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량(臨界量, Critical Mass)의 법칙과 불교>
물리학에서 ‘임계(臨界)’라고 하는 단어는
어떠한 물리 현상이 어떤 기준에서부터 갈라져서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계를 의미한다.
‘임계(臨界)’에서 ‘임(臨)’은 어떤 사태나 일에 직면하다는 그런 뜻이고,
‘계(界)’는 경계(境界)를 의미하는데,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해
분간되는 한계를 말한다.
임계(臨界)의 한자적 의미는 경계에 다다른다는 뜻이다.
임계량(臨界量. critical mass)은 임계점(臨界點)과 비슷한 의미인데,
어떤 물질 또는 현상의 성질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 성질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경계가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물리학 용어이다.
핵분열의 경우, 임계량이란 핵분열 물질이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의 최소한의 질량을 말한다.
핵분열 반응은 연쇄반응이어서 그냥 반응시키면
너무 빨리 진행해서 폭발하고 만다.
그러므로 그 에너지를 이용하려면 반응속도의 조절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핵반응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원자로이다.
만일 그런 연쇄반응들이 통제받지 않고 찰나에 한꺼번에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핵폭탄이다. 하지만, 원자로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게 원천적으로 원자로의 모양새가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생겨날 중성자들의 수효를 철저히 관리할
완벽한 시스템들을 갖추고 있다. ‘임계’란 용어가 그래서 필요하다.
수소나 물과 같은 과학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의 행위에서는
임계점이 어디인지 쉽게 알 수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물을 끓이기 위해 섭씨 90도, 95도까지 정성을 들이다가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가스 불을 꺼버리듯이,
인간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인간은 자기 행위에서의 임계점이 어디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 사회의 경우, 국민들의 기본양심이 남아 있어서
국가사회가 그런 대로 지탱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무너져 기본양심이 임계량(臨界量) 이하로 낮아지게 되면
국가사회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예건대, 정부의 시책에 대한 불만으로 벌어지는 시위의 경우,
그것이 지나쳐 폭동으로 변하면서 아무 죄 없는 상가를 덮친다든지
길거리의 양민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엉뚱한 방향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 등이
바로 기본양심이 임계량 이하로 떨어진 그런 상태를 말한다.
또 다른 임계상태의 예는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같은 것이다.
동독의 거듭되는 경제불황과 사회불안이 임계상태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국민의 불만이 임계량을 넘어 폭발한 것이
결국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런데 작게는 우리 몸도 임계점을 가지고 있다.
임계점을 지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증상이 없을 수도 있다.
술을 마신다고 금방 간경화가 되는 것이 아니며,
담배를 피운다고 금방 폐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불량식품을 많이 먹고, 저질의 콜레스테롤을 섭취한다고 해서
금방 고지혈증과 동맥경화에 걸리거나 심근경색이 오는 것도 아니다.
임계점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두주불사의 주량을 자랑하며
마음껏 퍼마시고 주는 대로 받아먹는 호기를 부리다가
임계점에 이르면 한순간에 터진다. 요절하거나 급사하는 게
모두 그런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계량이 순기능의 측면도 있다.
임계량을 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 임계량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한다.
즉, 공부든 운동이든, 아니면 무엇이든 1등을 해본 사람은
‘임계량의 법칙’이 주는 짜릿한 희열을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다.
따라서 ‘터닝포인트’나 ‘임계량의 법칙’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대단히 순기능적인 측면을 살리는 데에 있다.
불교의 경우, 용맹정진 하던 수행승의 수행공덕이 무르익었을 때,
즉 임계량에 이르렀을 때, 어떤 계기,
예컨대 조사스님의 악! 하는 ‘할(喝)’을 듣는 순간,
아니면 굴러가던 돌이 대나무에 부딪쳐 나는 딱!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혹은 도반으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는 순간,
어떤 불경 구절을 접하는 순간,
그런 어떤 획기적 순간에 갑자기 대오하게 되는 것이다.
짧은 말, 손가락 하나, 한 송이 꽃으로도 얼마든지 눈을 뜰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을 누구를 위해서 했든 관계없이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것이 그 사람의 것이다.
그리고 그 찰나가 임계량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이를 일기(一機)라고도 한다.
즉, 어떤 가르침에 의해 마음의 기틀이 격발되는 경우가 있다.
할(喝)이나 방(棒)이나 꽃을 들어 보이거나
손가락을 들어 보이거나 하는 경우이다.
또 일경(一境)라고도 한다.
즉, 돌이 굴러가서 대나무에 부딪쳐 딱! 하고 나는 소리를 듣거나,
꽃이 핀 것을 보거나,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거나 하는 경우에 깨닫기도 한다.
또 일언(一言)이라 해서 경허 스님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다가 깨닫기도 한다.
또 일구(一句)에서도 깨닫는데,
경전이나 조사들 어록의 글을 보다가 문득 깨닫는 경우도 많다.
6조 혜능(慧能) 스님이나 영가(永嘉) 스님 같은 경우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인연으로 잠자던 마음이 격발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 반산 보적(盤山寶積) 스님이
남달리 발심(發心)하여 공부에 전력을 쏟던 중,
어느 해제 일에 다른 처소로 가던 길이었다.
걸음걸음 화두를 놓지 않고 가는데 우연히 상여꾼을 봤다.
상여꾼은 요령을 흔들면서 노래를 불렀다.
“청천(靑天)의 붉은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건만, 알지 못하겠구나,
이 혼령은 어느 곳으로 가는고?”라고 했다.
그러자 장막 아래에서 상주들이 일제히,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哭)을 했다. 이 곡 소리에 보적 스님은 확철히 깨달았다.
보적 스님은 몸과 마음이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길로 스승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를 찾아가 뵈니,
문답이 상통(相通)해 마조 선사의 인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반산 보적 스님이 눈을 뜨고 마음이 열리게 된 계기는
참으로 남다르다. 상여꾼의 장송곡에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라고 하는 광경을 보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뛸 듯이 기뻐하며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죽어서 가는 저승길은 어디인가?”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라고 하는 바로 그 소리가
보적 스님에겐 일구소식(一句消息)이었다.
드디어 임계량을 넘어선 것이다. 늘 참선만 하고 있던
보적 스님은 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상주의 곡소리에 문득 깨친 것이다.
흔히 간화선에서 화두(話頭)를 타파해서 대오한다는 말이 있다.
곧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했다가 드디어 화두를 타파하는 순간이
바로 수행의 공덕이 임계량을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이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중국 당나라시대에 유명한 선승
임제(臨濟義玄, ?~867) 스님이 황벽(黃壁希運, ?~850) 선사에게
몽둥이 세례를 당한 것이다.
임제 스님이 어느 날 자신의 스승인 황벽 선사에게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봤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 온지
수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큰마음 먹고 용기를 내어 스승에게 물어 본 것이다.
이에 스승인 황벽 선사는 다짜고짜 주장자로 패기 시작했다.
무려 20대를 맞은 것이다. 더구나 황벽 선사는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생긴 모습도 우락부락 했다. 그래도 임제 스님이 반응을 하지 못하자
또 두들겨 맞았는데, 세 차례나 맞았다.
그래서 한 차례에 20대씩 모두 60대를 맞은 것이다.
이처럼 영문도 모르고 맞은 임제 스님은 “왜 때렸을까?” 하고
몇 달을 고민하다가 선배 스님에게 가서 이제 딴 곳으로 가봐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선배 스님이 먼저 황벽 선사의 처소에 이르러 말했다.
“법을 여쭈러 왔던 후학(임제)은 아주 여법합니다.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해 스님께 들리면 방편을 써서
후학을 잘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잘 깎고 다듬어서 한그루의 큰 나무가 된다면
천하 사람들을 위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게 될 것입니다.”
임제 스님이 가서 황벽 선사께 하직인사를 드리자 황벽 선사가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반드시 대우(大愚) 스님을 찾아가도록 하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을 해 주실 것이다.”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에게 이르자 대우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황벽 선사의 처소에서 왔습니다.”
대우 스님이 다시 물었다.
“황벽 선사는 어떤 말을 하시던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대의를 물었다가 세 번을 얻어맞았습니다.
저에게 어떤 허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대우 스님이 말했다.
“황벽 선사가 이렇게 노파심을 내며 너를 위해 정말로 정성을 다해 가르쳤건만
너는 나에게까지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가?”
임제 스님이 이 한마디 말에 크게 깨달았다.
드디어 임계량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 원래 황벽 선사의 불법도 별 것 아니었군요.”
그러자 대우 스님이 멱살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 오줌싸개 같은 놈아. 조금 전에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말하더니,
이제 와서 도리어 황벽 선사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다니,
너는 도대체 무슨 도리를 봤느냐. 빨리 말해라. 어서 빨리 말해봐.”
그러자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 쥐어박았다.
이에 대우 스님이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밀치면서 말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내가 간섭할 바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임제 스님은 다시 황벽 선사에게도
돌아가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옛 선승들이 후학을 지도함에 할(喝)이나 방(棒)을 쓴다든지,
구지(俱指金華) 스님처럼 손가락을 세우는 등은
모두 후학들의 수행의 공덕이 임계량을 넘어서게 하려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