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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15 - 식민지 영국군에 참전해 90년만에 독립한 인도와 파키스탄
인도는 플래시전투와 세포이항쟁등 영국군과 싸웠으나 패한후 90년간 식민지 시절 영국과 무력 독립
전쟁을 포기하고 오히려 영국군에 참가해 1차대전 오스만 투르크군과 전쟁 및 2차대전 일본군과
전쟁에 앞장서 총알받이가 됨으로써 그런 희생을 바탕으로 1947년 영국에서 독립을 허락받았습니다.
인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니 메소포타미아 보다 500여년이 늦은 기원전 2500년 무렵
파키스탄, 인도의 펀자브 지방,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인더스 문명은 도시 유적은
250여개에 이르는데.... 이 시기 어떤 문명 보다 넓은 땅에 걸쳐 발달했으며 그중
유달리 큰 곳만 6개로, 지구라트와 피라미드 같은 신전이나 왕의 무덤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 보다도 훨씬 깨끗하고 잘 정돈된
도시를 구축했으니 그중에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하라파, 모헨조다로,
돌라비라 등인데 이 도시 유적들은 가로 1km 세로 1.2km 의 웅장한
규모가 남아있으니 전성기에 이 도시 인구는 4만~ 8만명 가량이었으리라 추정합니다.
기원전 800년경 부터 '16국 시대' 가 펼쳐졌으며 이 소왕국들을 통합한 통일왕조는
기원전 5세기경 마가다 왕국의 난다 왕조이며 브라만교의 지나친 의식
중시에 반발해 자비와 평등을 역설한 석가모니의 불교와 살생 금지등 계율을
강화한 바르다마나의 자이나교가 발생했으며 모두 윤회 사상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공격을 받은후 기원전 322년에 세워진 마우리아 왕조는 그리스
인들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몰아내고 아프가니스탄 및 이란의 일부까지 진출
하기도 했으니 아소카왕 때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브라만교 세력 억제와 통일
제국의 안정을 위해 불교 진흥책을 폈으니, 때문에 불교의 해상 전파가 이루어집니다.
105년에 쿠샨 왕조가 뒤를 이었고 그리스와 인도 양식이 결합된 “간다라 불상”이 만들어졌고,
320년에 들어선 굽타 왕조때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힌두교가 성립했으며 0의 개념과 십진법
기반의 아라비아 숫자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지전설, 지구 구형설 등 과학 발전이 일어납니다.
5세기경 유목민족 에프탈과 충돌하면서 나라가 망하고 혼란속에 중소국가들이 난립
하다가 1526년에 무굴 제국이 들어서는데 무굴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해서
몽골족과 투르크족의 티무르 제국에서 유입된 종족이 세운 나라로 1556년 악바르
대제에 이르러서는 정치 체계의 안정을 갖추어 타지마할 등 섬세한 문화가 발달합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굴 제국은 지나친 정복활동과 토목 공사로 인해 재정상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처럼 급속도로 악화되니.... 6대 황제 아우랑제브는 남방 원정을 주도하여 형식적인 인도
전체의 지배자가 되는데는 성공했으나,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과격한 이슬람교
절대주의 정책으로 타 종교를 적대시하고 탄압하면서 반발을 사 원정중에 막사에서 숨을 거둡니다.
1674년 시바지가 힌두교도 호족들로 이루어진 마라타 왕국을 건국하고 구자라트지방 까지
진출해 델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했고, 펀자브 지방에서는 1716년 시크교 세력이 힘을
모아 시크동맹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켜 1799년 시크왕국을 세우고 라지푸트족의
소국에다가 자트족의 소국에 아와드족 세력들까지 난립하면서 인도는 벌집이 되어버립니다.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는 1739년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에 입성해 엄청난 살육과
함께 약탈을 하니 이는 무굴제국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결정적인 타격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침공까지 겪게 되면서 무굴 제국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는데, 수라트는
토후들의 폭동으로 몰락하고.... 영국의 식민도시 뭄바이가 주요 무역 도시로 급부상합니다.
무굴제국이 인도를 통치하는데 있어서는 3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첫째는 귿르이 인도인이 아니라
침략자 이민족이었고 둘째는 종교가 인도인들이 믿는 힌두교가 아니라 이슬람교였으며
셋째는 인도는 워낙 광대한 나라니 직접통치는 불가능하고 지역의 왕이나 토후들이 통치하는걸
묵인할수밖에 없었으며 영국은 인도 토후들을 포섭해 협력자로 만들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옵니다.
1757년 아프가니스탄 두라니 왕조의 군대가 늙은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를 또 한차례 약탈하였는
데.... 두라니 군대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무굴제국의 적인 마라타 동맹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이는 무굴 제국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대신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7년 전쟁의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프랑스를 격파해 동인도회사 소유의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1857년의 플라시 전투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벵골 토후국과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상대로 거둔
승리로, 7년 전쟁의 일환이었던 전투는 벵골 내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확실시하게 되었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는데 전투는 캘커타 북쪽 150km
벵골 수바국의 수도였던 무르시다바드 남쪽릐 후글리강변에 위치한 팔라시에서 벌어졌습니다.
인도 벵골의 태수인 시라즈 우드다둘라의 벵골군과 영국 동인도 회사가 교전하게 된 것인데
그 전에 시라즈 우드둘라 벵골 태수는 영국이 야금야금 인도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자
심각한 위협을 느꼈으니 먼저 영국인들에게 요새화 확장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영국등 유럽 제국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군대가 부족하면 늘 써던 수법대로 현지인
을 회유하니, 로버트 클라이브는 시라즈 군대의 사령관 미르 자파르에게 뇌물을 전했고, 그에게
벵골의 태수 자리를 약속했으니 그는 1757년 플라시에서 시라즈를 무찌르고 캘커타를 점령합니다.
전투는 영국이 점령한 캘커타에 시라즈 우드다둘라가 공격을 가하고 블랙홀 학살을 저지른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영국은 클라이브 남작과 찰스 왓슨을 마드라스에서 파견해 벵골로
진격해 캘커타를 탈환했한 이후 클라이브는 찬다나가르 전투에서 프랑스 요새를 포위합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영국에 맞서기 위해 소규모 부대를 파견했으며 시라즈는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영국군은 수적 열세를 우려하여
시라즈 우드다둘라의 장군들인 미르 자파르, 야르 루투프 칸, 자가트 세스
등과 음모를 맺은 탓으로 인해 전투는 11시간 만에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후 영국은 1858년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면서 무굴제국 왕실과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고 1877년
에는 영국령 인도제국이 되었으며... 식민지배 시기 마하트마 간디 등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 국민회의 계통 독립 운동,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 등의 독립운동이 이어집니다.
세포이 항쟁은 인도인 용병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영(反英) 항쟁으로, 동인도 회사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세포이는 페르시아어로 용병을 뜻하며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가리키는 말로 항쟁 이후 인도는 영국 여왕이
직접 다스리게 되었고.... 이 항쟁은 인도 독립 운동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세포이 항쟁은 빠른 속도로 인도 각지에 확산되어 각계 각층이 영국에 대항하는 항쟁으로 발전
하였으니 주요 교전은 갠지스강 상류 삼림 지역과 인도 중부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니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 비하르주, 마디아프라데시주 북부, 그리고 델리 등지에서 교전이 있었습니다.
세포이 항쟁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촉발되었고 1858년 6월 20일에
과리오르가 함락되면서 절정을 맞았지만 항쟁은 인도 전역을 포괄하지는 못했으니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벵골, 뭄바이, 마드라스와 같은 지역은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펀자브의 시크교 제후는 오히려 영국 동인도 회사를 지지하여 병력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아와드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항쟁이 유럽 국가 전체에 대한 배격운동 양상을 띄었으며
락슈미 바이와 같은 항쟁의 지도자들은 항쟁 이후에도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는데
하지만 세포이 항쟁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관적인 이념을 공유하지는 않았습니다.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체되었고 영국은 인도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해 군사, 재정,
행정 등 각 분야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영국령 인도 제국을
출범시켜 정부직할로 편재하였고 이로써 빅토리아는 인도제국의 군주라는 새로운 지위를 더하게 됩니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데 전사자 900만명, 민간인 사망자 600만명, 부상자 2,700만명,
불구자 600만명, 미망인 400만명, 고아 800만명을 남겼는데... 독일군은 181만명의 전사자,
425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프랑스군은 전사자 139만에 부상자 361만이고 영국군
은 전사자 95만명에 부상자 231만명이며 미군은 전사자 12만명에 부상자 20만명 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은 341만명 포로에 230만명이 전사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전사자는 120만명, 오스만
제국군은 77만명, 이탈리아군은 65만명, 루마니아군은 34만명, 세르비아군은 28만명, 벨기에군과
불가리아군 각 9만명, 그리스군 3만명, 포르투갈군 7천명, 몬테네그로군 3천명, 일본군 1천명 입니다.
일본은 1900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등이 청나라 베이징을 점령
할때 8개국 중에 최대 규모인 50% 병력을 동원한 연합국이었고, 1905년 러일전쟁 때는 영국과
동맹국이고 미국과 우호국이었으며..... 1918년 러시아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
했을 때 70%에 달하는 최대병력을 동원했으며 1차대전때도 미국, 영국과 같은 연합국이었습니다.
1차 대전때는 연합국으로 독일이 소유한 중국 칭따오를 점령하면서 독일군과 싸우고 남양군도 를
점령하면서 1천명이 전사했으니.... 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이후 한국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에
고무되어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는데, 패전국이라면 몰라도 "일본은 승전국" 이니 "영토가
늘어" 나야지 기존에 보유한 한국을 내어 놓으라니.... 전세계 어느 열강도 동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2차대전 전사자는 미국 29만명, 영국 35만명, 프랑스 56만명, 일본(조선인약간 포함)
군인 130만 + 민간인 67만명, 중국 군인 205만 + 민간인 775만, 독일 군인 350만 +
민간인 280만명 에 폴란드인 300만명인데 비해 소련은 군인 1,370만 + 민간인
700만명으로 전세계 희생자의 절반을 차지하니 "2차대전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 입니다!
중동까지 다스리던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1914년 7월 영국에서 만들어지던 전함 두척을 동맹국
병기라는 이유로 영국이 부당하게 압류하자 여론이 나빠졌으며.... 8월에 독일은 오스만제국
에게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하면서..... 전함 두척을 양도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줘 환심을 삽니다.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 해군이 지휘하던 두 전함은 10월말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 공격해 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
하니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되며.... 영국과 프랑스는 곧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영국령 인도인들은 자치권을 강화시켜준다는 영국의 꼬임에 넘어가 영국군에 가세합니다.
영국은 인도인들에게 전쟁에 협조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하니 수십만명의 인도군이 이라크에
상륙해 바그다드로 진격하면서 오스만투르크군과 싸워 엄청난 인명 피해를 발생했으며 1917년
3월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손에 넣었으나..... 전후 영국은 요르단과
시리아의 아랍인들에게 약속을 저버리고 독립을 허락하지 않은 것 처럼 독립약속을 무시해 버립니다.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정말로, 진짜로 독립시켜 준다는 약속에 인도인들은 영국군에
또 다시 입대해 미얀마(버마)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기도 했는데... 그 반대로 손문이나 버마의 아웅산
처럼 일본에 망명했던 찬드라 보세는 일본군을 이용해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1942년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 하에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당시 영국은 동남아시아
에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본 제국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이들 독립 운동을 신속하게
무력 진압했으며 전후 제국주의의 쇠퇴,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 그리고 인도의 일본 제국주의
세력 확대 저지의 공을 인정받아 1947년 영국은 인도를 자치령으로 지정해 사실상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종교 내전이 발발하여 수십만명이 사망하고 수천만명이
피난길에 오르는 가운데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
으로, 그 밖의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분리독립하게 되었고 몇 년간 영국왕을 모시다가
1950년 개헌해 대통령을 뽑아 인도공화국으로 출범하는데 이후 파키스탄과 여러차례 전쟁을 치릅니다.
한국의 김옥균과 중국의 손문에 인도인으로는 라쉬 비하리 보스와 찬드라 보스 , 버마 아웅산
과 우누에 네윈과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등의 독립운동가들은 서양 식민지 당국에 쫃기면
의례히 공식처럼 일본으로 망명했는 데... 특이하게도 일본은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인들도
개인적으로 망명해 온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는데 있어서 매우 헌신적(?) 이었습니다.
인도인으로 영국 총독 암살에 실패하고 1915년 일본에 망명한 라쉬 비하리 보스(Rash Behari
Bose) 는, 조선 병합과 만몽 분할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아시아주의자들의 비호를 받았는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럽의 러시아에 승리한 것이 아시아주의적 관점에서 환영
받은 것 처럼 일본의 힘을 빌려 독립전쟁을 전개한 동남아 및 인도의 일부 세력이 있습니다.
‘대동아 말판놀이' 는 1940년대에 사와이 이치사부로가 만들었는데 ‘대동아전쟁’의 진행상황을
일본의 어린아이들에게 소개한다는 계몽적 목적을 표방했지만 현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비참한 실상을 알지 못한 일본의 어린아이들은 이 놀이를 하면서, 서구 세력의 독무대
였던 동남아시아의 영토를 빼앗으며 국력을 키워 나가는 조국 일본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주사위놀이판 ‘대동아공영권 일주’. 말판을 거꾸로 돌리면 인도의 친일 정치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흰
옷을 입고 행진하는 인도인 군대의 모습이 보이니 ‘대동아공영권’ 은 서구 세력에 맞서 일본이 국력을
키워 나간 결과로 인식되었고, ‘대동아’ 말판놀이를 위시해서 소재로 한 놀이가 숱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는 라쉬 비하리 보스와 함께 인도 독립운동의
여러 분파 가운데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과 적대하던 나치 독일 및 제국주의 일본의
도움을 끌어내고자 하는 세력을 대표했으니 1943년 11월5~6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만주국, 중화민국, 태국, 미얀마, 필리핀의 ‘대동아회의’ 에는 옵서버로 참가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인도는 불교 발상지로서의 이미지가 컸는데 13세기 일본의 승려였던
니치렌(日蓮)은 독특한 주장을 전개했으니 자신은 일본에 전래된 모든 불경을 연구해
불교의 가장 깊은 이치를 깨달았는데, 현재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했으므로 자신의
깨달음을 인도에 거꾸로 전해야 한다며 ‘나무묘법연화경’ 을 암송하니 니치렌슈(日蓮宗) 입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간디가 주도하던 국민회의에 소속되었다가 노선상의 차이로 이탈해 1941년
독일로 갔으니 인도를 점령한 영국과 맞서던 독일의 힘을 빌려 인도 독립을 쟁취하려는 ‘적의
적은 친구(The enemy of my enemy is my friend)’ 였으나 독일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홍콩과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영국군에 복무한 6만 5000명의 인도군을 생포
했는데 일본군은 이들 포로를 조직하여 인도국민군을 창설시켰고 1942년 3월에는 인도국민군
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국외의 여러 단체가 일본 도쿄에서 회담을 열었는데, 일본 측은
라쉬 비하리 보스를 의장으로 하는 인도독립연맹을 창설시키고 인도국민군을 그 산하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함께 역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을 자임한 인도인들은 자신들을 괴뢰로 이용하려는 일본
측에 저항했으니, 1942년 12월 인도국민군을 이끌던 모한 싱(Mohan Singh)이 일본 측과 대립
하다가 일본 특무기관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체포되었으며 일본 정부는 “국민회의
밖에서는 소리없이 존경을 받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잠수함에 태워 독일에서 일본으로 데려옵니다.
1943년 5월 도쿄에 도착한 보스는 도조 히데키 총리와 회견을 가졌는데, 이때 보스에게 매료된
도조는 인도 독립을 위한 원조와 협력을 약속했으며 1943년 10월에는 보스를 수반으로
하는 자유 인도 임시정부가 발족했고 일본 정부가 이를 승인했지만 실상 일본 측은
임시정부를 일본의 괴뢰로 간주할 뿐이었고, 보스는 이러한 일본측에 불신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944년 3월에 일본군이 최대의 난맥상을 보인 임팔전투(Battle of Imphal)가 일어났으니
이 전투를 인도 해방전쟁으로 인식한 찬드라 보스는 인도국민군을 독립군으로서
가장 먼저 인도에 진입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본군은 이 요구를 거부했는데
그럼 인도인들은 영국군과 일본군 양쪽에 참전해 서로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는?
인도측의 도시 임팔에서 유래한 임팔전투는 일본에서는 '우호 작전(ウ号作戦)' 이라 하는데
주목표는 임팔이었고, 인근인 코히마는 임팔 점령을 지원하기 위한 조공에 가까웠지만
코히마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임팔-코히마 전투' 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국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포착, 허를 찌르겠다는 기동전이라는 전술관점에서 보면 괜찮은 작전이었으나
전장에 도달하기까지 전력유지, 보급문제, 포위후 적의 반격에 대한 대비, 작전실패시 철수 등에서는
헛점 투성이인 도박에 가까운 작전이었으니 일본군은 앞선 싱가폴-말레이 전투에서의 승승장구로
영국군을 얕잡아 보았고, 공격하면 즉시 거점을 빼앗을수 있다고 오판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었습니다.
임팔은 인도 북동부 아삼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연합군이 중국으로 보내는 보급로의 시작이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니 일본군은 이곳을 공략하면 중국 국민혁명군을 압박할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인도까지 진격해 영국군을 쫓아내는데 성공하면 인도는 친일파
찬드라 보세 주도하에 독립하고 그와 동시에 추축국으로서 참전하게 된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버마 북부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영국 윈게이트 장군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버마 서북부
에서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고 연합군 정찰 부대가 나타났으니 일본군은 이것이 대대적인 공세의
시작이라 여기고 재편성해 버마 방면 사령관으로는 육군 중장 가와베 마사카즈를 그 휘하로는
제15군과 제55사단, 그리고 직할 부대를 배치했는데 제15군 사령관에 무타구치 렌야가 임명됩니다.
무타구치는 중일전쟁 방아쇠를 당긴 원흉이었으니 무타구치가 독단으로 노구교 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카와베 마사카즈는 직속 상관이었는데, 노구교 사건 당시 좌천당한 자기 신세를
만회해보려는 심산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마찬가지로 같은 계파인 카와베도 이를 묵인
했을 가능성이 크니 파벌주의의 폐해로 '실책' 을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되니 '식량' 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와 소, 말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 먹은데다가
원래 종자들이 장거리 이동을 안하는 종들이라 잡아먹은 소 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원래 가축을 식량으로 이용하는 신속한 기동전은 평지에서 가능한 전술로, 정글과 고산에서 적용
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적의 보급품을 빼앗아 쓰겠다는 무타구치의 징기스칸 전법은
이론만 그럴듯한 전형적인 탁상공론으로 국경을 지나자 가축들은 친드윈강을 건너다가
익사하고, 아라칸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영국 공군은 포위된 육군 진지에 항공보급으로 물자를 쏟아부었으나 항공지원이 없는 일본군
보병은 적의 제공권 하에서는 큰 피해를 입고 위축되어 작전을 하는데... 척박한 정글
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가축수송 보급로니 연료가 적어서 자주 비행 못 한다
하더라도 항공기로 보급하는게 쓸데없는 노동력 낭비도 줄이고 좋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참모장 오바타 소장은 '1만 5천톤에 달하는 물자를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자
현지조사로 진격로를 면밀하게 검토한 뒤 '자동차도 모자란 판국에 비만 오면 못쓰게 되는 도로,
다리도 없는 친드윈강,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보급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불가능하다.'
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무타구치는 "나약한 소리" 라며 해임해 관동군으로 보내버립니다.
15군 산하 33사단장 육군중장 야나기타 겐조와 31사단장 육군중장 사토 고토쿠도 들고 일어났지만
무시당했고 오바타 참모장의 해임후 반대여론은 사그라들었지만, 버마 방면군 나카 에이타로
참모장은 후방에서 보급이 어렵지 않도록 3개 사단의 배치를 재고해야 한다. 남방군 이나다
마사즈미 참모장은 보급계획을 도외시한 이 작전구상은 실패할 위험성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임팔작전은 정치적인 면도 있었으니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수상 찬드라 보세가 도조 히데키에게
'일본군이 인도를 공격하면 인도인을 선동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친일 인도정부를 세우겠다.'
고 약속했었으니 일본 군부가 가장 전략적으로 기대했던 요소였을 것으로 인도 독립세력
으로 부터 물자지원은 물론이고 영향력까지 행사할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니 이미 아웅 산
이 이끄는 독립 세력과 연합하여 영국군을 몰아낸 버마와 동일한 전략 선상에서 본 것입니다.
찬드라 보스는 어디까지나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란 논리로 영국과 전쟁중인 일본의
힘이라도 빌려 인도 독립에 투신한 거지, 일본의 침략전쟁과 학살에 동의하지
않았으니 아시아 국가중 유일하게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도 일본의 조선과 중국 침략을 비판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 산은 처음에는 지배자인 영국에 맞서 일본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양성
했으나, 일본의 가혹한 통치를 보고 오히려 이리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올 것 같아 영국
과의 협상 끝에 협력, 그리고 전후 미얀마의 독립을 약속 받으니 인도 역시 미얀마 처럼
영국과 협상하여 독립을 약속받고 영국을 지원하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찬드라 보세가 부릴수 있는 '인도 국민군' 병력은 실은 일본 군부가 결성한 것으로, 주로 말레이시아와
버마에서 일본군에게게 포로로 잡힌 인도군 출신 4만 3천 명이었는데 그러나 임팔 작전에 참여
했다가 굶어 죽거나 몰살당한후, 버마 방위를 위해 일본에게 이용당하는데 지친 그들은 결국 자원
부족과 열악한 지원에 대한 사기저하가 겹쳐서 모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거나 영국군에게 항복합니다.
전후 찬드라 보세의 인도 국민군 장병들이 전범이나 반역자 재판을 받을때, 그 변호를 담당한 사람은
20년간 변호사 영업을 쉬고있던 자와할랄 네루였으니 재판 당시 인도 여론은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그들은 분명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이라는 분위기였다고 하며, 네루 자신은 임팔작전
당시 영국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인도 국민군 출신들이 인도 군대에 입대하지 못하도록 지시합니다.
동부 정면에 제18사단을 배치하여 연합군의 진출을 막도록 하고 제33사단, 제15사단, 제31사단등
3개 사단으로 임팔을 침공하기로 결정하는데 보급은 트럭을 보유한 자동차 중대 160개, 말들을
이용하는 치중병 중대 60개, 그리고 5개 공병연대였으나 버마 방면군을 통과하면서 90개, 40개,
3개로 줄었고 다시 남방군을 거치면서는 26개, 14개, 2개로 더더욱 줄더니 드디어(?) 대본영에
제출될 때는 18개, 12개, 0개가 되는데 이는 임팔만 점령하면 보급은 모두 해결된다고 본 것이라?
육군성 군사과장 니시우라(西浦進) 대좌가 도조 히데키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으니 그때 도조가
물은 것이 유명한 6개 조항입니다. 1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2 현실성 있는 작전인가?
3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할 일이 생기겠는가? 4 버마 방어에 공백이 생기겠는가?
5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수 있는가? 6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때 막을수 있는가?
서부 정면에는 조지 기포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3개 사단과 기갑 1개 사단, 오드 윙게이트
장군의 공수부대 6개 여단, 북부에는 조지프 스틸웰 장군의 미군, 중국 국민혁명군 X군 3개
사단, 동부에는 웨이리황 장군의 중국 국민혁명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3방면으로 포위
태세를 갖추었고, 클레어 셰놀트가 지휘하는 중국 국민혁명군을 지원하는 미국인 용병들로
이루어진 제14항공대, 소위 플라잉 타이거즈를 비롯한 유력한 공군 부대도 공격준비를 마쳤습니다.
연합군은 레도 공로를 '도쿄로 가는 길' 이라 불렀으며 이 도로가 일본군 점령지를 가로질렀기 때문에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는' 작전을 펼쳐야 했고 스틸웰 장군은 태평양 방면 해상공세
에 호응하여 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중국군 90개 사단을 미국식 장비로 개편하는 작업도 추진
하고 있었으니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준비하면서 그 결행을 망설이고 있던 43년 9월말, 연합군
의 선봉부대는 후콩계곡의 북쪽에 나타나 계곡 일대를 정찰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와 마주칩니다.
후콩 계곡은 인도 국경을 따라 펼쳐진 동서 30~70 km에 남북으로 200 km나 뻗은 대정글지대로
우기에는 수많은 하천으로 급류가 흘러 도처가 늪과 연못으로 변해버리는 곳으로 협곡은 온갖
부패물에 독기와 코브라를 비롯한 독사, 도마뱀, 독거미, 전갈, 거머리들이 들끓으며주변의 산지
에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득실거렸으니 원주민들도 맹수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1943년 10월 30일, 일본군이 계곡에서 마주친건 중국군 제38사단 정찰부대였으니 이 정보를 입수한
무타구치는 즉시 제18사단 예하 제56연대를 급파하여 중국군 제38사단을 포위하려 했으니 1개 사단
병력을 1개 연대 병력으로 포위하려한 것으로 문제는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은 손입인 장군이 이끄는
X군 즉 미제 무기로 무장하고 미군 교관에게 훈련받았던 중화민국 육군의 최정예부대였다는 점입니다.
일본군 제56연대는 밀림의 중국군을 포위하여 압박해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전차와 중화기로
원통 진지(Admin Box)를 구축하여 공중보급을 받으면서 방어하고 있었으니 이 원형
진지는 영국이 고안해낸 전법으로서 종래와 같이 방어진의 일각에 구멍을 뚫고 돌입하여
분단한다는 전법은 먹히질 않았는데 특유의 반자이 돌격을 감행해 보았지만 결과는 뻔했습니다.
2월 19일, 프랭크 메릴 준장이 지휘하는 미군 제 5307 혼성연대 2900명이 전선에 도착했으니 메릴
부대는 영국군 윙게이트 병단에 자극을 받아 미국이 편성한 부대로 게릴라 훈련부대와 과달카날,
뉴기니의 실전부대와 미 본토에서의 지원병으로 편성된 특수부대였는데 카빈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바주카 등으로 무장한 이 부대는 버마 당나귀 700필에 군수물자를 싣고 현지에 도착했습니다.
스틸웰 장군은 그들을 반기며 자기 휘하의 부대와 합류시켜 마인칸 공격을 명했고 일본군
제18사단이 3월 5일을 기해 마인칸에서 철수하였으나 메릴 부대가 퇴각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은 340명의 환자를 등에 업고 정글속을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으니 후에 '메릴의 약탈자' 의 전훈을 살려 유명한 "그린베레" 가 탄생합니다.
윙게이트 병단의 공격으로 일본군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우호작전(ウ号作戦)이 개시되었으니
1. 제31사단은 남쪽에서 재빨리 국경을 돌파하여 북진,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임팔로 향한다.
2. 그동안 제15사단과 제33사단은 기습적으로 친드윈강을 도하, 국경으로 향한다. 3. 견제
당하고 있는 연합군의 허를 찔러 제15사단은 직선으로 임팔 동북부에 진출, 연합군을 포위한다.
4. 제31사단은 북진해 코히마를 점령, 북쪽에서 임팔로 향하는 연합군 증원부대를 저지한다. 5. 코히마
작전에 성공하면 제 31사단의 일부를 임팔의 주전장으로 돌린다. 6. 이 공략 작전은 20일 이내(!)에
끝내기로 하고 전체의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하되 그 중 제33사단의 행동 개시일은 3월 8일로 한다.
지도상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대정글을 통과해 코히마를 급습하여 영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신속하게 임팔을 공격한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현란한 보병기동을 보여주는 작전으로, 계획
대로 진행된다면 영국은 일본군의 양동작전에 걸려 코히마를 빼앗기고 임팔까지 포위섬멸
당할 위기에 놓였을 것인데 31사단은 친드윈강을 건너면서 소 125 마리가 있었지만 21일
후에 코히마에 도착했을 때는 단 5마리에 지나지 않았으니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뿐이었습니다.
영국 제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은 즉시 대비책을 마련했으니..... 우선 아캡 방면에 있는
제15인도군단 중에서 제5, 제7인도사단을 빼내어 임팔과 디마푸르에 파견하는 동시에
제33인도군단에서도 제2사단과 제50인도전차여단을 증파하는가 하면 제14군의 예비대
인도전차사단도 이 지역에 투입했으며 현지 제4군단에게도 임팔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제4군단 예하의 제17인도사단은 이미 일본군에게 퇴로가 끊겼고 제23인도사단도
우크룰 남쪽에서 포위당하자 제23인도사단은 암호문서 등을 소각한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일본군 제33사단의 사사하라 연대와 대치중인 제17인도사단은
좀처럼 퇴로를 발견할수 없었는데 개전 초부터 일본군 제33사단과 맞서 싸워왔습니다.
지난 2년 동안 30회 이상이나 교전한 경험 많은 베테랑 부대였기에 영국군 총사령관 해군
원수 마운트배튼 경도 부대의 탈출을 독려했으니 이때 제4군단장인 제프리 스쿤스
중장은 이 사단을 철수시키고자 기발한 구상을 했는데 제23인도사단 중 1개
연대만을 철수시킨후, 나머지 병력으로 제17인도사단의 구원 작전을 시작한 것입니다.
3월 14일, 토이톰 고지에 진을 치고있던 연대 철수지시가 내리자 트럭과 전차를 이끌고 임팔로 철수
를 시작했고, 철수행렬이 산허리를 거의 통과하고 있을때 일본군 정찰부대가 발견해 연대 본부에
보고하자, 연대장 사쿠마 대좌는 제33사단장 야나기타 중장에게 영인군이 총퇴각했다고 보고합니다.
그 말에 사단 사령부는 전선까지 이동했는데, 철수했다던 제17인도사단은 철수는 커녕
압도적인 포화를 퍼붓고 있었으니 전차포로 일본군 최일선 진지를 쑥밭으로 만드
는가 하면, 날아드는 보고는 '영인군의 증원부대가 계속해서 전선에 도착하고
있다.' 는 것뿐이었으니 일본군에 철수명령이 내려져 결국 영국군은 무사히 후퇴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 한국광복군 대원 9명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을때 영국군과
함께 바로 이 임팔 전투 당시 활동하였다고 하니 주로 심리전을 전담했으며, 포로의
심문이나 통역, 일본어 번역, 선전물 제작 등을 맡아 했으니...... 부대의 명칭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 이니 '인도 - 버마 전선의 공작부대' 라는 의미입니다.
임팔 - 코히마 전역에 파견된 IFBU 소령 알프레드 트루트웨인 소령의 기록에는 광복군 대원들
이 일본어 전단 작성뿐만 아니라 노래에도 해박하여 일본군의 향수병을 자극할 노래를 골라
틀었다 하니 실제로 일본 육군 15사단 소속 조선인 군속들이 선무공작방송을 듣고 단체
로 투항하거나, 육군 소위 한명이 소대원들 일부와 함께 항복하러 오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찬드라 보스는 패주하는 일본군과 함께 1945년 5월 방콕으로 돌아와 비행기 사고로 죽는데 벵갈을
중심으로 한 인도에서는 당시부터 오늘까지 보스를 파시스트로 보는데 반대하고, 인도의 독립
운동가로 인식하니 1945년 11월 델리에서 인도국민군을 재판하는 군법회의가 시작되자,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 1947년 8월 인도 독립으로 이어지는 촉발제가 되었습니다.
보스는 간디나 네루와 동등한 인도의 독립에 이바지한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니 출생지인 벵갈
지역에서는 보스를 영웅시하는 경향이 강해 한때는 영국령 인도의 중심이었고, 방글라데시·미얀마·
중국 등 여러 나라와 복잡하게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벵갈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간디와
대립한 달리트 (the dalits, 불가촉천민) 해방운동가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도 독립 영웅으로 간주됩니다.
인도 독립운동사에는 간디·네루 등과 영국의 지배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는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갈라서서
무슬림 중심의 파키스탄을 분리 독립시킨 무함마드 알리 진나와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데 무굴제국 이후
영국령 인도에 이르기까지 수백년간 같은 나라였던 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는 스스로 분단을 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