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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력회 원문보기 글쓴이: 德庵
현대판 카노사의 굴욕인가, 종교권력에 무릎꿇은 대통령
한장의 사진을 보며
한 장의 사진이 모든 진실을 말해 주는 경우가 있다. 인터넷 뉴스에서 본 대통령의 무릎꿇은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가 국가조찬기도회(2010-03-03)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
출처 http://www.beopbo.com/news/view.html?section=1&category=81&no=64829
뉴스에 따르면 이명박대통령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부인 김윤옥씨와 함께 무릎을 꿇은 채 ‘합심기도’했다고 한다. 이는 한기총회장목사의 인도에 따른 것이라 한다.
불자들은 작년 봉은사 사태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 장로정권이라 불리우는 현 정치권력이 불교를 대표하는 수장을 불러 놓고 좌파주지 척결을 당부한 것이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결국 봉은사 직영결정을 내리고 주지스님을 교체하였다.
이는 불교가 정치권력에 명백히 ‘굴종’하고 ‘굴복’한 치욕적인 사건으로 불자들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짓밟아 버린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그 정치권력의 수장이 교회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사진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교회권력은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권력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일까.
불자로 살아가기가
우리나라에서 불자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끊임없이 유일신종교로 부터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사찰에 방화를 하거나, 불상을 훼손하는등 직접적인 공격이 사회의 이슈가 되었고, 최근에는 사찰의 안 마당과 안방에 까지 들어와 기도하는 가 하면 자신들의 영토가 되었음을 선포 하기도 하고, 절집에 들어와 확성기를 들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교회앞을 지나칠려면 미리 진을 치고 있는 전도사들과 맞닥뜨려야 하고, 길거리와 전철등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예천불지”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피할 수 없다. 또 축구장에서는 ‘기도세레모니’, 연말 연예인들의 시상식 때는 ‘시상소감’등 공공장소나 방송에서도 전도하는 이들을 보기 싫어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사회 구석 구석에는 선교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도 마주치며 살아가야 한다. 불편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나 갈 뿐이다. 하지만 갈수록 그 도가 지나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무릎꿇고 기도 하는 사진을 보면 우리나라는 완전한 기독교국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 같고, 이제 교회가 가장 힘이 센 집단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현대판 카노사의 굴욕인가
지난 1월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조성택교수는 “지금 전세계적으로 불교는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와 정반대이다.
한국에서 불교는 오래 되고, 낡고, 전근대적 이미지를 주어 계승의 대상이라기 보다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경향이 백여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계속되는 것 같다. 반면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문명의 종교, 개화의 종교 이미지를 주었고, 한편 미국의 영향력하에 한국에서만큼은 최전성기를 구가 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우리와 반대라 한다.
구미에서 기독교나 천주교는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그렇듯이 오래 되고, 낡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으로서 불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서구에서의 불교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불교는 우리나라에서 보는 대승불교일까.
자료에 따르면 구미 각국에서 유행하는 불교는 대승불교 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잘 계승하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가 주류라고 한다. 이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만큼은 대통령도 꿇어 앉힐 정도로 그 힘이 막강하다. 마치 중세시대에 카놋사의 굴욕을 보는 것 같다.
카노사의 굴욕
사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186264
카놋사의 굴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카놋사 성에 머물고 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눈발속에서 3일 낮 3일 밤을 꼬박 새면서 파문철회를 요청한 기도를 말한다. 우리나라 대통령 역시 여의도 S교회의 J목사의 ‘대통령 하야’ 발언이 나온 영향이어서일까 기도회에 참석하여 무릎꿇은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마치 유럽의 중세시절을 보는 듯한 종교권력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리고 왜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타 종교를 공격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불교TV에서 본 김종욱 교수의 강의를 참고 하였다.
종교권력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서양에서 기독교의 시작은 로마시대 부터이다. 로마시대에 들어온 기독교는 로마가 멸망하게 된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로마가 멸망하고 나서 근 천년간 ‘로만가톨릭’세상이 된다. 이른바 천년 왕국이다. 이 천년 동안 기독교 신학은 비약적으로 발전 하게 된다. 그 이전 까지만 하여도 매우 쉽고, 어렵지 않고, 단순한 종교가 기독교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과 만나면서 어려워 졌다는 것이다. 아니 ‘어렵게 할 필요성이 있어서’ 어렵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어려워지고 신학으로서 체계가 잡혀 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플라톤 철학에 힘 입은 바가 크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대로 신학에 적용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론 이란 무엇일까.
이데아는 서양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이라고 한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미국의 화이트헤드가 말하기를 “서양의 철학사는 모두 플라톤 사상의 각주일 뿐이다”라고 말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서양의 사상은 모두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기반 하기 때문에 플라톤 사상의 ‘껍질’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데아는 보통 ‘원형’으로 설명 된다. 보통 ‘원’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원본과 복사판을 보면
기하학적으로 원은 완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실재로 그려진 원은 ‘원본’으로서 원에 절대 같아 질 수 없다. 가까워 질 수는 있어도 원본 그 자체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본 그 자체를 이데아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아는 ‘본체’이고 ‘실재’하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본체가 드러난 것을 ‘현상’이라고 보는데 일종의 ‘복사본’이라 할 수있다. 이런 복사판은 ‘가상적’이고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
원자체 |
IDEA |
본체 |
실체 |
보편 |
완전 |
그려진 원 |
COPY |
현상 |
가상 |
개별 |
불완전 |
이런 이데아 이론은 신을 설명하기에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차용하여 중세 기독교신학을 만들어 낸다. 즉, 이데아 대신에 신을 집어 넣어 설명한 것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신이 실재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그런데 왜 그들은 신의 실재를 설명하려고 하였을까. 그 것은 신이 진짜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신이 전능하다면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있을 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신의 존재를 굳이 증명하려고 중세 천년동안 끊임 없이 시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것도 유한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상대로 신의 실재를 증명하려 한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중세 천년이 끝나고 근대가 시작 되면서 그만 두게 된다. 그 대신 서양철학자들은 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 보다 인간의 자아를 탐구 하는데 더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근대말에 이르러 신을 죽여 버리게 된다. 그런 유명한 선언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이다. 니체 이후 현대철학에 있어서 더 이상 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한다.
왜 서양 철학자들은 신의 실재를 증명 하다 왜 신을 죽이게 되었을까. 바로 그것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신을 만들었고,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용도폐기를 선언 한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이기 때문이다.
환화(幻化)의 예를 들면
완전하고 영원불변하고 실재 하는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보았다. 중세신학에서는 이런 이데아를 신으로 대체 하였다. 그러나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이데아도 마음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즉, 영원불변하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보는 신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신을 전제로 성립되었다. 신이 없으면 이 세상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고 허전 할 것 같아 보지만 신 없이 성립한 종교가 불교이다.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종교이다. 이와 같이 신이 없이도 종교가 성립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보는 신은 실재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좀 더 심하게 표현 하면 마음장난이라는 것이다. 그런 좋은 예가 환화(幻化)이다.
환화는 실체가 없는 것을 현재에 있는 것처럼 환술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화가가 그럴듯한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구속당하는 것을 말한다.
신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신을 만들어 놓고 철저 하게 거기에 종속 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신의 특징은 무엇일까.
기독교의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어떤 개념일까. 예수당시의 작은 부족에서 출발한 ‘소박한 신’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접목 하면서 대변화를 겪게 된다. 이데아론의 본체와 실재와 보편성에 접목 되면서 그 신은 최고의 원인을 가지는 ‘창조신’이 되고, 항상 존재하는 ‘절대유’가 되고, 오로지 하나로서 존재 하는 ‘유일신’이 되는 것이다. 작은 부족국가의 신이 이데아론을 만나면서 ‘날개’를 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데아론 |
발전 |
기독교의 신 | ||
본체 |
à최고의 원인à |
창조신 |
완전 충만 |
진리 그자체 |
실재 |
à항상존재à |
절대유 |
선 그자체 | |
보편 |
à유일자à |
유일신 |
미 그자체 |
표에서 절대유(有)라는 것은 ‘존재 그 자체’를 말한다. 즉 ‘무(無)’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 없이 ‘항상 있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존재가 보장’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하고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또 선 그 자체임과 동시에 미 그 자체이다.
이와 같이 완전한 신을 향해 신의 존재에 다가 가고자 하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이다. 어떻게 다가 간다는 것일까. 창조주가 피조물인 인간에게 부여한 ‘영혼’을 통해서 이다. 영혼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부여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신의 복사판인 인간이 신을 닮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형인 신과 절대로 같아 질 수 없다. 이런 복사판으로의 인간이 신을 향하여 닮아 가고자 한 대가로 위임 받은 것이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이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전지하고 전능한 신에 의하여 이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이전의 서양에서는 어떤 신관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스철학의 신관을 보면 그리스인들은 이 세상이 창조 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없던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 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리스인들은 이세상이 ‘제작’ 되었다고 믿었다. 누구에 의하여 제작 되었을 까. 그 제작자를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 부른다. 목수라는 뜻이다.
목수는 재료와 설계도만 있으면 집을 지울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에서 ‘질료’와 ‘형상’만 있으면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이미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논리의 파격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인 것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면 결론은 있는 것은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에도 원인이
이렇게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은 그 시작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또 그 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독교의 세계관은 유시유종(有始有終)인 것이다. 이런 유시유종의 특징은 무엇일까. 유시유종의 특징은 무한소급을 불인정 한다는 것이다. 또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교는 이런 유시유종을 인정 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최고의 원인인 창조주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시유종이 있을 수 없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연기법적인 ‘순환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이를 표로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
유시유종(有始有終) |
무한소급불인정 |
직선적 시간관 |
불교 |
무시무종(無始無終) |
무한소급인정 |
원환적 시간관 |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율’을 바탕으로 한다. 기독교 역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단 하나의 원인은 ‘그 분’을 말한다. 즉, 이세상을 창조한 신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인과율을 제한적으로 사용 하는 것을 말한다. 창조주 자신의 원인만 빼 버린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를 인정 하지 않는다. ‘그 원인에도 원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원인과 원인이 바로 ‘연기(緣起)’이다.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창조신을 인정 하지 않으며, 설령 그런 창조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연기의 법칙에 따른 신일 뿐이라고 말한다.
‘두 명의 신’이 존재
기독교의 창조주를 ‘선 그 자체’라고 한다. 이 말 뜻은 ‘악이 없다’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악은 분명하게 존재 한다. 그렇다면 그 악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크게 세가지로 추론 해 볼 수 있다. 즉, 신에게서 왔거나, 악마에게서 왔거나, 인간에게서 왔거나 이 세가지 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런데 신은 선 그자체이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올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인간과 악마 밖에 없다. 먼저 인간을 보면 ‘원죄’가 있다.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기독교에서 말하기를 ‘창조주가 세상과 사물 창조 하였지 인간의 행위까지 창조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악이 시작 된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 이전에 ‘선악이 먼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악은 인간에게서 시작 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악마밖에 없다.
악마는 누가 만들었을까.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을 설명 하기 위해서는 악마도 ‘필요’ 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세상에는 ‘두 개의 신’이 존재 한다. 즉 선신과 악신이다.
선신과 악신 둘중 누구를 믿어야 할까. 당연히 선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지구상에 악신을 믿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 왜냐 하면 악을 응징하고 악을 콘트롤 하려면 악신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신에게 악은 없고 악이 그 어디에도 소속 되는 것이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악신을 믿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서
기독교에서 신을 위하여 인간의 할 일은 무엇일까. 신을 닮아 가려는 인간이 해야 할일은 ‘악을 제거’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신은 ‘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의 제거는 절대적(絶對的, absolute)이다. 이 말은 ‘절상대(絶相對)’라는 말과 같다. 상대를 ‘끊어 버리는’ 것이다. 선과 악중 맞은 편에 있는 악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선악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만 남게 될 것이다. 그 선이란 무엇일까. 그선은 그들에게만 좋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나라는 아(我)가 철저 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런 절상대(絶相對)을 부정 한다. 그 대신 절대립(絶對立)을 주장 한다. 이 말은 ‘대립을 끊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절대는 악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 그 자체를 제거 하는 것이다. 즉, 선악 이분법적인 사고를 제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도 생각 하지 않고, 악도 생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다. 싸움이 아니라 화(和)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절대 |
절(상)대 (絶相對) |
악을 끊어 버리는 것 |
싸움, 전쟁 |
불교의 절대 |
절대(립) (絶對立) |
선악 이분법적인 사고를 제거 하는 것 |
화목, 평화 |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선에 의한 악의 응징의 역사 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악을 제거 하기 보다 선악을 넘어 서고자 하였다. 바로 이런 점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반대 되는 것이고, 현대철학이 불교와 가면 갈수록 가까워지는 이유이다. 이상은 김종욱 교수의 불교tv의 강의를 요약 정리 한 것이다.
절대(absolute)와 오직(only)
김종욱 교수의 강의내용으로 보아 기독교는 절대(absolute)를 추구하고 오직(only) 한 분만을 믿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나 진리는 모두 절상대(絶相對)가 되고 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신학은 중세시대에 플라톤의 이데아이론과 접목되어 형성된 것으로서 본래 기독교의 소박하고 단순한 가르침과 크게 변질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불교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나 오늘 날 볼 수 있는 대승불교나 밀교, 선불교등 다양한 불교로 갈라져 나간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질과 멀어졌을 때 회귀본능이 일어난다. 처음으로 되돌아 가고 싶은 것이다.
불교 역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멀어졌을 때, 심지어 정반대의 교리를 접하게 되었을 때 뒤를 돌아 보게 되는데, 오늘날 왜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수행법이 유행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 한다. 아무리 새로운 해석방법이 나오고, 새로운 교파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오래 가지 못하고 당대가 지나면 모두 사라지는 이유는 종교의 보수본능 때문이라 한다.
초기불교가 유행하는 것 역시 종교의 보수본능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세시대에 변질된 기독교가 역시 본래의 가르침대로 회귀한다면 ‘절대(absolute)’나 ‘오직(only)’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되어, 지금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종교가 권력화되고, 또 남의 종교의 안방에서 기도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2011-03-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