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의 대통령들 중에서 풍수지리에 가장 높은 관심과 이해를 보인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로 풍수지리를 간결하게 함축하였다. 논두렁 정기라는 표현은 집이나 묘 터가 최소한 맥을 받아야 인물이 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대통령까지 오르게 된 데는 선영의 도움이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권불 10년이라더니 퇴임 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모자로 백담사와 감옥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했고 부정축재로 많은 재산을 몰수당했다. 특별 사면된 뒤에도 세상의 이목을 피해 자택에서 은둔하다시피 했다.
2021년 90세로 세상을 떴지만, 자신의 묘를 쓸 곳이 없어 아직도 집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퇴임 이후 말년에 이르기까지 오욕의 세월을 보낸 것인데, 과연 그 선영은 어떠한지 살펴본다.
1. 생가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는 수많은 방문객들로 몸살을 앓던 곳이지만,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 거의 없어 적막한 상태다.
혹자는 이곳의 집터를 넓은 백사장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상의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궁벽한 산골에 있는 집으로 여느 시골집과 다르지 않다.
풍수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2. 입향조 전인(全絪) 묘(1504~1539)
율곡면 내천리 마을 뒷산에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연못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못재라 부르며 신성시하였다. 이 연못 바로 위에 종사랑(從仕郞) 벼슬을 지낸 ‘전인’ 묘가 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전인’ 묘는 전두환 대통령과는 파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높은 산 정상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는 기이한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명당이라 부르는 것이다.
특히 묘를 둘러 싼 작은 암석들로 인해 금시발복하는 해목혈(蟹目穴)이라 한다.
蟹目穴 : 게의 눈과 같이 당판 주위에 작은 암석이 둥글게 박혀 있는 형태
사진으로 보듯이 묘에 담을 쌓듯 작은 바위가 빙 둘러쳐 있는데, 마치 제주도에서 묘를 조성하는 방법과 흡사한 형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묘와 주변에는 바위가 전혀 없다. 이 정도가 되려면 묘소 뒤편에서부터 이미 석맥이 간간이 박혀 있어야 함에도, 봉우리에서부터 묘소까지는 그 어떠한 연결 끈도 없다.
이곳의 암석은 급한 경사면에 빗물이 흐르면 묘의 봉분이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묻어 묘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활개 역할로 조성한 것이다.
못재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던 군사요충지였는데, 높은 산에서 식수를 쉽게 조달하기 위해서 연못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못재 주변의 둔덕을 보면 인위적으로 조성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높은 산에 연못이 있어 풍치가 좋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 공연한 돌무더기를 갖고서 괴혈이라 말하고 있다.
3. 조부 전영수(1867~1936) 묘, 丙坐
이곳은 풍수에 능한 전두환의 삼촌 전상희에 의해 1940년대 무렵 암장했다고 한다. 그 후 전두환이 군인으로 출세하면서 비로소 봉분을 갖추었으며, 대통령이 되서야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다.
이곳의 비문에는 “뭇 산들이 손을 맞잡고 절을 하며 여덟 곳의 시내가 굽이돌아 율곡의 명당을 형성한 곳”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파가 다른 ‘전인’ 후손들은 대통령 날 명당자리를 빼앗겼다 하여 배 아파하는 땅이다.
그러나 조부 묘까지 이어지는 맥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못재의 물을 가두기 위해 흙을 쌓아 조성한 둑을 전영수 묘소의 용맥이라 말하는데, 어쩌다가 우리의 풍수들이 이토록 꿰맞추기에 급급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곳은 명당은커녕 그 흔한 논두렁 정기조차 없는 곳으로 말 만들기 좋아하는 풍수들이 만든 명당에 지나지 않는다.
4. 부모 묘, 乾坐
전두환 부친 1967년 졸, 모친 1978년 졸하여 이곳에 모셔진다. 그리고 1980년 대통령에 오르자 몇몇 풍수들은 이곳을 제왕지지라 말하기도 했다.
주산으로 부터 내려오는 용맥은 약 200m가량 특별한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거칠고 투박한 상태고 묘의 청룡 쪽은 깊이 함몰한 상태다. 무엇보다 묘에서 물이 직거수로 빠져 나가는 것이 빤히 보인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로 여기는데, 그 물 빠짐이 꺼림칙하였는지 묘소 앞에 나무를 심어 가려 놓았다.
이와 같이 물이 곧게 빠지는 경우 대부분 급전직하 추락하는데, 군인 전두환은 이곳에 묘를 쓰고부터는 오히려 승승장구하다가 뒤늦게 물 빠짐의 영향을 호되게 받는다.
1931년 : 합천 출생
1955년 : 육사 11기 졸업
1967년 : 父 전상우 卒
1973년 : 육군 준장 진급
1977년 : 육군 소장 진급
1978년 : 母 김점문 卒
1979년 : 보안사령관
1980년 : 대통령 당선
1988년 : 백담사 유배
1995년 : 구속수감
1997년 : 추징금 2200억원 선고, 315억 징수
2003년 : 가재도구와 진돗개 등 경매 처분
2021년 : 90세로 졸
대통령 하야 후 보통사람들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니, 이곳 묘의 물 빠짐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풍수의 이치는 비록 시기의 문제일 뿐, 어긋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묘에서 권좌를 차지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데, 아마도 용상을 차지하는 것은 땅의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문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 묘에 대한 손석우 선생 글이 있어 옮겨본다.
“영물인 봉황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새입니다.
때문에 날아가는 새 형국의 이 묘 자리에 무거운 석물을 세우면 무게에 눌려서 추락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두고 보시오 비석을 철거하지 않으면 3년 후 음력 3월 3일 9시 42분에 일족이 전멸할 터이니.....
1987년 6.10 민주화 항쟁 이후 육관의 예언이 맞아 떨어질 조짐이 보이자 가족들은 육관의 경고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중장비를 동원하여 갔어도 올라갈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동차용 자키 수십 개를 가지고 비석의 아랫부분을 받친 다음 들어 올리니 비석이 한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비석이 넘어지자 비록 살기를 완전히 가시지는 못했지만 급전직하의 운명은 많이 회복하게 되었다. 그 뒤에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백담사에서 연희동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구속된 형제들은 모두 풀려난 것이다. 그러나 그 살기는 여전히 남아 있어 아직도 위험하다. (1993년 출판, <터>에서 발췌)
당시 자키를 이용해 쓰러트렸다는 석물은 어찌된 일인지 처음 그대로 꿋꿋하게 서있다.
부모님 묘 바로 아래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신후지지가 잘 가꾸어져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일장춘몽이란 말이 떠오르는 곳이다.
https://youtu.be/kpTjhkP0ZQM
첫댓글 전두환의 발응은 어디서 찾아야 하며
심한 가뭄에도 사시사철 물이 줄어들지 않는 못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