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고민을 했습니다. 한편 생각하니 치열한 생업경쟁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님들을 두고 출석이나 체크하는 자체가 사치일 것 같고, 산과 바다가 입모아 노래하는 요즘 같은 때에 PC앞에 앉아서 자판이나 두들기는게 차라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우정군과 정부미의 진정어린 격려메시지가 있고 해서 삐짐이 오래가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중대발표는 무기한 보류합니다. 다만 이번 '남도를 가다 - 최종회'를 끝으로 얼마간 잠수를 탈까 합니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나름대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겠습니다. 아마도 다음 프로그램은 '이경우의 온라인 요리강좌' 시리즈가 될 것 같군요.
지루한 '남의 여행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몇몇 벗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2-남도를 가다 / (최종회) 나의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
토요일.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집을 비운 것 같다. 지지난해까지 정기적으로 출장을 다닐 때만 해도 닷새, 일주일 정도 집을 떠나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낮에 일하고 밤에 자는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알리바이가 빤하게 드러나는 까닭에 딴짓(?)을 할래야 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주머니 사정이 박해 그저 사무실에나 앉아 일만 죽어라 했을 뿐이다.
'그래, 요 정도 바람이 들었을 때 돌아가는 것이 딱 좋겠다.' 집생각이 간절했다. 살찐 마누라, 좌충우돌하는 우리 꾸러기 생각도 났다.
아무튼 태극전사들이 투혼을 불태워준 덕분에 월요일 하루를 더 놀게 됐지만, 그렇더라도 일정을 늘이기에는 부담이 크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긴 했지만 대구를 나서 이곳 보길도까지 오는데 사흘이 걸렸으니 끼니도 건너뛰고, 물 한모금 안마시고 내리 달린다해도 대구까진 여덟시간 쯤은 잡아야 한다. 먹는 건 그렇다치고, 배설욕이야 어찌 참으랴. 휴게소 한두군데를 들른다면 그만큼 지체될 거고. 게다가 오늘은 주말이다. 누가 우릴 위해 길을 비워놓을 리 없다.
서둘러야 한다. 한데 고하는 여전히 느긋하다. 민박집에서 밥상을 들이민게 8시 반쯤. 대충 씻고, 아침먹고 나선게 9시 반께나 됐다.
초고속으로 훑어보자. 오늘은 섬의 서쪽 반이다. 고산의 쉼터공원, 솔밭낚시터, 망끝전망대를 거쳐 뾰족산이 종점이다.
도
로사정은 어제저녁과 다름없이 아주 수월하다. 지도에는 꽤 거창하게 쉼터공원과 어느 종가집의 古宅을 표시해 놓았으나 눈씻고 찾았는데도 도무지 없다. 늦어도 11시에는 배를 타야하니 어정거릴 시간이 없다.
"건너뛰자. 한꺼번에 다 보아버리면 다음에 올 일이 없지 않느냐? 나머지는 자투리로 남겨두자."이런 애매모호한 명분으로 위로를 하고는 단숨에 망끝전망대까지 갔다.
'전망대'라는 이름처럼 이 섬에서는 여기서 보는 그림이 그중 낫다. 머얼리 안개사이로 조각섬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더 멀리에서는 초등학교 자연책에서나 보았던 갖가지 구름의 형상이 어울려 천태만상을 그려내고 있다. 눈가까운 쪽에는 '이발소 그림'에 어울리는 날개만 엄청 큰 갈매기도 보인다.(이발소 안가본 지가 20년 가까운지라 요즘에도 이발소에 그런 종류의 그림을 걸어놓았는지는 모르겠다)
해안선이 S자로 트위스트를 추다 갑자기 움푹 들어간 곳에는 보석같은 몽돌(파도에 닳아 동글동글하게 된 작은 돌멩이 / 사전에는 안나옴)이 햇빛에 반짝이고, 물이 괸 곳에는 앙증맞은 참게가 꼬물꼬물 기어다닌다. 적어도 내 눈속에 문명의 때가 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연을 덩어리째 집어넣어 본 것이 참으로 오래된 것 같다. 회사안에도 바다는 있지만 조용한 날을 택해 수평선을 바라보더라도 수출선이나 오징어배가 그 안에 들어있기 마련이다.
'망끝 전망대'라 했는데 도무지 이 '망끝'의 뜻을 모르겠다. 안내판에도 없다. 아마도 '망'은 '본다(望)'는 의미가 유력하겠으나, 바다를 기반으로 사는 섬사람들인 점을 감안하면 혹 '그물(網)'이란 뜻일 수도 있겠다. 전자라면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섬의 끄트머리' 쯤으로 풀면 맞겠나.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뾰족산'이란 데가 있다. 漢子로는 '甫竹山'이라 쓰는데 생긴 게 꼭 고깔을 엎어놓은 것 같아 이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길이 워낙 험해서 나의 '털털이'가 좀 불안하게 느껴졌지만, 길이 닿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산 밑에 작은 마을이 있고 촌집 담벼락에는 '어촌정식'이라고 네글자를 진한 빨강색 스프레이로 휘갈겨 놓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오래 전에 mbc PD한테 이 '어촌정식'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밥 한공기에 된장 뚝배기 하나, 젖갈만 열한가지가 나오는 색다른 메뉴라고 했던 것 같다. 전어, 멸치, 창란, 조개, 굴, 게, 홍합, 오징어,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젖갈이 더 있었다.(오래 전에 들은 얘기라 신빙성이 떨어짐. 특히 창란젖을 담그는 명태는 한류어종이라 이쪽 보길도에서는 나지 않고, 오징어 역시 동해에서만 잡히므로 젖갈 종류는 사실과 다를 수 있음) 입안에 침이 괸다. 밥먹은지 두어시간만 지났더라도 한번 들렀음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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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뭍으로 나온 것이 12시 15분. 2시간을 팽이처럼 달렸는데도 아직 보성에 못미쳤다. 들어올 때처럼 광주로 곧장 가서 88고속도로에 오를까 하다가 주말이라는 점을 감안해 남해안 국도를 따라 동으로 이동하는 강진-장흥-보성-벌교-순천 코스가 덜 붐빌 것 같아서 이쪽을 택했다.
들떠서 출발한 여행에 큰 재미(?)를 못보아서일까, 기다리고 있을 일상의 고단함이 걱정스러워서일까, 그도 아니면 단순히 배가 고파서일까? 몇시간째 고하가 말이 없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보길도에서 배를 타면서부터 입을 닫아버린 것 같다. 며칠을 함께 다닌 동지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렇지 않더라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말을 꺼내려는 차에 고하가 먼저 제안을 했다.
고하는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꼭 그 분야에 해박한 지인을 찾아내 손전화로 자문을 구하는 습관이 있었다. 가는 길에도 그랬고, 민박집을 찾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니나 다를까, 보성은 지나는 길마다 차밭이 쉽게 눈에 띄었다. 보성에서 순두부백반으로 점심을 때웠는데 시장기가 있어서인지 이번 여행 중에 먹은 것 중 맛이나 양에서 가장 만족스럽다.
무더운 날씨다. 에어컨을 끄고서야 단 10분도 못 버틸 것 같다. 순천을 지나면서 어째 차가 삐그덕 거리기 시작한다. 10년씩이나 함께 지냈던 놈이라서 약간의 이상증세만 있어도 거의 눈치를 챈다. 그래봤자 잠시 시동을 껐다가 다시 가는, 아주 단순한 처방 밖에 달리 방법은 없지만.
지금은 오토미션의 기어가 주행속도에 맞춰 변환이 안되는 상황이다. 때로는 콧소리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죽도 못먹은 것처럼 스타트 타이밍에서 힘을 못쓴다.
휴게소마다 들러 시동을 끄고 한참을 기다렸다 다시 출발하기를 몇번 반복하면서 간신히 간신히 남해고속도로를 들어섰다. 섬진강-사천-진주-진성휴게소를 지나 지수IC를 지날 무렵 드디어 이놈의 차가 맥을 놓고 혼수상태로 빠져버리는게 아닌가.
종종 이런 일은 있었지만, 잘 달래면 근근히 다닐 정도는 되었는데, 요 며칠 너무 무리를 한 터라 아무래도 이번 사태는 예사롭지 않다. '제발, 집에 가서 손봐줄테니 그때까지만 참아라 참아' 거의 빌다시피 해서 왔는데 결국은 퍼드러졌다. 손쓸 방법이 없다.
옆으로는 시속 120킬로미터로 차들이 오가고, 좀 있으면 날도 어두워 질텐데 이거야말로 낭패다. 어쩌지. 이럴 때는 일을 순리대로 풀어야 한다. 말하자면 생각을 극히 단순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단 차를 옮겨야 하고 다음은 정비공장을 찾아야 한다. 공장을 찾는다고 해서 다된 건 아니다. 토요일 밤. 그것도 터키와의 파이널 게임이 있는 날,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축구보는 걸 포기해가면서 내 차를 고쳐줄 기술자가 있으랴.
'흠, 내일은 또 일요일. 무엇보다 사건이 터진 타이밍이 안좋다.' 그러니 어쩌랴. 하늘이 솟아나도 구멍은 있고, 문제가 있으면 푸는 방법도 있다. 하나부터 해결하자. 우선 견인차를 부르자.
며칠간 우리가 의지하던 차를 견인차 꽁무니에 매달고 35킬로 미터를 달려 마산까지 왔지만 불꺼진 정비공장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다. 견인차 운전수를 협박하다시피 해서 정비사를 찾아냈다. 말귀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통사정을 해봤지만 내일 오전에나 손을 봐주겠단다.
어쩌누? 방법이 없다. 게다가 이놈이 오토미션만 갈아주면 말을 들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 일이 잘 풀린다고 해야 내일 오후께나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이럴 때일수록 조바심을 내면 안된다. 설친다고 일이 빨리 풀리는 것도 아니다. 차를 공장에 두고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가는데 저만치 처저서 따라오는 고하도 맥이 풀려있다.
가까운 식당을 찾아들어 8시부터 시작된 터키와의 마지막경기를 보고나니 맥이 풀렸다. 한달간 온 나라를 뒤집어 놓았던 월드컵도 끝이 났고, 나의 아름다운 휴가도 막을 내린다.
별이 반짝인다. 굳이 얻은 것이 없더라도 그다지 불만은 없다. 좋은 이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고, 늘 머리 속에만 그리던 그 땅에 가서 보고, 듣고, 맛을 보았다.
나없이도 세상은 충분히 돌아갔을테지만, 그래도 그 세상은 나란 존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떠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내가 해야 할 몫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집떠나오던 날 아침, 빗속으로 집을 나서던 두사람의 눈동자가 생각난다. 표정은 애써 감췄지만 그 눈은 자꾸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했다. 섭섭함이었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꼬집어 말하면 늘 함께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아버지가 불쑥 저 혼자 떠난다는데 대한 배신감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나란 존재를 말해주는 것일게다.
까만 밤하늘에는 한달간 한국인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그 6월의 축제, 월드컵의 종료를 알리는 폭죽이 길게 올랐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매우 행복하다.
2002년. 나의 짧은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보너스는 본인의 자작시입니다. 이 글은 본 카페 시화감상실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슬픔은
이경우
슬픔은 붉은 물이 번지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눈에 感知되지 않을 만한
번짐의 속도에도
송곳의 들쑤심 만큼의
苦痛이 있다
짐작대로
결이 고울수록 슬픔도 진하다
슬픔은 習慣이다
슬픔은 催眠이다
슬픔은
취한 손님처럼 찾아든다
슬픔은
아주 오래 전에 보아두었던
개미구멍의 허물어진 모양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소나기 쏟아지는 날
천둥의 恐怖에 떠는 아이의
숨소리처럼
거칠 수도 있다
인공호흡기를 떼면
곧 숨이 멎을 것 같지만
그러면
슬픔도 사그라들 것 같지만
모질게도 숨은 붙어있고
슬픔의 形象은 이내
거대한 臥佛의 가슴팍처럼
무거움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