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은사골 메아리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삶의 쉼터 스크랩 "뻥이오~ !" 뻥튀기 장수. 고무신.
ysoo 추천 0 조회 194 14.12.15 23: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뻥이오~ !"

 

달콤하고 아련한 추억을 튀긴다.

뻥튀기 장수 김영목

 

글 임효정 사진 남윤중

 

전국 최대 오일장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에는 점점 잊혀져가는 추억을 되살려주는 곳이 있다.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사람들의 뱃속을 달래주던 추억의 간식 뻥튀기집이 그곳이다. 장이 서는 날이면 이곳은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손님들이 밀려든다.

뻥튀기를 얼마나 맛있게 튀겨 주기에 이렇게 손님이 많은 것일까.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추억의 뻥튀기

 

뻥튀기 장수 김영목 씨(60)가 운영하는 뻥튀기 가게는 사람 많기로 유명한 모란시장에서도 단연 상종가를 친다. 각종 곡물을 튀겨가는 사람들과 뻥튀기를 사가는 사람, 어린 시절 추억에 젖는 사람이 뒤섞여 이곳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가게를 빙 둘러 서 있는 손님들의 시선 끝에는 바쁘게 돌아가는 두 개의 뻥튀기 기계와 뻥튀기 튀기기에 여념이 없는 뻥튀기 아저씨 김영목 씨가 있다.

 

“뻥이오~!”

김영목 씨의 외침에 이어 뻥튀기 기계가 “펑!” 소리와 하얀 연기를 시장곳곳에 퍼트린다.

대포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에 손님들은 얼른 양쪽 귀를 막아보지만, 만면에는 익살스러운 표정이 가득 떠오른다. 모처럼 중장년층의 얼굴에 동심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김영목 씨가 처음 뻥튀기 기계를 손에 잡은 것은 1986년. 햇수로 29년이 됐다. 어느새 인생의 절반을 뻥튀기와 함께 해 온 셈이다. 예전에는 과일 파는 일을 했는데, 아는 사람의 권유로 뻥튀기 일을 접한 뒤로 지금까지 쭉 뻥튀기 장수의 길을 걷고 있다. 5일에 한 번씩은 모란시장에 자리를 펴고, 평소에는 경기도 성남에 있는 뻥튀기 가게에서 일을 한다. 특히 모란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면 항상 손님들이 그의 주변을 빙 둘러 서는 바람에 밥 먹을 시간은커녕 잠깐 앉아있을 겨를도 없다. 이렇게 손님을 많이 끄는 비결을 묻자 그는 특유의 투박하고 겸손한 말투로 대답한다.

 

“글쎄요. 손님에게 성심성의껏 해주는 거죠. 맛있다고 손님들이 소문을 내주고 그래요.”

 

사실 이 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들의 대화를 귀동냥해서 듣다보면 이내 감지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두 시간도 더 기다렸는데, 내 것은 이제 들어갔어.”
“여기가 잘 튀겨서 저도 자주 와요. 벌써 몇 년이 됐어.”
“이건 잘 튀기는 집에서 튀겨야 돼. 잘 못하는데서 튀기면 딱딱하고 타서 맛이 없어요. 밥 짓는 것하고 똑같아.”

 

30년 뻥튀기의 내공, 손님에 따라 다르게 튀긴다

 

가만히 보니 손님들이 튀겨가는 곡물이 참으로 다양하다.

쌀, 콩, 누룽지부터 밤, 마카로니, 은행 등 낟알은 무엇이든 튀기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세상의 모든 먹거리가 그런 것처럼 뻥튀기도 튀기는 사람 솜씨에 따라 맛이 좌지우지된다.

김영목 씨는 30년의 뻥튀기 내공을 담아 손님의 연령대와 기호를 감안하여 뻥튀기 맛을 조절한다.

 

“할머니, 연세 때문에 좀 연하게 튀겼어요.”

 

뻥튀기를 받아드는 할머니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난다. 이렇게 김영목 씨는 특유의 서글서글하고 따뜻한 성격으로 틈만 나면 손님들과 담소를 나눈다.

 

“오늘 많이 안 가져오셨네? 지난번에는 다른 손님들 다 나눠주셨잖아.”

 

오랜 세월 이 일을 하면서 손님들과 정을 나누다보니 수 십 년 된 단골손님도 적지 않다. 30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라고 그는 말한다. 장사가 잘 된다고 힘든 순간이 없을 리는 없다.

한참을 공들여 지나치게 마른 곡류를 튀겨 주었는데도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 돈을 주지 않고 가 버리는 사람 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한번은 길에 잠시 뻥튀기 기계를 놓아두었다가 기계를 통째로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달고 쓴 기억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지만, 그래도 30년간 뻥튀기를 튀겨 번 돈으로 4남 2녀 자식들을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켰다. 가업을 잇겠다는 25살 막내 아이의 생각이 앞으로도 이어질지 지켜보는 중이라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뻥튀기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소박하고 유일한 그의 바람이다.

 

세상의 먹을거리가 아무리 다양해진다고 해도 그 시절 뻥튀기의 맛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뻥튀기가 출출한 뱃속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껏 내가 계속 해온 일이고, 앞으로도 내가 해 나갈 일” 이라고 우직하게 말하는 그가 튀기는 뻥튀기 소리가 앞으로도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추억의 뻥튀기’를 공유하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같지 않을까.

 

 

 

뻥튀기 기계|爆米花機器

Ppeongtwigi Gigye, Rice Popping Machine 높이 50.0 길이 125.0 1960년대

 

 

 

 

 

 

 

 

 

 

 

 

 

 

 

담배, 빵, 가마니, 냄비, 가방, 구두….

이것들은 틀림없이 외래물품이면서도 자연스레 우리 말 속에 녹아있는 귀화어(歸化語)의 몇 가지 사례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일상생활과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정서적으로 원래부터 우리의 것인 양 착각하기 십상인 것들이기도 하다.

지금은 촌티 나는 물건의 대명사처럼 언급되는 ‘고무신’도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글 :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조선식 신발' 고무신의 탄생

 

1884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Allen, 1858~1932)이 남긴 일기책을 보면, 갑신정변의 와중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자신의 고무장화를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애를 먹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고무’ 재질의 신발과 관련한 가장 빠른 기록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한참 늦은 시기의 일이다.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는 고무신의 첫 등장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하는 표현은 곧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표기이며 발음 역시 ‘고무’이다.

 

“호모화의 유입은 1919년경부터 개시되어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소량에 불과했으나, 1921년 봄 무렵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자마자 별안간에 조선인들의 환영을 받아 도시에서 시골로 보급되고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 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글은 조선총독부 상공과에서 직접 정리한 자료이므로 내용의 정확성은 비교적 높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단화형’으로 시작되어 일본에서 만들어 수입한 ‘조선식 신발’ 형태의 것이 그 뒤를 이어 나타났던 것을 알 수 있다.

 

느닷없는 고무신의 등장이 뜻밖의 대 유행을 이끌어내자 너나 할 것 없이 짚신을 팽개치고 고무신 한 짝을 갖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고무신의 색깔도 백색, 흑색, 적다색 등으로 다양해지고, 갖가지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에서도 고무신 제조 공장이 우후죽순 격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선 것은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이 설립한 ‘대륙고무공업’이었는데, 이 회사가 내건 당시의 광고 문안에는 흥미롭게도 창덕궁의 순종 임금과 각 궁가 및 궁녀들이 모두 대륙고무가 만든 고무신을 애용한다는 사실을 판매 전략의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고무신의 빠른 보급은 곧 기존 신발의 쇠퇴를 의미했다. 고무신의 위세 앞에서는 서양식 구두는 물론이고 기존의 짚신과 조선신발 역시 똑같은 처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고무신이라 하더라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고무라는 재질이 우선은 질기기는 하지만, 도무지 땀이 빠져나가지를 않으니 위생의 관점에서는 빵점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무신 중독으로 인해 어린 아이와 여학생들의 발에 종기나 부스럼이 나 문제를 일으킨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신문지상을 장식하기도 했다.

 

 

1920년대 말 고무신가게 앞의 풍경이다. : 일본지리풍속대계

 

 

『동아일보』 1921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고무신 광고 문안이다.

초기에는 일본에서 제조된 ‘조선식’ 고무신이 유입되어 새로운 유행을 주도하였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국민 신발' 고무신

 

그런데 이러한 고무신의 전성시대를 되돌려놓기라도 하는 듯이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 기사에는 뜻밖에도 보통학교 아동들을 중심으로 고무신 배척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등장했다.

고무신을 신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경제적일지 몰라도 나라 전체로는 외국에서 원료를 수입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니 결국손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을 삼아서 신자는 것은 실상 전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한층 어려워진 경제사정 때문에 자력갱생(自力更生)과 자급자족(自給自足)을 구호처럼 외쳤던 식민통치자들의 시국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일제패망기로 접어들면서 전시체제의 강화와 전반적인 경세사정의 악화로 짚신과 나막신, 심지어 일본식 게다(일본식 나막신)의 착용을 장려하는 일은 지속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고무신의 몫이었다. 결국에 짚신애용운동이란 것도 농촌지역에나 어느 정도 먹히는 이야기였지, 도회지 쪽에서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었다. 고무신의 인기비결은 무엇보다도 값이 싸고 질기다는 데에 있지 않았던가.

 

돌이켜 보면 고무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온 지는 90여 년 남짓한 세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질 좋은 운동화나 정장구두, 그리고 각종 기능화가 널리 보급되다보니 구태여 이것을 신을 일도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주 해묵은 우리네의 전통생활용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함께 나눈 핍박과 고난의 시절이 깊고도 길었던 탓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네의 심성이나 고무신이나 끈질긴 것으로 치자면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고무신 Rubber Shoes I 길이 19, 너비 7.3, 높이 5 I 1970년대 I 19081

 

고무로 만든 신으로, 남성용 고무신은 남혜(男鞋)를, 여성용 고무신은 운혜(雲鞋)를 기준으로 만들었다. 고
무신은 천연고무로 만든 흰 고무신과 재생고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이 있고, 여러 가지 장식을 한 어린이용
꽃신이 있었다. 1916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짚신보다 훨씬 질기고 비가 내려도 물이 새지 않아 널리
착용되었다.

 

 

 

고무신 Rubber Shoes I 길이 23.8, 너비6.7, 높이 6 I 1970년대 I 20051

 

 

 

 

어린이 고무신 Children's Rubber Shoes
너비 50 길이 120~170, 1970년대
어린이들이 신던 고무신이다. 특히 빨갛고 작은 고무신은 ‘홍화두’라고 불렸다.

 

 

 

 

여성 고무신 Women's Rubber Shoes
너비 65, 길이 230~240, 1970년대
여성용 고무신은 신코와 뒤축을 운혜모양으로 장식하였다.
하이힐처럼 고무신에 굽을 달아 신기도 하였다.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