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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Croatia
11 문명과 자연이 만나는 곳, 크로아티아(7)
스플리트
스플리트는 305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곳은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였으며 많은 세력의 쟁탈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달마티아 지방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엘리나는 나에게 스플리트라는 도시에 관하여 설ㄹ명하기 시작하였다.
“중부 달마티아의 항구 도시인 스플리트의 인구는 약 190,000명 정도입니다. 물론 달마티아의 중심 도시라 할 수 있으며 크로아티아 경제의 수도로 불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크로아티아를 지나는 모든 선박이 거쳐 가는 곳이기도 하고요. 이곳은 그리스인의 식민도시 시절 아스팔라도스라고 불렸던 곳입니다. 또한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던 4세기에 군인 황제 시대를 종식하고 강력한 황제로 등장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고향이기도 한 곳입니다.”
달마티아 지역에 위치한 스플리트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도시이다. 두브로브니크에서 해변의 절벽을 따라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을 달리면 스플리트에 도착한다. 로마 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이곳에 있으며, 점박이 개로 유명한 달마시안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엘레나와 나는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는 스플리트의 구시가지로 걸어들어갔다.
내가 엘레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이 거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인 리바 거리입니다. 여름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라는군요.”
“이곳 스플리트는 두브로브니크와 더불어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양대 도시입니다. 인구 20만의 항구 도시이죠. 그리고 배, 버스, 기차 등의 교통수단으로 크로아티아의 다른 도시는 물론 헝가리,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과도 연결되니 크로아티아 교통의 허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잘 닦여진 리바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저 성벽을 보세요. 저 성벽이 남쪽 벽입니다. 우리는 지금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180미터 길이의 남쪽 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엘레나와 나는 이전의 궁전 모습이 그려져 있는 그림 쪽으로 가서 로마시대 때 궁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았다. 궁전은 지금보다 더 바다와 가깝게 있었다 3세기 후반의 궁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볼 수 있었다.
“이 궁은 기원후 295년-305년까지 약 10년간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로마군 진영의 구조를 본 따 만들어졌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자기의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길 원했습니다. 그때부터 이곳은 스팔라토라 불리었습니다. 305년 그는 그의 지위를 버리고 은퇴한 황제로서 이곳에 살러 왓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달마티아 살로나라는 여기서 9킬로미터 떨어진 커다란 로마 도시가 바로 그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 궁전 근처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의 유황 온천이 있었다는 겁니다.”
“엘레나, 우리는 지금 남문 근처에 있습니다. 남문에서 북문까지 180미터 길이입니다. 서쪽에서 동쪽까지는 215미터입니다. 모든 방면에 입구 혹은 문이 있습니다. 남문은 청동문, 서문은 철문, 동문은 은문, 북문은 금문이라고 불리었는데 정작 금문은 금은 없고 아주 깨끗한 석회석으로 되어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이었기에 철, 은에 이어 금문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궁 안의 주 거리는 서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집니다. 데코마누 거리라 불립니다. 이 거리가 궁 안을 두 개로 나누는데 북쪽은 군인들을 위한 곳이었고 남쪽은 황제 거주지로 황제가 필요한 것이다 있던 곳입니다.”
엘레나와 나는 남문으로 입장하였다. 입장료를 내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하자마자 왼편의 지도를 보았다. 지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지도를 보면서 이야기하였다.
“직사각형 부분이 로마 궁전이고 도시의 벽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것입니다. 여기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태어난 로마 타운이며 달마티아의 수도였던 살로나입니다. 이 파란 선은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으로 로마 타운, 궁전, 귀족의 집 등을 연결했습지다. 수도관의 길이는 9킬로미터였으며 물은 살로나 부근의 샘에서 끌어왔습니다. 이와 동일한 시스템이 지금도 스플리트에서 사용되고 있으니 이 도시는 1700년이 넘는 수도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죠. 대부분 지하에 있으나 일부 구간에는 수도교가 있습니다. 1979년부터 유네스코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17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잘 보존된 부분이 많답니다. 현재에도 남쪽, 북쪽, 동쪽 성벽을 거의 원형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무덤 즉 영묘입니다. 316년으로 추정하는 연도에 숨지고 여기 스플리트의 주 성당에 묻혔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은 게 되겠지요. 이곳 역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많은데 주민 중 85퍼센트가 로마 가톨릭 신자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정교회, 무슬림, 그리고 유대인으로 그 수는 비교적 적습니다.
이 궁의 남쪽에는 아주 잘 보존된 지하 홀이 있습니다. 황제의 개인 공간은 그 위 2층에 있었지요. 1층과 0층은 현재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개인 공간, 침실 같은 것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궁전 건물의 토대인 지하 홀입니다. 진짜 궁전은 저 위쪽 2층에 있었습니다. 2층에 있던 개인용 방들은 모두 파괴됐지만 이 지하 홀은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엘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 이유는 좀 우습지만 중세에 2층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 지하공간을 쓰레기장으로 사용했었기 때문입니다. 위에 집을 가진 사람들은 지하실을 활용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쓰레기 처리 문제를 해결했고, 저기 위에 구멍이 있는 게 보이시죠? 2백-3백년 후에는 이 지하 공간이 쓰레기로 거의 다 찼답니다. 2차 대전 후인 60년대 초에야 이 지역에 대한 탐사가 시작됐는데, 고고학자들이 여기서 아름답게 보존된 로마 건축물을 발견했던 것이죠. 다행스럽게도 지하의 건물 토대가 단지 위층 구조물의 반영에 불과했기 때문에, 즉 지하방들이 위층 방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쓰레기로 인해 지하가 잘 보존된 덕분에 현지인들이 로마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인 방들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정확히 알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로마인들이 모든 것을 어떻게 지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이는 석회석들은 스플리트 맞은편에 있는 브라치 섬에서 온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의회 건물,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그리고 베를린의 건물들이 브라치 섬의 석회석으로 지어졌습니다. 윗부분을 보면 로마의 벽돌과 작은 돌들이 있지요. 이제 서쪽으로 가보시죠. 좀 전에 우리가 서 있던 첫 방, 큰 방은 그 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일종의 리셉션 홀 또는 로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쪽에 보이는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동전의 복제품입니다. 당시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를 많이 만들었다는군요.
이 방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중세시대의 쓰레기입니다. 서쪽 방향을 보면, 전부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방이 탐사 시작 전의 온전한 상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로마시대 나무 두 조각인데, 2천 년 이상 된 것으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발견됐습니다. 좌우로 보이는 홀은 위층에 나무로 된 갤러리가 있었고 몇 조각의 나무가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혹시 로마제국의 지도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엘레나는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왼쪽에 있는 로마제국의 지도를 보여주었다.
“여기 스플리트에서 가까운 살로나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소아시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공식 처소였던 니코메디아(Nicomedia)도 있습니다. 황제가 스플리트에 온 것은 제위에서 물러난 다음이었기 때문에 니코메디아에 있던 것은 황제의 개인 저택이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황제가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렇게 퇴위한 로마 역사상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였다고 합니다. 여기 오른쪽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부터 그 이후까지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저 위에 284년에서 305년까지 재위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그 옆에 있는 것은 프리스카 황후입니다. 황후와의 사이에 딸 하나만 있었는데 황후 옆에 있는 그림이 그 딸인 갈레리아의 발레리아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두 명의 주 황제(Augustus)와 두 명의 부 황제(Caesar) 등 네 명의 황제를 두었습니다. 프리스카 옆에 있는 것이 두 주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 친한 친구였던 막시미아누스 황제이고, 그 옆으로 부 황제이자 공주 갈레리아 발레리아의 남편이었던 갈레리우스, 그리고 또 다른 부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있습니다. 부 황제들은 주 황제의 사위여야 했습니다. 일종의 빅 패밀리였지만 중심인물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죽자 남은 이들은 왕좌를 놓고 싸움을 벌였지요. 또 설명할 만한 중요한 인물이 저 아래 파우스타 오른쪽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도를 박해했는데 역사가들에 따르면 매우 잔혹한 박해였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퇴위하고 2년 후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채택했습니다. 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후에 그의 모든 동상, 욕실 등을 파괴해서 원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건 후에 새로 만든 것이지만 황제의 모습을 잘 재현했다고 본답니다. 로마, 베네치아에서 황제의 동상이 일부 발견됐고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동전도 많기 때문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였지만 원래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로마인도 아니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가 로마, 슬라브족이 오기 전에 살았던 일리리아(발칸 반도 서부 아드리아 해 동쪽에 있었던 고대 국가)인이었다고 추정합니다. 황제의 아버지가 아마도 해방된 노예였을 것이라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상태에서 가장 좋은 커리어를 쌓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인의 길을 택했고, 장군이 됐고, 그리고 결국 황제가 된 것입니다.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주피터(Jupiter) 신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로마 황제들이 스스로를 주피터의 아들이라 칭했답니다. 아마도 모든 황제들은 신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엘레나와 나는 지하 홀에서 벗어나 주 광장 방면으로 향하였다. 나는 엘레나에게 계속 이야기하였다.
“이곳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는 종종 여러 다른 전시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특히 5월 초에 오면 지하 홀에서 국제 꽃박람회를 볼 수 있죠. 다른 때에는 미술전시회, 콘서트 등도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닥을 보면 돌 파이프를 이용해 오수를 바다로 내보냈던 로마 하수처리 시스템의 일부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스템이 좀 더 세련됐을뿐,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시스템과 동일합니다. 수로 시스템은 좀 더 멀리 가보면 수메르 문명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돌로 만들어진 아치형의 복도를 거닐면서 나는 엘레나에게 더 이야기하였다.
“동쪽 홀과 서쪽 호렝 관해 이야기해 드릴게요. 동쪽 홀에서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는 어멘자라고 부르는 로마의 식탁입니다. 지금은 그림만 볼 수 있습니다. 식탁의 진품은 스플리트 시립 박물관에 있는데, 과거에는 수년 동안 이 방 구조물의 중앙에 식탁이 놓여 있답니다. 지하 홀 서쪽에는 위층에 리셉션 홀, 개인용 방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쪽은 위층에 큰 다이닝룸이 있었고 다이닝룸 가까이에는 더 동쪽 방면으로 궁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중목욕탕이 있었습니다. 황제는 서쪽에 자신만을 위한 개인 욕실을 따로 두고 있었다는군요. 공중목욕탕에 가까운 동쪽 다이닝룸을 드리클리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 다이닝룸에 음식을 누워서 먹을 수 있는 어멘자 테이블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드리클리늄은 프리 벤치, 소파 등을 의미합니다. 로마인들은 앉기보다 누워서 먹기를 즐겼고 하인들이 음식을 내오면 접시보다 테이블에서 손을 이용해 먹었습니다. 식탁 진품이 여기 없어 안타깝지만 습기 때문에 박물관으로 옮겨야만 했기에 지금 여기서는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쪽을 보면 옛것과 새것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석회석들은 대개 로마 시대의 것이지만 새것은 매우 하얗기 때문에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진짜 로마시대 벽돌은 색상이 매우 어둡습니다. 저기 아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진한 것이 원래 로마시대 벽돌이고 연한 것이 재건하면서넣은 벽돌입니다.”
엘레나와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 1층에 도착하였다. 1층은 궁전의 지하실과는 달랐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모습이랄까, 그러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은 시민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있고 로마시대 방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개인 방들은 저 위 2층에 있었다. 엘레나와 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는 성 도미니우스 성당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갔으나 성당 문은 닫혀 잇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광장에 대해 잠깐 설명하였다.
“이곳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으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페리스타일 또는 페리스털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기둥으로 틀이 짜여진 광장 또는 앞마당이라는 뜻입니다. 광장 주변에 기둥들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집트에서 들여온 이집트 화강암 기둥입니다. 그밖에도 여기 있는 많은 것들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집트ㅡㄹ 매우 좋아해 이 궁전을 지을 때 장식품을 이집트에서 많이 가져왔답니다. 여기에서 200개 이상의 이집트 기둥과 열세 개의 이집트 스핑크스가 발견됐다는군요. 그중 가장 잘 보존된 스핑크스가 바로 저기 있는데 거의 4천 년 된 것으로 유일하게 머리가 남아 있습니다. 다른 스핑크스들은 모두 머리가 잘려 나갔습니다. 스플리트의 기독교인들이 스핑크스를 괴물상이라 불렀고 뭔가 이교도적인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파괴한 것입니다. 궁전의 중요한 것들은 모두 여기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개인 방으로 가는 주 출입문, 동쪽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묘가 있었습니다. 황제 자신이 신이라 칭했기 때문에 황제 생전에는 무덤 자리에 중요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서쪽으로는 다른 세 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룩소르라는 멋진 커피숍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로마 시대에는 비너스 신전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다산의 여신인 마그나 마터(Magna Mater) 신전이 있었습니다. 서쪽 방향으로 좀 더 가면 지금도 제우스 신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족에 있는 개인 방으로 가는 출입문에 발코니가 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람들한테 항상 자기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 해 이 발코니에 와 앉아 있곤 했고 그러면 모든 로마인들이 이 광장에 엎드려 있어야 했답니다. 신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되므로 고개도 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뒤편에 있는 방으로 가자고 하였다.
“이 방은 로마시대부터 보존된 아름다운 원형의 방입니다. 전통 노래를 아카펠라 방식으로 부르는 젊은 남성들의 그룹인 클라파(Klapa) 가수들이 스플리트에 올 때에는 대개 이 방에서 공연합니다. 음향 효과가 좋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이 방이 개인 방들로 가는 출입문이었습니다. 황제의 호위병들이 이 방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남쪽 벽 방향으로 좀 더 걸어가면 중요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민속박물관입니다. 전통의상, 무기, 보석 등등 전시물이 다양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저 모퉁이에는 4성급 베스트 뷰 호텔이 있습니다.
왼쪽에 보면 문에 로마시대의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측 남쪽으로 보면 로마시대 황제가 산책을 하던 일종의 산책로가 있었습니다. 궁전 앞 아치에서 바다 경치를 내다볼 수 있었답니다. 방으로 돌아갈 때는 산책로에서 주 출입문을 이용했다는군요.”
엘레나와 나는 그곳에서 나와 라틴어가 아닌 크로아티아어로 설교를 시도하여 존경을 받았다는 그레고리우스닌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하고 성 도미니우스 성당에서 북쪽으로 향하였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이러한 좁은 골목길의 모습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별다를 것은 없는 듯하였다. 북문 바로 밖으로 나오자 왼손에 성경을 들고 서 있는 4.5미터 높이의 거대한 그레고리우스닌의 청동상이 있었다. 그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이 청동상은 1929년 크로아티아의 조각가 이반 메스트로비치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레고리우스닌은 10세기의 크로아티아 출신 대주교이다.
엘레나에게 말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라틴어가 아닌 크로아티아어로 설교를 했다는 것은 가톨릭의 변화를 알리는 시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개혁은 이로부터 수백 년 후 가톨릭의 비 성경적 교리와 관습을 배척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존 위클리프, 요하네스 후스, 사보나롤라,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 장 칼뱅 등의 종교 개혁가들이 나옵니다. 이들 중 존 위클리프나 마르틴 루터는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닌을 종교개혁과 연관 짓는 건 지나친 억지겠지요?”
내가 엘레나에게 왼쪽 엄지 발가락을 만져보라고 하였더니 그녀가 엄지발가락을 만졌다. ‘엄지발가락을 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동상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빌며 그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려고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서쪽으로 걸어갔다. 유럽의 구 도시가 그렇듯이 좁은 골목길을 거쳐 갔다. 좁은 골목길의 상점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엘레나와 나는 리바 거리라 불리는 해안도로로 걸어갔다.
리바 거리에 거의 다 왔을 때 엘레나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하여 골목을 빠져나오기 전 아이스크림을 샀다.
“한국 같으면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들고 혀로 핥아먹으면서 거리를 거닐 수 있을까요?”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해보는 거죠.”
엘레나와 나는 리바 거리에 있는 벤치로 와서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레나와 나는 얼마쯤 그곳에 앉아 있다가 이탈리아어로 간단한 식당을 의미하는 트라또리아(Trattoria)라는 글이 쓰여 있는 곳에 가서 식사를 하고 호텔로 이동하였다.
내일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으로 가기로 하였다. 내가 엘레나에게 “편한 신발, 편한 복장이요.”하고 말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