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르와 보편자의 문제
아벨라르는 다른 동시대인처럼, 순수철학을 보편자의 문제와 연관 짓게 되었고, 이 문제의 신학적 함축 의미를 설명하는데 주력했다. 보편자가 실재 속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지 사고 속에 존재하는지, 또는 물질적인지, 물질적이 아닌지, 감각적사물속에 포함이 되어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대해서 아벨라르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사물 속에는 우리로 하여금 공통된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있는가? 또 실제로 존재하는 보편자와 같은 게 없다면, 공통된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를 들어 '장미'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모든 장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장미'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장미라는 개념을 여전히 뜻하는가?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보에티우스의 해석'과 '기욤이 취한 두 번째 입장' 두 가지가 있다. 아벨라르는 종 속에 있는 유의 실재 혹은 개별자 속에 있는 종의 실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정의상 보편자는 몇몇 사물들의 술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의 술어가 될 수 없다. 각 사물은 자신일 뿐이며, 오직 어떤 것일 뿐이다. 즉, 사물에게 보편성이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보편성은 낱말에만 있다는 결정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낱말을 말할 때 그것은 소리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법칙은 문법이라는 논리학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문법적으론 옳지만,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어떤 술어는 타당하고, 어떤 술어는 타당하지 않는 것 인가? 사물들은 스스로 보편자의 술어가 되며, 보편적 개념들은 무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보편자는 자신의 독립적 실재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물들 자체에 우리가 말하는 논리적 술어의 타당성과 비 타당성을 가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몇몇 개별자에게 사람이라는 낱말을 사용할 수 있는 공통된 이유는, 이 모든 개별자가 동일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상태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존재다. 감각적 기관으로 탑의 모습을 보고 그것은 우리의 기억 즉 이성에 머문다. 이때, 탑에 대한 이성은 다른 탑과는 구별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인 탑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즉 보편자는 비슷한 본성과 상태를 가지고 있는 몇몇 개별자의 공통적이며 혼란스러운 상을 뽑아낸 혼란스런 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보편자를 형성하는 과정은 추상이라고 한다. 질료와 형상은 언제나 실제 속에서 함께 베풀어 지지만,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로 위에서 제기된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게된다.
첫 번째, 유와 종은 존재하는가? 즉, 실재하는 사물인가? 아니면 지적 개념의 단순한 대상들인가? 유와 종은 스스로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유와 종은 실제 존재자들 즉 특칭명사가 가리키는 동일한 특정 사물들을 표시 한다.
두 번째, 보편자는 물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것이 아닌가? 보편자가 명사인 한, 보편자의 본질은 언술된 낱말의 본질이기 때문에 보편자는 물질적인 것이다.
세 번째, 보편자는 감각적 사물 속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바깥에 존재하는가? 비물질적인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신과 영혼처럼 감각적인 것이 있다. 보편자는 후자의 형상을 가리키는 한, 감각적인 것 속에서 지속한다. 하지만 보편자가 추상에 의하여 감각적인 것과 동떨어진 형상을 가르키는 한 보편자는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있다.
이런 보편자의 문제는 언어와 관련이 큰 것 같다. 언어란 무엇인가?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언어는 인간의 사고나 행동들을 표현해주는 수단의 기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즉 기호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위에서 다루어진 논리학적 논의들 즉, 보편자문제와 같은 경우도 이런 한계에서 나오는 논쟁이 아닐까? 보에티우스의 주장처럼 우리는 보편자들은 감각적 사물들과 연결된 상태로 인지되지만, 우리는 육신으로 부터 구분되는 보편자를 알 수 있다. 인간 스스로 이런 문제들의 한계를 파악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실재적이고 완벽한 보편자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의 사고는 실재의 예외 되는 부분을 미리 알고 있다. 장미라는 일반개념이 존재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미의 실재는 다르다. 장미의 색깔, 크기, 형태 다르겠지만, 사람은 그런 보편자속의 오류를 보편자로 받아드리는 동시에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그러한 보편자 속에 맞추는 일도 자연스럽게 해낸다.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예를 들어 화가 났다는 말은 모든 사람의 감정상태가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감정의 상태가 동일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감정을 화났다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쉽게 바꾸어 표현한다.