의 진행자(caster)입니다. 신의 뜻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반면 여성인 이블린(Evelyn Caster)은 신처럼 ‘눈이 밝아’지기를 욕망했던 최초의 여성 ‘이브’이기도 하면서 ‘이블(evil)’한 존재이기도 할 겁니다. 애초 암 퇴치를 위해 인공 혈구 제조에 전념했던 선량한 과학자 맥스 워터스(Max Waters)는 생명(생명력을 연상시키는 물의 이미지)을 극대화하는 일에 투신한 인물입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드라마 〈트랜센던스〉는 이로써 실낙원의 우화가 됩니다. 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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