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동경의 인실
인실이 머물고 있는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을 찾아가는 찬하는 갈 때마다 말할수 없는 곤욕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곤욕스런 방문을 한 번도 아니요 거의 관례적으로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실행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이 딱하기도 했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본다면 그 항구에 오가다와 인실을 남겨 놓고 도망치다시피 혼자 와버렸으니 책임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었고 오가다와의 우정을 이유로 삼을 수도 있었다. 또 유인실이 동포라는 것도 이유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가다와 인실의 문제요 찬하가 간여하지 않는다 하여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어려운 형편이라면 얼마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그것만으로도 찬하는 도리를 다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인실이 청하는 도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경제적인 준비는 되어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지난 칠월 초순의 일이다. 조선에서 일어난 배화 폭동이 날로 확대되고 격렬해진다는 신문 기사를 찬하는 읽고 있었다. 만주 길림서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인 농민과 조선 농민 사이에 벌어진 충돌 사건이 『조선일보』호외로 시작하여, 연이어 선동적인 기사로 사건이 보도되면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 습격 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이 각처에서 자행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조선인의 어리석음과 일본의 사악함이 교묘히 맞아떨어지면서 저질러진 어처구니없는 만행이었으며 대만의 무사사건을 연상케 하였다.
'비겁하고 비천하군. 이래가지고는 구제불능이다. 진재 때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을 무슨 낯짝 치켜들고 비난을 하겠나. 참으로 혐오스럽다!'
신문을 꾸겨쥐는데 배달된 편지 한 통을 하녀인 하루가 가져왔던 것이다. 편지를 볼 기분도 아니어서 하루에게 차를 끓여오라 이르로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곳에서는 사상자가 있었다는 보도도 없었는데 이건 무슨 미친지랄인가!'
찬하는 온종일 기분이 언짢아 있었다. 저녁밥을 들 때도 그의 얼굴은 우울해 뵜다. 현재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찬하로 하여금 분개하게 했고 깊은 실망을 갖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양식 있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다 그랬을 테니까. 그러나 찬하의 감정이 요즘 균형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녁을 끝냈을 때 아내인 노리코가 안색이 좋지 않다, 기분이 안 좋냐고 물었다. 그러나 찬하는 고개만 흔들고 서재로 돌아왔다. 한나절을 내버려두었던 편지를 찬하는 무심히 집어들고 봉함을 돌려보았다. 뜻밖에도 유인실이라는 이름이 정확한 필치로 적혀 있었다. 편지의 발송지는 서울이 아닌 동경이었다.
제례하옵고,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조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선생께서 지장이 없으시년 오는 칠일, 시간을 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비야 공회당 앞에서 오후 세시부터 네시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못 오셔도 저로서는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간단하고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찬하는 왠지 가슴이 철렁 했다. 불가피한 사정이라는 말이 갖는 긴박감도 그러했으나 마지막에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 말에서 절박한 인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실이 관헌에게 쫓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인실은 히비야 공회당 건물 한곁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찬하를 먼발치로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찬하가 가까이까지 가는 동안 줄곧 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 흐트리지 않게 치올려서 빗은 머리를 모아 고무줄로 동여매고 흰 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가 있는 헐렁한 원피스를 인실은 입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찬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인실은 잠자코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다시 찬하가 말했다. 인실은 웃지 않았다. 고개만 숙여 인사를 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몰라보게 여위어 있었다. 관골은 날카롭게 보였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그늘에 가서, 벤치에 앉을까요?"하면서 인실은 앞서 걸음을 옮겨놓는다. 여윈 얼굴이며 여깻죽지와는 다르게 헐렁한 원피스 속에서 움직이는 몸은 몹시 비대해 있었다. 찬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누가 뒤에서 자신의 목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나!'
찬하는 손수건을 꺼내며 이마에 벤 땀을 닦으며 걷는다.
'죽일 놈! 지가 감히.'했으나 찬하는 이상하게 오가다에 대한 연민을 가슴 뜨겁게 느낀다. 두사람은 숲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푸는 수목, 수목은 푸르기보다 검게 보였다. 그 속에 있는 인실은 마치 풀물을 들인 것처럼 더욱 푸르게 보여, 그것은 찬하의 착각이었지만, 녹색의 여인 같은 느낌을 준다. 소나기가 쏟아질 직전처럼, 번개가 칠 직전처럼 검은 숲속의 공간은 파아랗게 느껴졌고 그 공간에 있는 인실은 녹색의 여인이었다.
"죄송합니다."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구만리 밖을 바라보기나 하듯 인실이 말했다.
"웬일이세요?"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실은 찬하의 목소리를 저울질이나 하듯 동공을 한곳에 모았다.
"추악한 모습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동경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온 지 오래 됐습니다."
"못 만나보셨습니까?"
왠지 찬하는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지금 그 사람 삿포르에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더군요."
"……"
"저는 그분을 찾아 일본에 온 건 아닙니다."
먼 곳에 있던 인실의 시선이 돌아와서 자기 발, 하얀 운동화로 옮겨진다.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선생님께선 아시겠지요."
"……"
"우리는 이제 다 끝났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두렵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
"진실이 현실에서는 추악하게 뵈는 것은……왜 그럴까요."
찬하는 인실의 말을 들으면서 도덕과 휴머니즘에 대하여,
하고 찬하는
"이제는 그 사람한테 받으십시오."하고 말했던 것이다.
"제가 설명을 해야만 아시겠습니까? 하기는 선생님이 알아야 할 의무는 없는 거지요. 저는 울부짖었습니다. 우리의 진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저의 행동은 마땅히 돌로 쳐죽여야 할 배신인 것을 저 자신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느것에도 승복 안 할 결심입니다. 저는 새롭게 시작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저는 속죄할 그 아무것도 없고 인간을 몰아넣는 그 비정한 것과 싸울 거예요."
잠긴 목소리였으나 말은 여전히 또박또박했다. 그러나 인실의 내부는 거의 광란 상태인 것을 찬하는 느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미쳤는지 몰라요. 결국, 그렇지요. 아이는 일본에 있어야 합니다. 오가다 지로의 자식도 유일실의 자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낳은 생명일 뿐이예요."
"인실씨!"
"……"
"그 사람한테 갑시다. 우리 가서 의논합시다."
"그럴 생각이면 왜 제가 조선생님을 만나뵙자고 했겠습니까? 전, 전 아이를 낳은 후의 방도가 막연합니다. 조선생님께서 주선에주십시오, 아일 길러줄 곳을."
인실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 오가다상하고 의논을 한 하려 합니까? 그는 아이의 아버집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건 안 돼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지요? 왜 그래야 합니까?"
찬하는 떼를 쓰듯 말했다.
"우린 끝났어요. 절대로 다시 이여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아이의 어머니도 아, 아니어야……절대로 몰라야 합니다."흐느껴 운다. 작은 새 한 마리같이 흐느낀다."
"자신을 다 버리고, 자신을 다, 송두리째 주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 가, 같았어요. 언제까지나 그 사람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은 모, 몰랐지요."
더욱 흐느낀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울음 그치시오! 자아 울음을 그치시오!"
찬하는 분노를 느끼며 소리치다시피 했다. 찬하 자신 이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비극에 자신도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 눈에 이들은 사??? 많은 연인들로 비쳤을 것이다. 그 후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 있는 인실을 찬하가 찾아갈 때 그때마다 사연 많은 남녀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누군가가 찬하에게 당신이 아이 아버지요? 당신이 그 여자의 남편이오? 애인이오? 하고 물어준다면 모를 까, 찬하는 그 오해를 변명할 길이 없었다. 저희들 마음대로 애인이다, 아이아비다, 아니 숨겨놓은 여자다, 그런 식으로 상상하는데,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뭐라 하겠는가. 등골에 땀이 흐를 만큼 곤욕스러울 뿐이다. 찬하는 현재 자신의 역할을 아내인 노리코에게 떠넘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렇세 한다면 인실이 ??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버릴 것만 같아서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 있었다. 오늘도 찬하는 그 곤욕스런 방문을 감행하기 위해 과일점에서 과일 바구니를 하나 사들었다.
백화점을 나서려는데
"어머! 산카상!"
여자가 물었다.
"아아"
찬하는 걸음을 멈추며 엉거주춤 인사를 한다.
"오래간만이에요."
"그렇군요."
여자는 세련되 양장이었고 나이는 노이코보다 서너 살 위, 노이코의 외사촌인 노다 마리코다.
"과일 바구니 들고, 어디 병문안?"
"네."
"오랜간만에 만났는데 바쁘지 않으면 커피 한잔 마시지 않겠어요?"
"그러지요."
두 사람은 백화점 가까운 끽다점으로 들어간다.
"노리코랑 아이랑 모두 건강해요?"
차를 마시며 마리코는 안부를 묻는다.
"괜찮습니다."
"이런 우연 아니면 산카상 만나보기 힘드네요."
"원래 게을러서요."
"귀족이라 우릴 얕보는 거 아닌가요?"
"별말씀을, 노다상이 누군데 얕보겠습니까."
마리코의 남편은 상당한 고급 관리다."
"그래 지금은 뭘 하세요."
"집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지요."
"하기야 산카상은 부자니까, 집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도 있지요."
"번역 따위가 연굽니까?"
찬하는 웃는다.
"그것도 일종의 영문학 연구 아니겠어요."
"글쎄요."
"학교는 왜 그만두었지요."
"오래된 얘긴데요, 있으면 뭐합니까?"
"왜?"
"일본에서 중학의 교사 자리 하나도 조선인에게 내주지 않는에 대학의 강좌를 얻는다는 건 미친 사람의 꿈이겠지요."
"아아, 그건 심하군. 말도 안 돼, 그건 옳지 않아요."
"할 수 없지요. 그런 것 모르셨습니까?
마리코는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산카사은 다르지 않아요?"
"다른 것 없어요. 저의 국적은 엄연히 조선이니까요."
순간 마리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도 조선의 식민지 정책엔 비판적이예요. 민족성이 어떻다는 둥 하는 말에 대해서도 그건 일본인의 편견이라 했지요. 하지만 지난 칠월에 있었던 지나인 학살을 신문지상에서 보고 놀랬어요. 산카상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천인공노할 만행이지요."
"정말 야만적이었어요. 난 신문 보고 떨었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무지몽매한 소치지요."
"네. 맞아요. 평소 내 인식도 싹 달라지더군. 이젠 일본인의 편견이란 말은 못하겠지요?"
"그렇습니까?"
찬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요. 우리도 일본인에 대한 것이 편견이라 하여 나무라던 사람에게 얼굴을 치켜들 수 없게 됐습니다. 이제는 진재 때 조선인 학살에 대해 말 못하게 됐지요."
"어머! 산카상도 참 짓궂은 데가 있네요."했으나 마리코의 얼굴에는 완전히 불쾌한 빛이 나타났다. 찬하는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이제 실례해야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끽다점을 나서는 찬하는 구역질을 느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마리코 언닌 좀 대샤바리에요.'
비교적 남의 흉을 보지 않는 노리코가 그런 말을 했었다. 대샤바리란 잘난 체, 남의 앞에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차에서 내려 시영 주택 어귀에 들어서면서 찬하는
'어째 마음이 요즘엔 자꾸 격해지는 걸까. 뭔가 치사스러워. 왜놈한테 동냥이나 한 것 같은 기분이야. 오늘은 두 번 다시 안 오겠다. 아이 낳기까지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그 따위 생각은 말자. 인실씨는 우리 조선 사람들의 누이가 아닌가.
거북한 인실과의 대면은 그랬고 주위 눈빛도 피부에 닿는 가시 같아서 찬하는 방문을 하고 집을 나섰을 때는 언제나 다시 안 오게ㄸ다, 아일 낳았다는 기별이 있기까지는 안 올 것이다, 그렇게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면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실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 때문이다.
"형체도 남기지 않는 파괴,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에요. 어느 곳 어느 때든 그것만은 저의 권리고 자유니까요."
그 말을 했을 때 찬하는 인실이 미웠다. 그러나 그에게 눌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무심결에 튀어나왔을 뿐 겁을 주기 위해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찬하는 여러 번 삿포로에 있는 오가다에게 연락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자신이 떠맡은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리코에게 떠넘기려다 말았던 것처럼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찬하는 배짱이 두둑한 편은 아니었지만 단호하고 냉정한 일면이 있었고 결코 허약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러나 히비야 공원에서 인실을 만나는 순간 그들의 비극에 사로잡힌 것은 연민 때문이겠으나 한편 인실에 투영된 자신을 보았을지 모르고 은둔에 가까운 동경 생활의 숨막히는 자기 폐쇄에서 출구를 찾는 몸부림 같은 srjt일 수도 있다.
집주인 여자가 현관 문을 열어주었다. 속발에 누리끼한 빗을 꽂고 길쭉한 여자의 얼굴, 입 언저리에 검정 사마귀가 있었다. 찬하는 그 사마귀를 볼 때마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여자는,
"오십시오 이번에는 좀 늦었군요." 함며 묘하게 웃었다. 교태 같기도 했고 비웃음 같기도 했다. 매번 겪게 되는 일이었지만 역시 기분이좋지 않았다. 물론 여자는 인실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찾아오는 남자에 대하여, 그러나 아는 사람,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인실은 여자 호기심을 채워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주변에 신경을 쓸 그럴 여유도 없었다. 사실 아는 사람이라는 이상의 할말도 없었던 것이다.
"올라가보십시오."
"젊은 여자가 혼자서,참 안됐어요."
예의 바르고 점잖고 귀공자 같은 찬하, 어떤 뜻에선 귀공자이기도 한 조찬하에 대하여 여자는 항상 정중하기는 했었다.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맣습니다."
"홀몸이 아니니까 저도 마음이 쓰이는 거지요."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잘 닦여져서 미끄러운 계단을 밟으며 올라간다. 인실의 신상에 불안을 느낄 때계단의 수는 많은 것 같았고 거북한 대면을 갱가가할 때 계단의 수는 너무 적은 것 같았다. 방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문을 두드린다.
네."
"조찬합니다."
"네."
언제나처럼 인실은 무릎을 모으고 등은 벽에 기대이듯 앉아 있었다. 그는 숨이 찬 듯했고 허리 둘레는 더 커졌으나 반대로 팔과 어깻죽지는 더욱 여위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과일 바구니를 한 곁에 놓아두고 자리에 앉으며 찬하는 또 물었다.
"괜찮습니까?"
처음 찬하가 찾아왔을 때 인실은,
"이제 오시지 마십시오." 했다. 그 말은 찬하가 찾아갈 때마다 잊지 않고 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인실은 그 말을 안 하게 되었다. 어차피 찬하는 올 것이기 때문에 그랬는지 자기 생각에 몰두하여 사소한 일은 모두 잊고 있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츠키소이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츠키소이란 병자를 돌보아주는 직업인으로, 간호원하고는 달라서 허드렛일까지 다하는 사람이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필요할 때 여기 아주머니한테 부탁하겠어요."
"내일이라도, 제가 한 사람 보내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직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식사 준비까지 하시려면…… 그리고 방도 어디 아래층으로 옮기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인실은 순간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사양이 아닌, 제발 날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는 부탁인 것이었다. 일어서야 마땅한 것인데 찬하는 몸이 붙은 것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인실이, 찬하 역시 숨이 막힐 것 같은 장소에게 피해 달아나고 싶었는데…… 역시 연민이었다. 그것은 찬하 가슴 밑바닥에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병자 방에는 꽂지 않는다는 그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 찬하는 히비야 공원에서 녹색으로 착각한 인실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서로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 인실은 찬하가 있는 것도 잊은 듯했다. 찬하는 이 막연한 침묵을 깰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실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서울의 가족들에게는 행방이라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한 얘기였지만 다시 물어볼 수는 있었다. 오가다에 관한 얘기를 한 번쯤 더 꺼내어 심경의 변화를 촉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찬하는 안다, 인실이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태어날 아이의 문제일 것이다. 인실은 찬하가 나타날 때마다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찬하에게는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었다. 아니 방안이 없었다기 보다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판단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옳고, 그보다는 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도코로 보내면 어떨까. 그러나 그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입밖에 낼 수도 없었다. 사도코란 시골 가정에 양육비를 주고 아이를 맡기는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엄마가 약하다든지 병들었다든지 아이가 많다든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아이를 시골 가정에다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도 유모를 들이는 대신 그런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있었다. 찬하가 선뜻 그 말을 하고 나서질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는 시간을 기다리며 인실의 심경에 변화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을 등지고 어느 산골에 가서 남 몰래 두 사람이 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민족이라는 굴레 같은 것 벗어던져 버리고 계급이라는 그 따위 남의 일 관여치 말고…… 민족이란 도시 무엇인가. 이것에는 다분히 허식이 있다. 자애하는 이기심도 분명히 있다. 침해하는 쪽이나 침해당하는 쪽이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민족이란…… 결국 필요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모인집단, 무리를 짓는 동물과 같이 생존을 위한 집단이 아닌가. 다만 좀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간은 본능을 사랑이라 하고, 외로움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사랑이라 하고 진실이라고도 한다. 이런 불안정한 인간들을 수용한 집단은 조국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한 핏줄이라는 끈으로 묶어놓고 일반통행을 한다. 조국! 핏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항국불멸의 것으로 이탈하면 안 되는 것인가? 생존을 위한 공동체, 그것은 과연 공동체였던가? 민족은, 국가를, 그리고 소수를 위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 밑깔개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 대하여 민족적인 불노를 느낀 것은 그것은 감정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그것처럼, 거의 이성은 아니다. 그러나 저 여자의 경우는 감정보다 이성이 더 강한 것 같아. 만일 동족끼리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면 저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그는 수모를 감내하면서 아이를 길렀을 거야. 버리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남자와 여자, 그리고 태어날 또 하나의 생명, 이들의 결합을 저해하는 것은 지금 민족이라는 명제다. 큰 것은 항상 작은 것을 말살하고 먹어치운다. 이 정당성, 이 논리는 끝이 없는 것일까? 끝이 없는 것이다! 끝이 없는……'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담뱃재를 턴다. 담뱃재를 털면서 찬하는 인실을 빌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끄러움 같기도 하고 아픔 같기도 한 것이 잠시 스쳤으나 이내 가슴이 답답했다. 사방벽에 주먹질하지만 뚫고 나갈 길이 없는 막막함. 삶 자체에 대하여, 지실이나 진리에 대하여 어느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막막함. 삶 자체에 대하여, 진실이나 진리에 대하여 어느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막막함, 절망은 느낀다. 방안은 밝은 편이었다. 육조 다다미방에는 하다 못해 벽면에 옷가지 하나 걸린게 없었다. 방안은 이사간 뒤처럼 비어 있었다. 방 길이의 절반쯤 오시리애(벽장)가 있었는데 아마 모든 소지춤은 그 속에 넣어둔 모양이다. 유리창 밖의 하늘에는 구름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풍이 이따금 불어와서 후덥한 몸과 마음을 식혀주곤 한다.
'일본 여자들에겐 그런 갈등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노리코의 경우도 거의 그것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하기는 일본 여자하고 사는 조선 남자는 더러 있지만 일본남자와 조선 여자가 함께 사는 그런 것은 본 일이 없으니까. 조선 여자는 아예 쇠대문은 내려놓고, 그 쇠대문을 뚫고 나왔으니 저 여자는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지. 그런 의식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모화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도 여자가 이민족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했고, 세상도 그들에게 가혹했다. 그들은 고국과 절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실씨도 만주나 중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영원히 고국에는 아니 오겠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 의식의 벽에갇힌 옛날의 조선 여인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여자들, 인실씨는 그들과 조금도 달라진 여자가 아니더란 말인가? 오히려 그들보다 더 철저하게 물론 정조관도 그러했겠지만 만일 사상의 불덩이 같았던 여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그의 말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참으로 엄청난 이율배반이다. 그는 적어도 사회주의에 물든 여자가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관습적 의식과 사상에 다소는 간격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실씨는 어느 측면에서도 그 도랑이 너무 깊고 넓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해. 모순이야, 모순. 자신을 찢어발기는 결과밖에는 없다. 진실, 진리? 그것은 과연 옳기만 한가? 선, 절대 선일 수만은 없다. 인간이 죽는 건 하나의 진실이다. 그 진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쫒기며 간다. 하면은 그것을 극복하는 것밖에 인간은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흥!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게지? 밥 세끼 먹고 할 일 없는 돼지가 사변의 노예가 될 자격이나 있는가? 관두자, 관두어. 끝이 없다.'
한 그릇의 밥보다 상아탑이 그리 값진 것은 아니야 하던 어느 친구의 말이 찬하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것 돼지의 발상이다.'
어느 친구가 그 말에 응수했다.
'뭐 별다를 게 없네 이 친구야. 자네 생각만큼 인간은 위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위대하다는 것은 인간의 자화자찬인 게야. 누구 심판관 있어?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야 진상을 알 게 아니냐말이다. 결국 인간도 밥그릇 때문에 싸워온 거 아니냐, 내 말은 그거야.'
인실은 망연한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형무소에 있을 때 감방안에서 인실은 저런 모습으로 온종일 앉아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찬하는 일어서야 한다. 이제 가야지 하면서도 방은 나서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입 언저리에 까만 사마귀가 있는 집주인 여자와 부딪칠 것이 지겨웠다. 어쩌면 인실이 따로, 자기 따로의 뭔지 모를 골똘한 시간에 스스로 얽매여 있는 것을 찬하는 좋아했는지 모른다.
'오가다는 인실씨를 알고부터 코스모폴리탄인가 뭔가, 그렇게 됐을까? 아니면 그 사상 때문에 저 여잘 사랑하게 됐을까? 이건 또 뭐야? 별 시시한 생각을 다 하는군. 오가다는 다만 여자를 사랑했고 인실씨는 다만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게야. 도시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도시 이 여자는 누구인가? 조선의 잔다르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거창한 여자는 아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연소시키며 자시 완성을 꾀하려는 것인가? 그것 역시 너무 거창하다. 이 여자는 자신 속에 타인과 자신이 공존하는 그런 박애주의? 그것도 물론 아니다. 이 여잔 그런 위선자가 되기엔 너무 말뚱말뚱하다. 조선의 여자가 갇혀 있었던 곳에서 빠져나와 가장 첨단의 흐름속에 뛰어들어 그 두 개의 이빨 속에 생각과 몸이 짓이겨지는, 다만 그런 희생자에 불과한 걸까? 뭔가 이 여자는 정리를 해야 해. 어느 것이든 하나를 극복해야 해. 개미 쳇바퀴 돌듯 나는 언제까지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헛된 자문자답, 끝나지도 않을 일, 이건 망상이다. 끝없는 망상이다.'
거리 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각에 두부장수가 다니지도 않을 터인데 찬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종소리는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럼."
하다가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셔려는데,
"고맙습니다."
인실의 말에 찬하는 놀라는 듯 돌아본다.
"아,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찬하는 밖으로 나왔다. 죄송하다는 말은 여러 번 했으나 인실이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찬하가 돌아가고 난 뒤 인실은 여전히 벽에 기대이듯 하고 앉아서 손수건 두 장이 널려 있는 난간 밖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늘과 구름과 손수건뿐인 공간, 그 공간에 이따금 새가 질러가곤 했다. 가라앉은 시간이다. 의식속에서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도저히 가라앉은 시간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덫에 걸린 짐승같이, 감겨오는 시간의 실꾸리, 번데기가 되고 말 것 같았다. 인실은 그것을 떠밀어내듯 몸짓을 하며 일어섰다. 일어선 뒤에도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벽장문을 열고 트렁크 위에 개켜놓은 옷을 꺼내어 갈아입는다. 흰바탕에 회색물방울 무늬의 헐렁한 그 원피스다. 머리를 매만지고 왕골로 만든 여름용 손가방을 찾아든 인실은 그 속에 지갑을 넣고 손수건을 넣고 책보를 접어서 넣는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방을 나간다. 예정일은 넉넉하게 한 달은 남아 있었다. 진작부터 배를 싸매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임신부임을 알 수는 있었지만 배가 남산만하지는 않았다.
전차를 타고 내리고 하면서 인실이 간 곳은 신주쿠에 있는 미츠코시 백화점이었다. 그는 백화점을 배회하다가 양말 한 켤레를 샀고, 또 몇바퀴를 돌아다니다 손수건 한 장을 샀고, 한참 후 그는 다시 갓난아이의 모자를 하나 샀다. 그러나 그는 물건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온 것은 아니었다. 물건은 목적도 의미도 없이, 배회하는 장소에 사용료를 지불하듯 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호리가와의 그 이층 방에는 혼자 있어도 늘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방안의 물건을 모조리 벽장 속에 넣어버리고 빈방같이 했지만 여전히 옆에 누가 있는 것만 같았다. 여름이어서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역시 백화점 안은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인파속을 천천히 누비고 다니면 인실은 마치 무인지경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는 장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지된 시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외출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아사쿠사에서 내려 아사쿠사 일대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때는 마루비루(마루베니 빌딩)가 있는 오피스가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전차를 타고 가다가 아무 곳에서나 내려서 한없이 걷기도 했다. 동경에 왔을 그 무렵, 그때는 지금같이 몸이 무겁지 않았기 때문에 더 멀리까지 가서 쏘다녔다. 교토에도 갔었고 나라에도 갔었다. 아시노고(하코네 산에 있는 호수)에서 청록색 물빛을 언제까지나 내려다보고 서 있었으며 요코하마부둣가에까지 가서 우투커니 서 있기도 했다. 항구에는 어마어마한 배들이 떠 있었다. 상선이 있었고 여객선도 있었다.
인실을 작은 항구, 적옥이란 빨간 네온의 카페가 있던 그 밤의 항구를 생각하고 검정옷에 창백했던 명희를 생각했다. 기차를 타고 전차를 타고, 마치 피리어드를 찍는 것처럼 레일을 지나가는 진동의 하나하나, 그것은 일각일각 시간에서 탈출하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걷는 것도 그러했다. 한발한발 내디딜 때마다 시간을 잡아먹으며 앞을 향해, 아무튼 어느 정거장이든 내리게 될 것이라는, 희미하지만 그것은 희망이었다. 얼마간의 안도감이기도 했다. 길고 긴 동경 체류, 기간은 몇 개월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인실에게는 십 년 백 년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왔다, 해가 떨어지고 밖은 황혼이었다. 해 지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거리는 사람에 밀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네온사인과 불빛, 거대한 도시는 무지개에 싸인 듯 아슴아슴하다가 황혼이 차츰 짙어지는 데 짜라 찬란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완숙한 과일의 방향과도 같고 어쩌면 부패하기 시작한 향기와도 같은 도시의 입김을 풍기면서,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금빛 황혼의 사람 같았다. 설레이면서 밤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꿈꾸듯 것고 있는 것 같았다. 기쿠치 간의 진주부인을 소망하는 여자가 걸어가고, 베를린의 번역시에 홀린 청년이 걸어가고 달콤한 허무주의 달콤한 비관주의, 도시의 황혼은 그리고 여름의 황혼은 미풍에 흔들리는 가로수와 더불어 달콤하고 슬프게 사람들을 매혹한다. 도시의 애수, 영광과 자부와 그리고 착각, 어둠이 밀려오면서 네온사인은 한결 선명해진다. 별보다 가깝고 별보다 미려하고, 나폴레옹도 아이스크림의 맛은 모를 것이다. 새삼 그 말을 상기하게 하는 네온사인. 인실은 가로수 밑에 서 있었다. 모던하고 스마트하고 엑조틱하고, 비록 영화 간판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은 만끽하고 지향하는 무리와는 동떨어져서 착각이나 환상의 여지가 없는 부른 배를 안고 인실을 동경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밤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이 군사, 토목, 법제에 주력하면서 정복자의 면모를 약여케 한 바 있었고 특히 토목은 그 규모가 거대 웅장하여 대로마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사위를 진경케 했듯이 관동대진재 이후 일본의 토목을 실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섬나라 일본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대국 청나라를 누르고 노랑머리 파란눈의 외경하여 마지 않는 백인의 나라 러시아를 견제하고 아시아에서 강국으로 도약, 천재일우의 시기를 맞이한 그들, 그들이 즐겨 썼던 촌스런 말 중에 일등 국민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일등 국민에 걸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외모를 갖추어야겠다는 욕망이야 새삼 말할 나위 없는 일, 그야말로 미증유의 마천룬들 아니 세우고 싶었겠는가. 게디짝 신고 안짱걸음 걸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 살피듯 땅을 보고 걷는 그들 습성일지라도 새로운 것이면 모조리, 큰 것이면 모조리 개미떼같이 달려들어 건설한 도시, 농염한 시다미치 무스메(에도에 사는 하층민의 딸) 같은 조재는 짠짠바라바라(칼싸움) 영화라는 무대가 있기든 하되 안방에 모셔진 불단처럼 에도(동경의 옛 이름)의 자취를 걷어낸 동경에는 파리가 있었고, 런던·뉴옥도 있었다. 루바시카의 모스크바도 있었다. 유행이라면 무엇이든지 사회 전반에서 현기증 나게 탈바꿈을 거듭하는데, 환락가·유흥가·연예계는 구미를 뺨칠 만큼 개방적이며, 성냥갑이나 포스터의 나체 그림은 그들의 전통이 남녀 혼욕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에로구로(선정적이고 괴기적인)의 엘본(값싼책)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신바시의 게이샤(기생)가 사교 댄스를 추는 것도 꽤 오랜 일이며, 졸부의 부인들은 골프를 치고, 하기는 도시건설은 진재 이전에도 샐러리맨 일만 명을 수용하고 하루 출입차가 삼만이 넘는다는 매머드 마루비루를 세웠으니 일본인들이 팽창주의 거대 일변도 물론 그것은 도시나 문물에 한한 것은 아니었고 군국주의를 관통하는 주된 흐름인 동시에 세계로 뻗으려는 그들의 야망이었다. 한편 노가다 죽이는 데 아이쿠치(비수)가 필요 없다. 즉, 장마가 계속되면 노가다는 비수 없이도 굶어죽게 돼 있다는 뜻인데, 도시 뒤켠에는 그같은 계층이 있고 농촌에서는 소작료가 밀렸다 하여 농가의 농기구에 빨간 딱지가 붙는 현실, 정쟁이 있고 암살이 있고 쿠테타의 기도가 있고 계급투쟁·노동쟁의·여성해방의 운동이 있고, 노동장 열 명의 이십 년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방 하나 치장하는 데 쓰는 나리킨〔벼락부자〕이 있고, 그러나 이런한 모든 것은 일본의 얼굴일 뿐이다. 분을 바르건 성형수술을 하건, 보기 흉한 종기에는 반창고를 붙이건 잘라내버리건 그것은 얼굴에 다름없다. 천하무적의 군비, 일본의 심장은 그것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삼국유사』에 소를 바치며 읊은 「연화가」,겨울 참나무 같은 노인의 무상한멋에서 연상되는 것은 출진하는 남편 투구에 향을 사르는 일본 여인니다. 생과 사를 초월한 멋에 얼핏 공통점이 있는 듯실지만 우리는 향을 사르는 여인에게서 전쟁의 미학을 보는 것이다. 아무튼 모집으로 끌려온 조선의 수많은 백성이 무서운 채찍 아래 이승과 저승을 헤맬 때, 물론 그들의 동경의 찬란한 불빛을 알 턱이 없고 일본의 힘을 과시하는 도시를 본 적도 없고 환락가의 지분 짙은 여자웃음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오지의 탄광촌 바라크에서 꿈도 없는 지친 잠자리의 그들은 일본의 힘을 채찍에서 느끼고 목검에서 느낄 뿐 더 이상 죽어야만 할 기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동경 유학생들의 동경을 바라보는 심회는 어떠했을까? 모집으로 끌려온 노동자와 동경 유학생, 사정이 다르다. 사정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어서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더러 남아 있는 사람 중에는 적지심장부 동경 거리에서 휘청거리고 있을 유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력이건 두뇌건 혹은 문벌이건, 그들은 선택받아 이곳에 왔다. 희소가치의 존재로서도 그들의 자긍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긍심은 동경에서 온전했을까? 이조 오백 년 차별 대우를 뼛속 깊이 맛보아야 했던 서출들처럼 이들은 동경 땅에서 뼈에 사무치는 차별 대우를 어떻게 감내했을까. 사사건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일각일각 부딪치는 것은 내 땅을 빼앗고, 내 존엄성을 빼앗고, 뿌리를 뽑고 짖밟는 그들 일본의 실상은 동경 유학생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그 힘에 경도되어 칼을 꺾으며 경의를 표했을까? 거대한 힘에 공포를 느꼈을까? 아니면 이를 갈고 증오했을까? 부러움, 모멸감, 내일을 기안 인내심? 어쨌거나 명분에서 따지자면 그들은 민족에 대한 배신, 내 백성에 등을 돌리고 왔다는 것은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그들의 대부분이 출세 지향이었으니까. 일본 치하의 출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조선에서 종래의 지식인, 지도적인 지식이었던 선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자리를 이어받을 동경유학생들, 그들의 갈등과 고뇌는 개인적으로 비극이지만 그것은 또 조선민족의 비극이다. 합리주의적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묻혀올 일본의 가치관이 역사를 난도질하고 민족정신을 파괴할 위험 부담은 심각하다. 그 맥락은 후일 오랫동안 스며들어 자기 부정의 자해 현상으로 조선 백성은 시달리게 될 것이다. 사실 엽전이라는 자학은 유학생 사이에 팽배해 있고, 생업이 없다. 사실 엽전이라는 자학은 유학생 사이에 팽배해 있고, 생업이 없이도 살 만한 계층에서는 쉽사리 댄디즘의 무풍 지대로 도망치고 학문은 어디 산 홍차, 어디 산 양복지의 값어치로 전락했다. 또한 어느 무리는 반일의 거점을 사회주의로 찾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어느 어느 무리는 계몽주의에 의거하여 기독교와 연합하면서 우리것은 파괴하는데, 그것은 실로 일본이 바라는 바이다. 또 이들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어느 무리는 미래의 관직을 꿈꾸며 율법전서를 맹렬히 들이파면서 기회 불균등을 한탄하단다.
동경 거리는 아니 신주쿠의 거리는 이제 어두워졌다. 인실은 걸음을 옮긴다.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웠다. 서 있을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였던 육체가 갑자기 그에게 압박을 가했다. 아무곳이든 주저앉고 싶었다. 한참을 걸었던 것 같아. 검정 바탕에 희게 뽑은 우동이란 글씨의 노랜(상점입구의 처마 끝이나 점두에 치는 막)이 눈에 띄었다. 그것으로 들어간 인실은 자리에 앉는다. 빈 자리가 더러 있었지만 손님은 많은 편이었다.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우동 한그릇을 시킨 인실을 깍지낀 손 위에 턱을 올려놓고 멍하니 벽면을 바라본다.
"자아 드십시오."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우동 그릇을 탁자 위에 놓으면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고마워요."
무뚝뚝하고 드센 조선 사람과 달리 일본의 상인이나 음식점 종업원은 매우 친절하고 공손한 것이 특성이다. 손님 역시 그런 친절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는 것은 관례다. 우동에서 파 냄새 어묵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인실은 다리가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몹시 시장했다. 아침에 찬밥을 물레 말어서 단무지 몇쪽하고 서너술먹는 둥 마는 둥 했기 떄문에 우동은 내려다보는 것이 조금은 행복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선뜻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전에는 그랬었다. 동경 와서 공부할 무렵, 혼자 밥을 먹고 있노라면 괜히 코허리가 시큰해지며 뼈에 사무치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건 했었다. 강한 성격에 좀처럼 그런 감정에 빠니는 일이 없었는데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겨울 벌판을 걷듯 외로워지는 것이었다. 그 후 형무소에 있을 때 인실은 음식을 대하면 외로운 것과는 사뭇 다른, 먹는 행위 자체가 비천하기 그지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수구를 들락거리며 밥풀을 주워먹는 한 미리 쥐 같았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간다는 기분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왜경한테 심한 욕설을 들었을 때도 인실을 자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경에 와서 거처를 정하고…… 비천하다든가 외롭다든가, 그것이 모두 감정의 사치라는 것을 인실을 깨달았다. 밥을 먹는다든가 몇끼를 굶는다든가. 그런 일들은 그냥 무의식으로 흘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의식, 그것에는 얼마간의 자학도 있었으리라. 인실은 천천히 우동을 먹기 시작한다.
"그거 다 뻔한 얘기야."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조선말이었다.
"오나가나 문제는 문제야."
그러고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인실은 관심도 없었다. 한참 후 그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람들의 웃음 소리였따. 인실은 젓가락을 놓았다. 절차 하나가 끝나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새 손님들은 많이 빠져나갔는가 가게 안이 넓어 보였다. 앞치마 두른 남자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인실은 좀처럼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등뒤에서 조선말로 얘기하던 남자, 청년들이 일어서는 기척이다. 그들은 인실에게 등을 보인 모습으로 우동갋은 지불하고 있었다. 휜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인실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학생 중 한사람이 돌아보았다. 순간 인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환국이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듯 그러나 그는 급히 인실에게 다가왔다.
"아주머니!"
환국은 저도 모르게 인실의 팔을 잡았다. 그는 인실을 보고 놀랐다기보다 인실의 임신한 모습에 놀랐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팔을 잡은 것은 인실의 위태로운 모습 탓이었다.
"이 팔 놔요."
인실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우동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간다. 결코 사람을 잘못 본 것도 착각도 아니라고 환국은 생각했다. 그는 똑똑히 조선말로 이 팔 놔요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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