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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할 때 우리성도들께서 아멘으로 하답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일서 1장에서 보면 사귐이란 단어가 4번이나 나옵니다.
3절.....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6절....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2)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절....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안에서 사귐을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순교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한 사랑의 사도인데 오늘 읽은 요한123서를 썼습니다.
요한은 별명이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로 성질이 급하고 말소리가 켰으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쓸어 없애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는 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서 잠시 쉬어야하겠다 요한에게 말했더니 심부름한 요한이 사마리아지역에 가서 쉬실 방을 알아보았지만 허락 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참 괘심하니 하늘에서 불이라도 내려서 저들을 쓸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상기된 얼굴로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핏대 올린 요한에게 지어준 별명이 “우뢰의 아들”입니다.
그만큼 요한은 젊은 혈기로 사랑의 포용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요한이 완전히180도 바꿔졌습니다. 변화된 정점이 언제일까요? 십자가에 예수님 못 박히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흩어져버렸지만 가장 늦게 까지 십자가 밑에 남아 있어서 예수님의 유언을 듣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죽을때 까지 섬길 때 주님의 사랑에 녹아졌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졌습니다.
이 같은 사랑의 사도 요한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사귐에 대해 강조하는데 먼저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지는 순간 예수그리스도와 다불어 사귐이 있고 이로 인하여 우리와의 사귐이 있고 그리고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미지를 보세요 교회는 한자로 '敎會'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질 때 글자와 성경을 가르쳤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의미로 ‘가르칠 교’자에 ‘모일 회’자로 교회(敎會)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교회를 '사귈 교'자에 '모일 회'자로 '交會'라고 한다고 나쁘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더 교회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요? 신약성경에서 ‘교제, 친교, 나눔’이라는 뜻으로 교회를 부른 헬라어 ‘Koinonia (코이노니아)’가 초대교회의 본질을 잘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누구와 교제하고 사귀어야 할까요?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사귐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까? 생각해보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귀기 위해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요즘 갑과 을의 관계가 얼마나 살벌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갑과 을의 관계일까요?
그러나 사귐에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먼저 오기까지 기다리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먼저 다가가셔서 우리와 친밀하게 사귀자고 먼저 다가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보는 사귐과는 다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지낼 때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하나님과 사귀며 에덴동산에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짓고 난 후 두려워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어 나무 뒤에 숨었지 않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담이 먼저 와서 무릎 꿇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을까? 하나님이 먼저 사귀고자 아담을 찾고 부르셨습니다.
첫 인간 죄인 아담이후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감히 다가 갈 수 없는 그런 상태로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점점 멀어져 어찌 감히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 할수 있는가 하면서 도망칠 때 하나님은 늘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아담이후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귀고자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41장 8절......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리켜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으니 이런 존귀한 사귐이 어디 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높인다 한들 하나님의 친구 그 이상으로 더 이상 어떻게 높이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사귀실 때도 이런 모습으로 다가 가셨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친구처럼 친밀히 사귀고 싶어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귀실 때도 사도행전 13장 22절....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친밀하게 사귀고 싶어 다가오셨는데도 인간은 하나님의 사귐을 외면하니 하나님마음이 편치 않으십니다. 이렇때마다 어리석은 인간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사귀고자 하여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귐은 점점 멀어져 이제는 큰 담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날수가 없는 그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구약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기 말씀이 마치고 신약이 시작될 때 400년이라는 신앙의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이 가까운 것 같지만 어마 어마한 역사적 시간이 흘렀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나보고 싶어하시고 사귀고 싶어하는 자기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고 나오지 않으니까 400년 동안 침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으면 대변자인 선지자까지도보내지 않으셨을까요? 그만큼 괴로워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한 친구를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헌신했는데 오래도록 사귀었던 친구가 어느 날 등을 돌리고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받고 약속시간에 커피 집에 나오지도 않는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다음에는 나오겠지 그런 마음입니까? 하루 이틀 한 달이 되어도 나오지 않아요 그러면 헤어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400년을 기다리시다가 안 되겠다 생각하시고 마지막 카드를 커내든 것이 독생자 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의 관계가 된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3-4절.....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사귐이 곧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이요 이제는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한 사귐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7절......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어두움에 있었던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의 피로 막혔던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사귐의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깨끗해졌습니다. 어두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숙한 사귐의 관계가 된 줄 아십니까? 요한복음 15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과 친구는 다릅니다. 친구는 만나면 반갑고 부모에게 못할 말도 서로 나누고 위로받는 아주 특별한 관계입니다. ‘친구’는 단지 얼굴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가깝고 서로 신뢰하는, 매우 친근한 관계를 가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런던 타임즈에서 친구의 정의에 대한 글을 현상 모집했습니다. 그 중에 우수한 글 세 편을 뽑아 상을 주었습니다.
“친구란....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릴 때, 그때에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
“친구란....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에 그 말 없는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친구이다.”
친구란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쁜 마음이 배가 되고 더해지며,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이다.”라고 이렇게 친구를 정의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친구처럼 대하여 주시다니요!! 감개무량 합니다. 상상할수 없습니다. 죄인중에 괴수인 나 김승권이를 친구가 되어 사귀시다니요 정말 말도 안 됩니다. 만왕이 왕이 되신 우리의 친구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귀고 싶습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째,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대화하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친구가 되려면, 자주 만나고 항상 대화해야 합니다. 1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아침마다 새벽기도를 하거나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24시간, 1주일 내내 언제나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 쇼핑할 때, 운동할 때, 길을 걸어갈 때, 운전할 때 등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일상생활 가운데서 짧은 기도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나와 함께 해주세요. 난 부족해요.” “도와주세요.” “의지합니다.” “이 일이 잘되게 해주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지요.” “운전대를 잡아주세요.” “아버지, 이 그릇과 같이 제 마음도 깨끗하게 해주세요.” “지혜를 주세요.”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주세요.” “주님 없이 못살아요.” “아버지, 언제나 저와 함께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한마디씩 하면 됩니다. 비록 짧은 기도지만, 그 시간만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대화하며 산다면, 더욱 경건해지고 거룩해지며 믿음이 좋아지고 하나님과 가까운 좋은 친구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배 때뿐만 아니라 찬양할 때도 기도할 때도 성경을 읽을 때에도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둘째, 계속적인 하나님의 말씀 묵상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모른다면, 어떻게 말씀 묵상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계속 생각하면 근심만 더해지고 불안해지며, 두려워지고 믿음이 약해집니다. 세상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갖기보다는 말씀부터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마음이 평안하고 믿음이 생깁니다. 담력이 생기고 걱정이 없어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 벗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만드신 등 기적의 역사가 무수히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이 한번 역사하시면 해결 못 할 문제가 없을 줄 믿습니다.”라는 담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되새김질하는 초식동물은 먹이를 재빨리 입에 넣고 대강 씹어 삼킵니다. 그 중에 소는 위가 4개나 있습니다. 소는 일단 부지런히 먹은 후 한가해지면 첫 번째 위에 저장된 음식을 다시 입속으로 끄집어내어 천천히 잘게 씹습니다. 그리고 잘 씹은 음식들은 둘째 위로 그리고 셋째 위로 다시 넷째 위로 보내집니다. 마침내 잘 소화된 음식은 생명체가 살아 움직이는데 필요한 영양분이 되고 피와 살이 됩니다.
소가 되새김질하듯 우리성도들이 설교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고, 그 중에 생각나는 중요한 말씀들을 계속 기억하며 묵상할 때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믿음이 살아나고 우리의 마음이 경건해지고 은혜로워지며, 하나님과 더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식인종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6년 만에 처음으로 런던으로 돌아가서 보고대회를 할 때, 많은 사람이 그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때 한 청년이 “그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리빙스턴은 서슴없이 평소에 자신이 늘 묵상하는 성경구절을 들려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요한복음 14장 18절..“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 말씀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게 해주었다고 리빙스톤은 보고 했답니다. 사랑하는 주향성도여러분!!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과 사귀고 싶습니까?
사귀면 사귈수록 더 친숙해지고 더 좋으신 하나님!.........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면서 상담해주시는 하나님!!.........
지금도 우리를 만나고자 기다리시고 또 우리 문 앞에 기다리는 계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고 벗이 되어 주시고 우리와 영원히 사귀고 싶다고 하시니 기쁨이 배가 되지 않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귐이 깊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