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읍의 모습(國城) |
高麗自唐以前, 蓋居平壤. 本漢武帝所置樂浪郡, 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 以唐志考之, 平壤城乃在鴨綠水東南, 唐末, 高麗君長, 懲累世兵革之難, 稍徙而東. 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矣. 其城周圍六十里, 山形繚繞, 雜以沙礫, 隨其地形而築之. 外無濠壍, 不施女墻, 列太上御名延屋如廊廡, 狀頗類敵樓. 雖施兵仗, 以備不虞, 而因山之勢, 非盡堅高, 至其低處, 則不能受敵, 萬一有警, 信知其不足守也. |
고려의 도읍은 당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에 있었다. 평양은 본래 한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과 당 고종이 세운 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당지(唐志)]를 살펴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하였는데, 당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 갔다. 지금 왕성은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 옛 평양 지역이 아니다. 이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밖에 참호와 성가퀴를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기를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지켜 내지 못할 것이다. |
外門十二, 各有摽名. 舊誌纔知其七, 今盡得之. 正東曰宣仁, 舊不見名, 止曰東大門, 曰崇仁, 舊曰東門, 曰安定, 舊曰須恤, 乃麗人方言也, 東南曰長覇, 正南曰宣華, 舊不見門, 曰會賓, 曰泰安, 舊名貞觀, 今易此名, 西南曰光德, 舊曰正州, 亦通其路耳, 州郡非門名所宜, 正西曰宣義, 曰狻猊, 正北曰北昌, 舊名崧山, 特登山之路, 非本名也, 東北曰宣祺, 舊名金郊, 今易此, 西南隅, 王府宮室居之, 其東北隅, 卽順天館, 極加完葺. 西門亦壯麗, 蓋爲中朝人使設也. 自京市司, 至興國寺橋, 由廣化門, 以迄奉先庫, 爲長廊數百間. 以其民居隘陋, 參差不齊, 用以遮蔽, 不欲使人洞見其醜. 東南之門, 蓋溪流至巳方, 衆水所會之地, 其餘諸門, 官府宮祠道觀僧寺別宮客館, 皆因地勢, 星布諸處. 民居十數家, 共一聚落, 井邑街市, 無足取者. 總其建國大槩而圖之, 其餘則互見於別篇. |
열두 외문(外門)마다 각각 표시한 이름이 있는데, 옛 기록에서는 그 중 겨우 일곱 곳을 말했으나, 지금은 다 알 수 있다. 정동(正東)에는 선인(宣仁), 숭인(崇仁), 안정(安定)이 있고, 동남(東南)에는 장패(長覇)가 있고 정남(正南)에는 선화(宣華), 회빈(會賓), 태안(泰安)이 있고, 서남(西南)에는 광덕(光德)이 있고, 정서(正西)에는 선의(宣義), 산예(狻猊)가 있고, 정북(正北)에는 북창(北昌)이 있고, 동북(東北)에는 선기(宣祺)가 있다. |
옛 금교(金郊)라 불렸던 곳은 지금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는데 서남 모퉁이에는 왕부, 궁실이 있다. 그 동북 모퉁이에 있는 것이 곧 순천관(順天館)인데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다. 서문(西門)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니, 중국에서 온 사신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경시사(京市司)에서 흥국사(興國寺) 다리 사이와, 광화문에서 봉선고(奉先庫) 사이에 긴 행랑집 수백 칸을 만들었다. 민중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려서 사람들에게 누추함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
동남쪽 문은 대개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니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요, 그 나머지 모든 문과 관부, 궁사, 도관, 승사, 별궁, 객관도 모두 지형에 따라 여러 곳에 별처럼 널려 있다. 백성들의 주거는 열두어 집씩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고, 바둑판 같은 시가지는 달리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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