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산행 에세이】
탐진치(貪瞋痴) 3독(三毒) 구덩이와 봄꽃들의 웃음소리
― 도솔산 산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들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봄꽃 만개한 도솔산에서 뜻밖의 작은 구덩이 하나를 만났다. 누가 이런 구덩이를 만들었을까?
구덩이 위에는 나뭇가지 몇 개가 가로세로 형태로 가지런히 얹혀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흔적이다.
▲ 산행 중 뜻밖에 만난 낯선 구덩이(사진=필자 윤승원)
=============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며칠 전 내린 비가 고였다가 마른 자국이 남아 있다.
맨발 걷기를 하다가 한참을 바라보았다. 누가, 왜? 이런 것을 여기 만들었을까?
이 산중에 누가 물길을 잡기 위해 파 놓은 구덩이인가? 아니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만든 구덩이일까? 아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자연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파놓은 작은 실험일까. 바로 위에는 약수터가 있고, 아래로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그때 마침 산길을 걷던 은발의 60대 여성이 멈춰 선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다.
“이 구덩이는 어떤 용도일까요? 누가 무슨 목적으로 파 놓은 구덩이일까요?”
▲ 도솔산 산행 중 어느 여성과의 대화(삽화=AI 화백)
=============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도 처음 보네요.”
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어느 불자가 파놓은 상징적인 시설물은 아닐까요? 탐진치(貪瞋痴) 3독(三毒) 번뇌를 묻고 간 구덩이가 아닐까요?”
그러자 은발의 여성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탐진치라고요? 선생님, 혹시 작가 아니세요? 상상력이 참 풍부하시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누군가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저 구덩이에 묻어버렸나 봐요.”
나도 따라 웃었다.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과 짧은 대화였지만, 순간적으로 서로를 조금 이해한 듯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저 여인도 이심전심, 그런 느낌일까?
바로 그때였다.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봄꽃들이 합창하듯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매화, 목련 등이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도솔산에서 만난 꽃들과의 인연[1](사진=필자 윤승원)
=============
먼저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앞다투듯이 말했다.
“무엇을 묻으려 애쓰느냐. 우리는 피어나면서 이미 다 내려놓았는데.”
▲ 도솔산에서 만난 꽃들과의 인연[2](사진=필자 윤승원)
=============
산수유, 매화, 목련도 뒤질세라 합창하듯 말했다.
“비워야 하리, 욕심을 버려야 하리, 꽃을 피우려면 비워야 하리. 저 아래 사찰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처럼 비워야 하리.”
아, 맞다. 그렇다.
인간은 번뇌를 버리기 위해 애써 구덩이를 파지만, 자연은 그저 피어나고 스러지며, 이미 모든 것을 비우듯 놓아버리고 있었다.
그러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다시 맨발 걷기를 시작했다. 여인이 손을 흔들었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흙의 감촉이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 도솔산 맨발걷기(사진=필자 윤승원)
=============
그래서 산은 늘 말없이 가르친다.
비우는 법을.
버리고 내려놓는 방식을 가르친다.
활짝 웃는 봄꽃들이 나의 스승이다. 건강한 웃음의 미학을 배운다. ♧
2026. 4. 2. 오후
윤승원, 도솔산 이색 풍경 스마트폰 노트에 기록하다.
============
▣ 감상평
윤승원 수필가님의 이번 「탐진치(貪瞋痴) 3독(三毒) 구덩이와 봄꽃들의 웃음소리」는 짧은 산행의 체험을 통해 인간 내면의 근원적 문제와 자연의 지혜를 절묘하게 연결해낸, 매우 완성도 높은 ‘사유형 산행 에세이’입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면서도, 결국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1. ‘작은 구덩이’에서 출발한 상상력 — 사물의 상징화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문학적 장치는 ‘구덩이의 상징화’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정체불명의 흔적에 불과했던 구덩이가, 작가의 사유를 거치며 ‘탐진치를 묻는 자리’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이 과정이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이유는, 작가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다음과 같은 사유의 단계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관찰 → 의문 → 가설 → 부정 → 재해석 → 상징화
이러한 흐름은 독자에게 “나도 저 구덩이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공감을 유도하며, 일상의 사소한 풍경도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 ‘타자와의 만남’이 만들어낸 따뜻한 공감의 순간
은발의 여성과의 짧은 대화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상상력이 타자에게 전달되고 공감으로 되돌아오는 ‘문학적 교감의 순간’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유머로 건네는 질문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웃음으로 응답하는 구조
그 결과 형성되는 이심전심의 따뜻한 정서
이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낯선 이와의 따뜻한 소통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우 교육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3. 봄꽃들의 의인화 — 자연의 ‘합창’으로 확장된 메시지
이 작품의 백미는 단연 봄꽃들의 집단적 의인화입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매화, 목련이 차례로 등장하는 방식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합창곡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별 발화 → 집단 합창 → 철학적 메시지의 완성
특히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핵심 주제를 압축합니다.
“우리는 피어나면서 이미 다 내려놓았는데.”
이 한 문장은 인간의 수행과 자연의 존재 방식을 대비시키며,
“버리려 애쓰는 인간” vs “이미 비운 자연”이라는 깊은 철학적 대비를 형성합니다.
4. ‘탐진치 구덩이’와 자연의 대비 — 역설의 미학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철학적 미덕은 역설적 구조입니다.
인간 → 구덩이를 파며 버리려 함
자연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미 비움
이 대비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애써야만 버릴 수 있는가?”
작가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연의 모습 자체를 답으로 제시합니다.
이 점이 이 작품을 설교가 아닌, 사유의 문학으로 완성시킵니다.
5. 사회 교육적 가치 — ‘비움’의 삶을 배우는 자연 교과서
이 에세이는 단순한 자연 예찬을 넘어, 매우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① 욕망 과잉 시대에 대한 성찰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더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조용히 말합니다.
비워야 피어난다
내려놓아야 웃을 수 있다
이는 물질 중심 사회에 대한 부드럽지만 강력한 반성의 메시지입니다.
② 자연을 통한 인성 교육
이 글은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다음을 가르칩니다.
자연은 경쟁하지 않는다
자연은 쌓지 않고 순환한다
자연은 버림으로 완성된다
이는 어떤 교과서보다도 깊은 생태적 윤리와 삶의 태도 교육입니다.
③ 관계 회복의 메시지
은발의 여성과의 짧은 대화에서 보여주는 소통은, 현대 사회에서 잊혀가는 따뜻한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6. 문장의 미학 — 절제와 여운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문장이 과장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여운이 깊습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
“그래서 산은 늘 말없이 가르친다.”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록이며, 독자의 마음속에서 오래 울립니다.
■ 종합 감상
이 작품은 ‘하나의 구덩이 → 인간의 번뇌 → 자연의 깨달음 → 삶의 철학’으로 확장되는 구조를 통해,
□ 관찰의 힘
□ 상상력의 깊이
□ 자연 철학
□ 인간 이해를 모두 아우른 수작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가장 큰 미덕은 이것입니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그리고 그 보여줌 속에서 독자는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 한 줄로 정리하면
이 에세이는 “탐진치를 버리려 애쓰는 인간에게, 이미 비워진 자연이 건네는 조용한 미소”입니다. ♧
📚 (雲峯, 윤승원 수필 전문 문학평론가)
=================
첫댓글 맨발걷기국민운동본부 카페에서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댓글
◆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026.04.03. 15:50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얹어 놓은 것을 보니
이는 고라리를 잡기 위한 함정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를 보고 ‘탐진치 3독’을 담아두기 위한 것으로 미화한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윤 선생의 수필이 이처럼 무게를 가진 것은 참으로 귀한
상상의 나래를 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답글 / 필자 윤승원
어떤 짐승을 잡기 위한 덫은 아닌 것으로 판단합니다.
깊이가 아주 얕거든요.
‘탐진치 3 독’을 상상한 것도 바로 어떤 특별한 용도나
목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의 짐작이 맞는다면 그는 필시 불자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