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0월 8일, 총독부 청사에서 조선사편수회 첫 회의가 열렸다. 닷새 뒤 동아일보 1면에 '조선사는 7시대로 구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삼국 이전부터 갑오개혁까지 일곱 시대, 사료 수집 2년에 원고 작성 4년, 필사 인원만 20만 명이 필요하리라는 전망까지. 신문은 사업의 규모를 담담하게 전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서늘하다. 식민 권력이 한 민족의 역사 전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재단하겠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총독부는 1915년 중추원을 앞세워 '조선반도사' 편찬에 나섰다. 한민족의 전 시대를 꿰는 통사를 만들겠다는 기획이었는데, 편찬 요지에 목적이 노골적으로 적혀 있다.
조선인을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이끌기 위해서라고.
제목의 '반도' 두 글자도 우연이 아니다.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던 민족의 활동 무대를 반도 안에 가두겠다는 공간 설계가 이름에 먼저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획은 좌초한다. 1919년 3·1운동이 보여준 사실은 분명했다. 역사책 몇 권으로 동화시키기에 이 민족의 뿌리는 너무 깊었다.
그래서 총독부는 전략을 바꾼다.
서술에서 수집으로.
1922년 12월 훈령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고, 1925년 6월에는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로 격상시켰다.
총독 직속 독립 관청에, 회장은 내내 정무총감.
식민 통치의 2인자가 역사 편찬 기구의 수장을 겸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사업의 성격은 설명이 끝난다. 실무를 지휘한 '구로이타 가쓰미'는 일본 고문서학의 권위자였다. 사료 비판이라는 근대 역사학의 무기를 쥔 전문가가, 그 무기를 식민 통치의 도구로 벼린 셈이다.
여기서 흔한 반문이 나온다. '조선사'는 해석을 붙인 역사서가 아니라 사료를 모은 자료집인데, 그것도 왜곡이라 부를 수 있느냐고. 심지어 계획서의 첫 시대는 '삼국 이전'이었다. 상고사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느냐는 반박도 가능하다.
바로 그 지점이 이 사업의 가장 정교한 대목이다. 편수회는 '편년체'를 채택하고, '연·월·일'이 문헌으로 확정되는 기록만 싣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기준을 통과시키면 단군 관련 기술은 사실(史實)이 아닌 전승으로 격하되어 걸러진다.
목차의 칸은 열어두되 내용이 들어갈 수 없게 만드는 방식.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체에 거르기만 했다. 무엇을 사료로 인정할지 정하는 권한 자체가 해석 권력이며, 사료의 선별이 곧 서술이라는 것을 이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실증이 공정한 잣대였는지는 제국이 스스로 증명했다.
같은 논리를 일본사에 들이댄 학자가 있었다. 와세다의 '쓰다 소키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神代) 기록을 실증적으로 비판했다가 1940년 저서 네 권이 발매금지되고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출판법 위반 기소까지 당해, 1942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진무 천황의 신화는 국사 교육의 근간으로 보호받고, 단군의 전승은 실증의 이름으로 잘려나갔다. 실증의 칼이 위를 향하면 처벌받고 아래를 향하면 장려됐다면,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방법을 골라 쓴 손이다.
'반도사관'과 '만선사학'이 겉보기에 상반된 논리인데도 나란히 동원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대를 반도로 좁히든 만주에 붙여 종속시키든, 결론은 하나로 수렴한다.
조선사는 스스로 발전한 적이 없다는 타율성의 낙인.
일본은 중앙이고 조선은 지방이라는 제국사의 위계가 이 자료집의 숨은 뼈대였다.
그 회의실 안에 균열이 없지는 않았다.
"숙신은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발해도 조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편수회 회의록에 남아 있는 육당 최남선의 질문이다. 1928년부터 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한 그의 이력은 훗날 친일 행적으로 기록됐고, 그 평가는 정당하다. 다만 기록은 그가 회의석상에서 조선사의 상한선을 놓고 다퉜다는 사실도 함께 전한다.
단군 연구에 평생을 건 학자였기에 가능한 문제 제기였다. 안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편수회는 실증의 이름으로 고조선을 잘라냈고, 최남선의 질문은 회의록 속 몇 줄로만 남았다. 협력과 저항이 한 사람 안에서 뒤엉킨 이 장면이야말로 식민지 지식인의 초상이다.
1933년까지 내겠다던 '조선사'는 1938년에야 35권으로 완간됐다. 조선 팔도는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뒤져 고문서와 문집, 고지도와 탁본을 거둬들인 결과였다. 그 수집이 남긴 사료적 유산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흩어져 소실됐을 기록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공로론은 무엇을 모았느냐만 묻고, 누가 선별의 권한을 독점했느냐는 묻지 않는다. 편수회가 해산된 1946년 이후 그 방대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신인 '국사관'으로 넘어갔고, 해방 후 한국사 연구는 오랫동안 이 사료집이 그어 놓은 밑금 위에서 출발해야 했다. 사료를 장악한 자가 서술의 출발선을 정한다.
조지 오웰이 '1984'에 새긴 당의 강령 그대로다.
"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대한민국은 이 문제에 뒤늦게나마 법으로 답했다. 2004년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제2조 제20호에서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한다.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조사하고, 기록하고, 사료로 편찬해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남기기 위한 법이다. 역사 왜곡에 부역한 일이 형벌 대신 영구한 기록으로 심판받는 셈인데, 어쩌면 그편이 더 무겁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했다. 조선사편수회는 그 투쟁이 전장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사료 창고에서, 편찬 원칙을 정하는 회의석상에서, 각주 하나를 놓고도 투쟁은 계속된다.
1925년 10월의 그 담담한 신문 기사를 다시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 년 전 그들은 20만 명을 동원해 우리의 과거를 필사하려 했다.
한번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 데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든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확인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